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선장수 Oct 08. 2017

사랑에 대한 담론 : 3. 감정을 넘어 이성적인 사랑

이혼 후에 남겨진 것들 037

# 이 글은 한 번의 결혼과 이혼, 이혼 후에 경험한 만남과 이별을 통해서 제게 찾아온 고민과 그러한 고민에서 탈출하기 위해 잡다하게 읽은 책들, 그리고 여러 아마추어 작가님들의 다양한 글에서 알게 된 내용을 종합적으로 정리하는 글입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글이다 보니 일부 독자에게는 파괴적인 괘변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불편하시다면 죄송하다는 말씀 먼저 드립니다.


사랑에 대한 담론 : 3. 감정을 넘어 이성적인 사랑

지난 글에서 사랑이라고 뭉뚱 거려 얘기하는 것을 세 가지로 나누어 보았다. 사랑에 빠지는 것(감정의 생성)과 사랑하는 과정(행위의 지속)으로 구분했고, 후자를 혼자 사랑하는 과정과 쌍방이 사랑하는 과정으로 한 번 더 구분한 것이다.

앞선 글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일종의 착각이다. 완전하지 못한 한 개인이 자신의 공백/결핍/상처 등을 채워주고 감싸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만든 특정한 대상을 만나며 사랑에 빠지지만 그러한 생각은 이내 착각이고 환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사랑에 빠지고 교제를 하면서 서로의 관계가 깊어진다. 혹자는 동거를 할 수도 있고, 혹자는 결혼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엔가 뭔가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사랑하던 그 또는 그녀는 사라져 가기 시작한다. 자신이 사랑에 빠졌던 그 황홀한 경험을 유지하려고 이리저리 발버둥 치게 된다. 억지로 장점을 더욱더 찾으려 애쓰고, 단점에 대한 이해를 하려고 부단히 노력을 하고. 심지어 사랑에 빠진 감정이 쪼그라드는 스스로를 질타하며 자학스런 감정에도 빠져든다.

감정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에 빠졌던 그 황홀한 감정이 덧없이 사라져 가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내가 사랑이란 감정에 빠진 것은 지극이 본인 스스로의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과정일 뿐인데, 그러한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상대의 현실적인 모습 앞에서 자신의 감정이 무참히 찢겨져 가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대부분 2가지 선택을 하게 된다.

하나는 상대에 대한 자신의 기대를 투사하여 "강요"라는 집착을 선물하는 것이다. 내가 사랑한 그 또는 그녀로 머물러 달라는 일종의 압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결국 상대는 숨이 막히게 되고, 수용과 배려가 상당한 어지간한 성격이 아니고선 상대의 사랑마저도 숨통을 끊어 놓게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이러한 강요가 지속되고 그것이 갈등을 야기하게 되면, 본인도 미쳐버리게 되고 만다. 사랑하는 사람이 요 모양 이 꼴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받아들이기가 너무 괴로운 것이다.

또 하나의 선택은 실망이다. 이러한 실망은 상대에 대한 실망일 수도 있고, 부질없이 되어버린 초라한 사랑에 빠졌던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일 수도 있다. 당초의 열정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채 이미 미라가 되어버린 관계의 틀만을 부여잡고 그냥 큰 문제없이 맞혀 가며 지내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나는 그를 사랑한다. 사랑이란 그런 거야"라고 억지로 자기 자신에게 사랑을 주입하며 수도승 같은 금욕적인 삶을 살아가듯 버텨내는 경우이거나,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자신의 가슴에 아로새기며 온 세상의 업보는 모두 자신이 진 것 같은 원죄를 안은 채 벌 받는 사람처럼 그 관계를 청산하지 못하고 감내하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이든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이쯤에서 관계가 끝이나 거나, 강요 또는 실망으로 관계가 지속되는 상황이 앞서 말한 "사랑에 빠지는 것"에서 더 이상 진전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사실 나도 대부분의 관계가 여기까지였다. 이 글을 읽는 분들께서도 여기까지 이상의 과정을 거쳐본 경험이 없다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사랑에 빠지는"경험은 해 보았지만 "사랑하는 과정"을 지속적으로 유지해 본 경험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럼 이 단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누구나 하는 말이고, 어디서나 있는 말인... "상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쯤에서 아마 글을 읽다 보면 맥이 풀릴 것이다. 이 평범한 말을 하려고 이렇게 잔뜩 기름을 쳐놓았단 말인가?라는 생각이 든다면, 조금만 인내심을 가지고 좀 더 읽어 보시길 바란다.

