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진
김 전무가 김 대표가 되었다. 승진 소식이 신문에도 실렸다. 축하 메시지로 전화가 바빴고 축하 화분으로 사무실이 꽃집 같았다. 새로 구입할 차량의 필요 사양과 운전기사 채용을 위한 면접 날짜도 정했다. 집무실 가구의 디자인도 골랐다. ‘장군이 되면 수십 가지가 바뀐다고 하더니 비슷하구나.’ 김 대표는 생각했다.
# 첫 임원회의
대표가 된 후 첫 임원회의였다. 김 대표가 회의실 앞에 도착하니 웃는 소리가 문밖에서도 들렸다. 문을 여니 임원들이 말을 멈추고 자리에 앉았다. ‘무슨 재미있는 얘기를 했던 모양인데 내가 들어가니 하던 말을 멈추네.’ 회의실을 둘러 보면 이런 생각을 했다.
김 대표는 자기 자리로 갔다. ‘어, 이제 내 자리가 가운데구나. 의자 하나 옆인데 기분이 이상하네.’ 그가 전무 때 앉던 자리는 대표님 바로 옆이었다.
김 대표가 자리에 앉은 후에 도착한 임원들이 허둥지둥 자리를 찾아 앉았다. 예정 보다 5분 일찍 회의를 시작했다. ‘다음부터는 2분쯤 늦게 와야겠다. 대표님이 늦게 오셨던 이유가 있었구나.’
A상무가 전사 실적을 발표했다. 발표 중간에 김 대표가 간단히 발언했다. 임원들이 그의 말을 받아 적기 시작했다. ‘아니, 이 친구들이 왜 내 말을 받아 적지? 아, 대표가 얘기하니까 받아 적는 거구나. 그런데 내가 방금 무슨 이야기를 했지? 뭐 중요한 게 있었나? 별로 중요한 얘기 없었던 거 같은데 왜 적지?’
회의 마지막에 A상무가 김 대표에게 회의에 대한 강평을 해 달라고 했다. ‘별로 할 말이 없는데... 준비도 안 했고...’ 김 대표는 같이 힘을 모아 회사를 성장시켜 보자고 했다.
# 1년 후, 코칭
“CEO가 되시고 나서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박 코치가 김 대표에게 물었다.
“대표가 되고 첫 임원회의에서 이제 나는 동료를 잃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김 대표는 CEO가 되고 동료가 없어졌다. 대표가 되기 전에 동료 임원들은 같이 소주도 한잔 하고 골프도 치면서 사장님이나 회장님 흉도 보던 친구이자 선후배들이었다. 그러던 그들이 이제는 김 대표의 ‘말씀’을 받아 적는다. 자기들끼리 잡담을 하다가 김 대표가 회의실에 들어가면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자세를 바로 한다. 사무실 문을 벌컥 열고 “점심 먹으러 갑시다. 새로 맛집을 하나 발견했어요.” 하던 옆방 B전무도 먼저 점심 먹자는 얘기를 하지 않는다.
“왜 동료 임원들이 대표님을 그렇게 대했을까요?” 박 코치가 물었다.
“CEO도 임원 중의 한 사람이지만 결국 임원에 대한 최종 평가자이지요. 그래서 CEO를 ‘빅 보스’(big boss)라고 부르나 봅니다. 대표라는 건 외로운 자리더군요.”
임원에서 대표이사가 되는 순간 최고경영자와 부하 임원의 관계가 된다. 다른 임원과의 동료와 친구 관계는 사라진다. 평가자와 피평가자 관계가 된다. 친구처럼 친근하게 지내면 되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결국 상사와 부하의 관계이다. 부하 입장에서 회사 그만 두라고 할 수 있는 사람과 마음을 터놓기는 쉽지 않다.
“CEO가 되고 또 잃은 것이 있습니까?”
“핑계가 없어졌습니다. 본부장일 때는 비빌 언덕이 있었지요. 대표님이죠. 대표님 의견을 구하는 척하면서 의사결정을 떠넘기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제가 최종 결정을 해야 합니다.”
매출 실적이 나쁘면 영업본부장이 못해서 그런 거고 품질이 나쁘면 공장장이 못해서 그렇다고 이야기하는 대표는 없다. 대표는 영업본부장과 공장장이 성과를 낼 수 있게 하는 사람이다. 결국 영업본부장과 공장장이 부족했다면 대표가 제대로 일을 못한 것이다. 부족한 사람에게 그 자리를 맡긴 것도 대표이니 대표가 문제이다. 성과가 나쁜 원인을 인수분해해서 누구누구의 책임으로 나누고 핑계를 대는 것은 CEO의 할 일이 아니다.
# 5년 후, 코칭
“김 대표님이 대표로 일하면서 얻은 것은 무엇입니까?” 박 코치가 물었다.
“무한한 책임감을 얻었습니다.”
재작년에 회사에 위기가 왔다. 계열사 한 곳이 어려워지면서 은행이 회사에 대해서도 대출 연장을 거절하고 원자재 공급이 중단되는 상황을 맞았다. “이러다 회사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대표를 맡고 있을 때 회사가 망한다고 생각하니 끔찍했습니다. 드라마를 보면 ‘내 대(代)에 집안이 망하는구나.’ 하고 통탄하는 종손(宗孫)이 나오지 않습니까? 정신이 번쩍 들었지요.”
최고경영자가 된다는 건 무한한 책임을 갖는 일이다. 임원은 성과에 대한 압박을 느낄 뿐이지만 최고경영자는 회사의 생존과 운명에 대한 책임을 갖는다. 그래서 CEO는 위기를 온 몸으로 맞는다.
회사는 혼란 중에도 흑자를 유지했다. 구조조정이나 회사를 떠난 사람 없이 1년에 걸친 M&A 과정을 통해 성공적으로 새 대주주를 맞았다.
“무한한 책임감이라니... 힘드셨겠군요.”
“신기하게도 힘든 줄 몰랐습니다.”
김 대표는 문제에만 집중했다. 다른 사람을 탓하기보다 회사를 살리기 위해 지금, 여기서 할 일이 무엇인가 고민했다. 직원들도 흔들리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했다. 고객사를 찾아다니고, 은행에 머리를 조아리고, 협력업체에 사정했다. 노조위원장도 ‘대표님, 도와 드릴 일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하면서 힘을 보탰다.
CEO에게 책임감이란 위에서 누르는 힘이 아니라 아래서 받쳐 주는 힘이었다. 김 대표에게 책임감이란 부담이 아니라 구성원으로부터의 격려와 신뢰였다.
# 퇴임
김 대표, 이제 김 전(前)대표는 박 코치와의 마지막 코칭을 마쳤다. 그는 임원들이 기다리는 환송회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하라고 하겠지. 무슨 말을 할까?’ 생각하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