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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코치 Jul 12. 2021

센 척 하기

“박 상무는 열심히 잘 하고 있어. 그런데 카리스마가 좀 있었으면 좋겠어.” 평가 면담에서 사장님이 내게 하신 말씀이었다.


사장실을 나오고 나서 ‘그런데 카리스마가 뭐지?’ 싶었다. 인사팀장인 김 팀장에게 사장님이 말씀하신 카리스마가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어 보았다. “고함 좀 지르시라는 거죠.” 김 팀장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세 보이지 않으시다는 이야기입니다. 상무님 사람 좋다는 얘기 많이 들으시잖아요. 강한 모습을 보이실 때도 있어야죠.” 하고 김 팀장은 덧붙였다.


사실 그런 얘기는 이전 직장에서도 가끔 들었던 이야기였다. 상사들이 내게 가지고 있던 불만이었다. 사람 좋다는 얘기만 들어서 일이 되겠느냐고 했다. 나는 사람 좋다는 평을 듣는다고 일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니 문제는 없지 않느냐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나는 부하가 일을 잘못했다고 화를 내거나 언성을 높여 나무라지 않았다. 성격상 화를 잘 내지 않았다. 화를 잘 내는 상사와 일해 온 부하들이 보기에 나는 사람 좋은 상사임에 분명했다. 그렇지만 조직에서 사람 좋다는 평을 듣는 것은 좀 만만해 보인다는 느낌인 것 같아서 솔직히 그리 좋게만 들리지 않았다.


‘그래 이제 나도 카리스마 넘치는 임원이 되 보는 거야.’ 하고 생각했다. 화도 내고 소리도 지르겠다고 마음먹었다. 관장하는 조직의 크기도 적지 않아서 그런 리더십 스타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오래지 않아 나의 강한 면을 보여 줄 기회가 왔다. 대대적으로 조직을 개편하면서 자리가 없어진 임원과 부장 여러 명이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그 작업을 하필 내가 담당했었다. 인사발표가 난 직후 회사를 떠나게 된 한 임원에게 전화가 왔다. 그는 이런 인사가 어디 있느냐고 크게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연초에 임원으로 승진했는데 6개월 만에 회사를 떠나라고 하니 그럴 만 했다. 임원은 언제든지 회사를 떠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나도 같이 언성을 높였다. 서로 고함을 지르다가 그가 말했다. “아니, 박 상무님, 당한 사람은 접니다. 왜 상무님이 소리를 지르고 그럽니까?”


전화를 끊고 나니 창피했다. 아마 얼굴이 벌겋게 되었을 것이다. 일부러 화를 내는 건 내 성격에 맞는 일이 아니었다. 내 성격대로라면 말없이 들어 주고 뭘 도와드리면 좋겠느냐고 물었을 것이었다. 강해 보이는 임원이 되어 보겠노라고 나답지 않은 행동을 했다고 후회했다. 목소리를 높여야 할 때와 그렇지 말아야 할 때를 가리지 못했다. 자주 화를 내는 성격이 아니니 전화에 대고 고함을 치면서 목소리도 떨리고 손까지 떨렸다.


앞으로 강해 보이기 위해 꾸며서 화를 내거나 목소리를 높이는 짓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이후에는 내 성격과 스타일대로 동료와 부하들을 대했다. 단순한 실수였거나 몰라서 잘못한 일은 나무라지 않았다. 일하는 방법을 점검해 보고 앞으로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이유로 그렇게 했는지, 그 방법이 좋다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인지, 진행하면서 잘못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랬다면 고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를 하나씩 물어 보았다.


그렇지만 거짓말을 하거나 보고를 뭉개거나 구태의연하게 일할 때는 단호하게 잘못되었다고 알려 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필요할 때 화도 조절하면서 낼 수 있게 되었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큰 소리로 화를 낼 일이 있었던 거 같다.


코칭을 시작하는 날 만난 이 상무는 한눈에도 인품이 참 좋아 보이는 사람이었다. 예의가 바르고 차분하고 진중했다. 강점진단 결과를 보니 역시 화합과 포용과 공감력이 상위에 있었다. 부하직원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타 부서와 원만하게 협조해서 일하는 스타일이었다.


이 상무 본인은 자신의 이런 리더십 스타일에 만족하지 못했다. 건설사 경영자로서 바람직한 리더십 스타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리더는 강하게 주장할 때도 있어야 한다고 상사들도 그에게 충고했다. 부하직원들은 타 부서와 협조하는 건 좋지만 사람 좋은 이 상무 덕에 하지 않아도 될 일까지 한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어떤 경우에 상무님의 리더십 스타일이 성과에 도움이 되었습니까?” 내가 물었다.


어느 협력업체와 관공서가 회사에 유난히 까다롭게 굴었다. 이  두 곳의 교섭 창구는 이 상무가 팀장 시절부터 계속 맡아 왔다. 다른 부서장이 맡으면 업체와 삐걱거렸지만 이 상무와는 말이 통한다고 상대방은 좋아했다. 할 수 없이 부서가 바뀌어도 이 상무는 계속 업무를 가지고 다녔다.


또한 이 상무는 최근에 고객상담부서를 맡고 작은 성과를 올렸다. 10년 넘게 분쟁이 있었던 고객과 최종 합의를 보았다. 거의 일주일 동안 30시간 넘게 고객과 대화를 나눈 성과였다. 고객은 임원이 이렇게 오랜 시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준 건 처음이었다고 했다.


“상무님은 부드럽고 소통하는 리더십을 가지고 계신데 강한 리더가 되시고 싶은 거 같습니다. 그렇게 해 보고 싶으십니까?” 짓궂은 질문이었다.


“강한 척 해 보았지요. 남의 옷을 입은 거 같고 참 불편했습니다. 말씀 나누다 보니 제 스타일도 남들이 가지지 못한 좋은 점이 있네요. 사실 성격을 바꾸고 싶다고 바꿔지겠습니까? 좋은 점을 살려 보아야죠.” 이 상무의 표정이 밝아졌다.


흔히 리더를 장수(將帥)에 빗대어 용장(勇將), 덕장(德將)으로 나눈다. 용장은 ‘나를 따르라’고 하는 강한 리더이고 덕장은 ‘대화하는’ 부드러운 리더라고 전제하자. 오랜 세월 국내 기업에서 일하는 관리자의 리더십 스타일의 기본값(default, 디폴트)은 용장이었다.


그런데 밀레니얼세대와 Z세대가 조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면서 요즘 용맹무쌍한 리더들은 고민이 많다. 젊은 세대는 소통하지 않고 일방적이기만 리더를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용장들은 다면평가에서 매서운 피드백을 받고 자신의 리더십 스타일에 대해 고민하고 고쳐 보려고 하고 있다.


이제 리더십 스타일의 기본값은 덕장이다. 남의 말을 들어 주고 온화한 리더들은 ‘좋은 사람’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도 좋다. ‘내가 해 봐서 아는데’ 부드러운 사람이 센 척 하기도 쉽지 않다. 아니, 그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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