우리가 상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을 잘할 수 있다면, 사랑이란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 이러이러한 게 좋고 매력적이어서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데, 저러 저러한 것이 밉고 못마땅한 상황을 어떻게 그냥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좋고 싫음에 대한 분별력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싫은 것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 상대를 사랑하는 방법을 좀 더 생각해 보면 그게 또 불가능한 것은 또한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우리가 자식새끼에게 사랑하는 행위를 대입해 보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처음 아이가 우리에게 다가왔을 때의 감동스러운 순간이나 순순하고 환한 미소로 나를 즐겁게 해 주는 그 순간 우리는 "사랑에 빠진"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아이가 자라나 미운 짓 시작하고,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실망스러운 모습도 보이게 되지만, 우리는 아이를 그래도 사랑한다. 완벽한 의미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는 못하겠지만(아이에게 나무라거나 화를 내는 경우도 있으니...) 그러한 미움과 실망이 아이에 대하여 사랑을 지속하는 행위를 멈추게 하지는 못한다.(물론 인간말종도 간혹 있다. 그런 부분은 논외로 하자)

즉,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에서... 내가 사랑에 빠진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하는 대상이 아닌 경우에도 우리는 사랑이란 행위를 지속시키는 상황을 흔히 볼 수 있다. 이것에서 우리가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왜 우리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 이렇게 절대적일 수 있을까?
왜 우리는 사랑하는 이성에 대하여는 그런 절대적인 사랑을 해 줄 수 없을까?


그것의 차이는 결국 감정과 이성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자식이 아무리 못마땅하다고 해서, 미워서 매를 든다 해도, 그러한 것은 순간의 감정일 뿐이란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고, 결국 이 녀석은 내 새끼라는 그 절대성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일종의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변화시킬 수 없는 것. 절대적인 것에 대한 수용이다.

그렇다면, 내가 사랑에 빠진 그 또는 그녀를 이렇게 절대성의 틀속에 넣어서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아이를 사랑하듯 그 또는 그녀도 받아들이며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에 빠진 이성을 나의 자식처럼 절대적으로 운명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내가 그 또는 그녀에게 사랑에 빠진 "사실"에 집중해야 한다.

이전 글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랑에 빠지는 것은 한 개인이 자신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불완전하다는 것(자신의 공백/결핍/상처/불안)을 발견하거나, 나아가 그러한 불완전성을 채워줄 수 있다고 확신되는 특정한 대상을 만나면서 시작된다. 누군가를 알게 되면서 자신이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였는지를 인식함으로써 더 이상 그 상대가 없으면 살아갈 이유도 용기도 목적도 가질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거나, 의식적으로 인지하고 있었던 자신의 공백을 어떤 특정한 상대가 이를 채워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면서 살아가는 이유나 용기 목적이 분명해지는 황홀한 경험이 바로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랑에 빠진 그 사실 그 자체이다. 즉, 내가 사랑에 빠진 "그 또는 그녀" 그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 하필 왜 나는 그 또는 그녀에게 사랑이란 감정을 느꼈는가?  "이러이러해서"라고 우리는 사랑에 느낀 감정을 분해해서 설명할 수 없다. 이뻐서, 돈이 많아서, 똑똑해서...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구체적인 이유를 나열한다 해도, 그 끝은 항상 설명이 부족해질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왜 사랑에 빠졌는지 100가지 이유를 들어서 설명한다 했을 때, 그 100가지 이유를 완벽히 지니고 있는  다른 이성을 데려다 놓으면 과연 똑같이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혹 그런 사람이 있을까 무섭다)

아이가 혈연이라는 절대적이고 운명적인 과정으로 나에게 다가온 것처럼, 사랑에 빠지는 것도 하필 "그 또는 그녀"라는 절대적이고 운명적인 대상이 나에게 다가온 것이다. 사랑에 빠지는 경험은 그리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그런 경험은 아이를 가지는 것과 유사한 경험이다. 즉, 운명적이고 절대적인 만남이란 말이다. 그렇게 절대적이고 운명적인 만남에서 이유가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나를 사랑에 빠지게 만든 이유를 찾으려 말고, 내가 그 또는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에 집중해야 한다.

그 또는 그녀가 절대적이고 운명적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신. 믿음.

이것이야 말로 사랑이 목숨을 걸 정도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힘이다. 이러한 확신과 믿음은 절대 감정적인 과정만으로 될 수 없다. 그냥 우연히 만나게 된 어떤 특정한 사람을 사랑에 하게 되고 그러한 우연에 절대성을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사랑의 힘이다.

사랑에 빠진 '감정'이, 배려 존중 책임이라는 '이성'을 만들어내고, 그러한 '이성'적 행위가 서로를 감동하게 하고 사랑이란 감성의 황홀경을 증폭시키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제대로 사랑을 지속하는 방법이다.

사랑은 단순히 감정이 아니다. 다분히 이성적인 과정(존중/배려/책임)이 존재하여야 하며 이러한 이성적 과정이 절대적으로 지속될 때 처음 사랑에 빠졌던 그 황홀한 감정이 다시금 살아나는 기적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PS :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남는다. 그럼 사랑한다고 느낀다면 무조건 그것에 절대성을 부여해야 하는가? 답은 "그렇다"이다. 다만, 내가 사랑한다고 느끼는 그 마음의 진정성은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 금사빠가 쉽게 달아오른 상황을 자기 자신은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잘 아는 타인은 고개를 가웃거릴 것이다.

즉, 내가 정말로 저 사람이 아니면 더 이상 살아갈 희망도 목표도 없다고 느끼는 자신의 감정에 대한 진정성은 본인 스스로만 알 수 있다. 타인이 뭐라고 말해줄 것이 못된다.

작가의 이전글 사랑에 대한 담론 : 2. 사랑은 혼자만의 착각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