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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코치 May 10. 2021

사장의 기쁨

#1


학자금 지급 기안이 올라왔다. 고등학교와 대학에 다니는 직원 자녀의 등록금을 지급하겠다는 내용이다. 기안의 내용과 지급 금액은 제쳐 놓고 첨부된 엑셀 파일부터 열어 보았다. 직원 자녀의 이름과 학교가 부모의 이름, 소속 부서와 함께 정리되어 있다. 첨부된 명단을 한줄 한줄 살펴보았다.


‘이 친구는 미대를 다니네. 이 부장은 기술자인데.’

‘김 차장 딸은 A고등학교를 다니는구나, 여기 명문 자사고인데, 김 차장이 자랑스럽겠네, 아는 척 한 번 해야겠다.’


이름이 비슷한 여학생이 있어서 살펴보니 자매였다. 두 친구 모두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다. 언니의 학교는 신촌이고 동생은 성북구였다. 부모님이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두 사람의 등록금 지원 금액을 합해 보니 꽤 큰 금액이었다. 도움이 되겠구나 싶었다. 그래도 등록금 말고 들어가는 돈이 꽤 많을 거다.


봄과 가을에 있는 학자금 지급 결재가 사장하는 가장 큰 기쁨이었다. 회사 형편이 좋아서 직원들에게 자녀 학비를 지원해 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맙고 즐거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직원 자녀들이 졸업해서 명단에서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면 기쁘면서도 마음이 묘했다. 내가 졸업시킨 거 같은 기분이었다.

퇴근해서 아내에게 학자금 결재를 하는 게 참 즐겁다고 얘기를 했다. 아내는 또 어떤 때 사장이 된 기쁨을 느꼈느냐고 물었다.


#2


B사원이 첫차로 어떤 차를 살까 동료들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액센트를 사느니 돈을 조금 더 보태면 아반테를 살 수 있고, 그걸 사느니 소나타를 사는 게 낫겠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못 들은 척 하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한마디 던졌다. “너 그러다 BMW 사겠다.”


파트너 세 사람이 시작한 구멍가게 컨설팅 회사가 3년이 지났을 때였다. 직원이 한사람씩 늘어가며 회사가 크고 있었다. B사원은 경영대학원을 다닐 때 우리 회사에서 인턴을 한 후 입사한 직원이었다. 우리 회사에서 받은 봉급을 모아서 그는 고민하고 있었다. 인생의 첫 차로 무엇을 살까 하고.


#3


회사가 명동 근처에 있었다. 저녁 약속이 있어 인파를 헤치며 명동길을 걷고 있었다. 저 앞에 우리 회사 남녀 직원 둘이 어느 가게 쇼윈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A주임은 영업팀이고 B주임은 정보팀인데... 사내커플이구나. 느낌이 확 왔다. 모른 척하기로 했다. 그들 옆을 지나치는데 장난기가 발동했다. A주임의 등짝을 철썩 때리고 지나갔다. 5미터쯤 가다가 뒤를 돌아봤다. 두리번거리던 A주임의 눈과 내 눈이 딱 마주쳤다. 그가 싱긋이 웃었다. B주임은 ‘대표님한테 우리 걸렸어. 어떻게 해...’ 하는 표정으로 남친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킥킥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 날 비서에게 ‘A와 B가 사귀지?’ 하고 물었다. 회사 마당발인 비서는 어떻게 아셨느냐고, 사내에서 아직 몇 사람만 안다고 했다. “비밀연애하려거든 좀 멀리 가서 데이트하라고 해.”


그들은 일 년쯤 후에 결혼했고 B주임은 아들을 낳고 육아휴직을 갔다.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 딸도 얻었는지 큰애는 학교를 갔는지.


기업의 목적은 주주 가치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소비자에게 좋은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여 이익을 높이면 주주 가치가 높아진다. 기업의 의미를 주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을 주주 자본주의(shareholder capitalism)라고 한다. 이와 비교해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는 기업의 목적이 이해관계자를 위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이해관계자는 주주뿐 아니라 임직원, 고객, 협력업체, 소비자와 사회를 뜻한다. 기업은 이해관계자에게 좋은 제품과 일할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기여한다.


사장 노릇 하면서 가장 신나고 기분 좋았을 때가 언제인가 생각해 보니 그건 사업이 잘 되어 돈을 많이 벌었을 때가 아니었다. 직원들이 성장하고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키워 나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나는 기업의 목적은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유지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기업이 성장하여 더 많은 사람에게 일자리를 주고 급여를 주는 것만큼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그러고 보면 나는 주주 자본주의자가 아니라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자인가 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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