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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원숭이인가?

by 박코치

#1


김 팀장은 급하게 회의실로 가고 있었다. 복도를 지나는데 이 대리가 김 팀장을 불렀다.


“팀장님, A사의 C상무가 약속한 신제품 테스트를 해주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쪽 물량이 밀려서 생산을 끊고 테스트하기가 어렵답니다. 이달에 테스트를 끝내야 우리도 출시 일정에 맞추는데요.”


A사는 신제품을 테스트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고객사이다. 김 팀장은 사원 때부터 A사를 담당했었다.


“그래? 그럼 내가 A사 B사장한테 부탁해 볼게.”


바로 이 순간 이 대리의 등에 매달려 있던 원숭이 한 마리가 김 팀장의 등으로 옮겨 앉았다. 이제 김 팀장은 이 대리의 일을 해야 한다. 벌써 원숭이는 김 팀장의 등에서 먹이를 달라고 끽끽거리기 시작했다.


#2


위의 이야기는 ‘경영자의 시간: 누가 원숭이를 가지고 있는가?’ (‘Management Time: Who’s Got the Monkey?’, William Oncken, Jr; Donald L. Wass, Harvard Business Review, Nov-Dec, 1974) 라는 글에 실린 사례를 각색한 것이다. 이 글은 1974년에 발표된 이후 고전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지금 읽어도 그 의미가 크다.


이 글에서 원숭이는 부하의 일을 의미한다. 부하가 상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상사가 이를 받아들이는 순간 원숭이는 상사의 어깨로 옮겨 간다. 상사가 부하의 일을 떠맡게 됨에 따라 상사 자신의 일을 할 시간을 잃어버리게 된다. 글에서는 상사가 원숭이를 돌보는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상사는 원숭이에게 먹이를 제대로 주어야 한다. 아니면 부하가 돌보도록 해야 한다.

원숭이는 방치하면 굶어 죽어 뒷일이 커진다. 살아나는 경우도 있다. 즉, 부하가 요청한 일을 미결 상태로 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방치하면 일이 더 커질 수도 있다. 완결해 줄 자신이 없으면 부하가 직접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


둘째, 상사는 자신이 돌볼 수 있을 만큼의 원숭이만 데리고 있어야 한다.

상사가 동시에 많은 수의 원숭이를 돌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한 마리의 원숭이를 돌보는 시간을 가능한 짧게 해야 한다. 현실에서 상사는 부하의 요청사항을 15분 내에 처리함으로써 항상 적정한 숫자의 요청사항을 유지하고 자신의 시간을 관리하도록 한다.


셋째, 원숭이는 반드시 정해진 시간에만 먹이를 주어야 한다.

원숭이가 배고파한다고 그때그때 먹이를 주지 않도록 한다. 상사는 비상 상황이 아니라면 부하와 약속시간을 정하여 업무를 협의하고 도와 줄 일을 정하도록 한다.


#3


1974년은 지금과 달리 ‘명령과 통제’(command and control)의 시대였다. 상사는 일을 나누어 부하에게 시키고 부하는 단순히 주어진 일만 하던 시절이었다. 이 글은 관리자의 시간 관리에 대한 글이었다. 상사가 부하의 일을 떠맡지 말고 자신의 일을 할 시간을 확보하라는 메시지였다.


지금은 그때와 달리 ‘위임’의 시대이다. 상사가 원숭이를 맡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달라졌다. 지금은 상사의 시간 관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현장감 있고 빠르게 일을 진행하기 위해 원숭이는 부하가 돌보도록 해야 한다.


요즘 부하가 할 일을 넘겨받아 하는 상사가 어디 있느냐고 할 것이다. 정말 그럴까? 작은 의사결정까지 직접 내리려고 하고 디테일까지 챙기는 최 상무를 직원들은 ‘최 대리’라고 부른다. 심지어 ’과장급 대표‘로 불리는 CEO도 있다. 아직도 많은 관리자들이 원숭이를 넘겨주기는커녕 부하의 원숭이를 가져다가 원숭이 농장을 차려 놓고 있다.


왜 대리급 임원과 CEO가 심심치 않게 보일까? 왜 그들을 일을 놓지 못할까? 일을 넘겨줄 생각은 있는가? 아니, 오히려 가져오고 있지 않은가? 부하가 해도 되는 일을 상사가 직접 하게 되는 데는 상사가 제공하는 원인이 몇 가지 있다.


무엇보다 상사도 일을 통해 성취감을 느끼고 싶어 한다. 부하가 하는 일은 과거에 상사도 했던 일이다. 해 본 일이니 쉽고 편하게 해 낼 수 있고 일하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김 팀장은 자신이 B사장에게 이야기하면 신제품 테스트 일정은 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모처럼 김 팀장도 B사장과 이야기도 나누고 업무상 문제를 해결하는 보람도 느껴 보고 싶었을 것이다.


또한 상사는 부하들에게 자신의 업무 실력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상사는 왕년에 내가 일 좀 했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한다. 일종의 잘난 척이다. 이것을 이용하는 부하들도 있다.


신제품 테스트 일정 정도는 이 대리가 C상무와 다시 이야기해서 풀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 대리는 김 팀장이 A사의 B사장과 형님, 아우하는 사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테스트 일정에 차질이 생긴 걸 김 팀장이 들으면 적극 나서 줄 거라고 예상했다. 김 팀장은 이 대리의 원숭이를 기꺼이 자신의 등에 올려 놓았다.


더불어 상사는 상사로서 힘을 과시하고 싶어 한다. 자신이 일을 완료해야 부하가 다음 단계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상사가 권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 팀장은 결재를 바로바로 하지 않는 편이다. 급하다고 부하 직원이 미안해하면서 결재를 부탁할 때 김 팀장은 ‘내가 없으면 일이 돌아가지 않는구나’ 하고 생각한다.


상사가 원숭이를 떠맡게 되는 데는 부하가 제공하는 원인도 있다. 자신에게 권한이 주어졌어도 상사에게 일을 떠넘기는 부하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부하에게 원숭이를 넘겨받지 않으려면 상사는 다음을 조심해야 한다.


첫째, 무심코 대답하지 말라.


박 대표는 대표가 된 후 신중하고 말하고 가부(可否)가 분명해졌다. 다음과 같은 일을 몇 번 겪으면서 그렇게 되었다.


그날 박 대표는 최 상무와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표님, 신제품 발표회 때 대표님이 직접 발표하시는 건 어떨까요?”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네.” 박 대표가 말했다. 다음 날 담당팀장인 김 팀장이 박 대표에게 발표회 시나리오를 보고했다. “대표님이 직접 발표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생각해 보자고 한 이야기인데... 최 상무 지가 해야지 왜 내가 해....’ 박 대표가 작게 중얼거렸다.


관리자는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 하고 이야기해야 한다. 또한 직급이 높아질수록 말은 천천히 시작하는 게 좋다. 그렇게 하면 사람이 똑 부러지고 사려 깊어 보이는 효과도 있다. 부하가 자신이 할 일을 의도적으로 상사에게 떠넘기는 것인지, 부하들도 그냥 의견 제시를 한 것인데 상사가 덥석 문 것인지는... 부하만 알고 있다.


둘째, 무심코 결재하지 말라.


박 대표는 전자결재를 할 때 ‘열중쉬어’ 자세로 결재를 하게 되었다. 머선 얘기일까?


“대표가 되고 처음에는 결재가 많으니 빠르게 결재했습니다. 어느 날 대표가 아니라 담당 임원이 최종 결재해도 되는 건이 많다는 걸 깨달았지요. 이후부터 하나씩 결재하지 않고 먼저 모든 결재 건을 훑어보고 대표가 결재할 필요가 없는 건은 돌려보냅니다. 훑어보다가 무심코 가결(可決)을 클릭할까봐 마우스를 손에 잡지 않습니다. 열중쉬어 자세로 결재문서를 보는 거지요.”


조직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결재가 상방경직성(上方硬直性)을 가진다는 걸 알고 있다. 머리 아프게 의사결정을 하고 부담을 떠 앉느니 ‘대표님까지 결재 올려!’ 한 마디면 해결된다. 상사는 클릭 하나, 서명 하나가 자신이 할 것인지 부터 따져 보아야 한다.


부하가 원숭이를 데리고 왔다가 나도 모르는 새 내 의자에 묶어 놓고 가지 않았을까? 복도에서 만나서 귀엽다고 쓰다듬어 준 원숭이가 화장실 간 새 내 책상에 앉아 있는 건 아닐까?


항상 바쁜 상사들이여. 지금 당신 어깨 위의 원숭이는 누구의 원숭이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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