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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사원과 잡무

by 박코치

부서 경비 관리는 신입사원의 몫이었다. 지금은 대리가 된 내 큰딸의 신입사원 때 업무 중 하나였다. 식대, 교통비 등의 비용을 전산에 입력하고 사용 한도를 넘지 않게 관리하는 일이었다. 월말이 가까워져 남은 예산이 줄어들면 큰돈을 쓸 때 미리 알려 달라고 부서 선배들에게 공지했다. 그래도 한도가 초과되는 일이 생긴다고 딸애는 투덜댔다. 몇 달이 지나니 요령이 생겼는지 잘 넘기는 것 같았다. 그래도 말일이면 딸애는 자기 일은 제쳐놓고 부서경비 업무에 매달렸다.


작은딸은 아직 신입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입사 초에 맡았던 업무 중 하나는 부사장님 방의 화분 물주기였다. 왜 비서가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옆 건물에 부사장님이 주로 일을 보시는 방이 있어서 그곳에 비서가 있고 이쪽 방에서는 일주일에 이틀 정도 일을 보셔서 비서가 따로 없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왜 하필 네가 하느냐고 물으니 자기가 부사장님 방에서 가장 가깝고 앉아있고 또 그 층에서 가장 신입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름휴가 때 딸애는 깜빡 잊고 화분에 물을 안 주고 왔다고 화초가 말라 버리지 않을지 걱정했다. 휴가 끝나고 출근하는 날 딸애는 부사장님 오시기 전에 화분에 물을 주겠다고 일찍 출근했다.


34년 회사 생활을 한 내가 신입사원 때 가끔 했던 업무는 술값 담당이었다. 당시 경북 구미 시내에 우리 부서가 즐겨 찾던 술집이 있었다. 부서 회식 후 2차로 가끔 그곳에서 외상술을 먹었다. 월말에 사장(이라고 쓰지만 우리는 마담이라고 불렀다)이 술값을 받으러 왔다. 내 임무는 금액과 참석인원에 따라 소위 엔분의일(1/n, 당시에는 전문 용어로 ‘뿐빠이’라고 했다)한 금액을 부서 선배들에게 받았다가 지불하는 일이었다.


국내 기업은 신입사원이나 막내에게 ‘잡무’와 ‘보조업무’와 ‘기타업무’를 맡기는 것이 관행이다. 잡무는 영업팀 이신참 사원이 담당하고 있는 부서경비 정리, 사무용품 신청, 정수기 물통 바꾸기, 화분 물주기, 팀장님 PC 문제해결 같은 일이다.


‘부서경비 관리가 왜 잡무냐, 그건 예산관리이고 예산관리는 중요 업무이다.’ 라고 같은 팀의 김왕고 차장이 말한다면 ‘그렇게 중요한 일이면 김 차장님이 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라고 말해 보라. 김 차장의 붉어진 얼굴을 구경할 기회이다. 아무리 중요한 척해도 잡무는 잡무이고, 잡무는 신입사원 몫이다.


‘누구나 신입일 때 그런 일을 하면서 업무를 배웠고 다 경험해 봐야 한다.’ 라고 다시 김왕고 차장이 주장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이신참 사원은 이제 입사한지 3년이 되어간다. 팀의 매출액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아니니 충원계획은 없다. 내년이면 대리인데 막내가 한다는 잡무를 언제 벗어날 수 있을지 아득하다. 장수마을 노인정에 가면 70대 노인이 막걸리 심부름을 한다더니 그와 다를 바 없다.


신입의 다른 업무는 보조업무이다. 보조업무란 특정 업무나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선배를 돕는 일이다. 이신참 사원은 자신이 담당한 거래선 영업과 함께 김왕고 차장이 맡고 있는 대형고객사 업무를 돕고 있다. 이 사원이 하는 일은 고객사와 가진 회의의 회의록 쓰기, 공장에 샘플 요청해서 보내기 같은 일도 있지만 여기도 회의실 예약(요즘은 화상회의 예약), 회의자료 복사 같은 잡무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보조 역할을 통해 큰 업무가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문서 작성, 회사 내외에 대한 소통 방법을 배울 수 있다. 보조업무는 신입사원에게는 일하는 방법의 기본을 배우면서 내가 갖춰야 할 실력을 가늠해 보는 의미가 있다.


그런데 같은 팀의 박고참 과장은 도와주는 후배가 없이 혼자 일하고 있다. 중요한 회의가 있었던 어느 날 정신없이 바쁜 박고참 과장을 보다 못한 우리의 착해 빠진 이신참 사원은 자원해서 회의자료 준비와 회의실 예약을 도와주었다. 다음 날 박 과장이 고맙다고 이 사원에게 점심을 산 것까지는 좋았다. 이후 박 과장은 슬며시 이 사원에게 회의실 예약이나 샘플 발송을 부탁하기 시작했다. 이 사원은 선배들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운 입장이었고 회의실 예약은 어영부영 그의 일이 되어 버렸다.


신입사원의 또 다른 업무로 ‘기타업무’가 있다. ‘기타’로 분류되는 업무는 부서 내에서 중요도가 떨어지는 업무를 말한다. 예를 들면, 영업팀에는 규모가 작거나 중요하지 않은 고객사를 ‘기타 거래선’, 매출이 적거나 이익이 나지 않는 제품은 ‘기타 제품’이라고 부른다.


이신참 사원은 ‘기타제품’ 담당이다. 품질이 B급인 제품 영업을 맡고 있다. A급 제품은 품질검사에 합격한 정품으로 가격을 제대로 받는다. B급 제품은 품질은 떨어지지만 그래도 구입하겠다고 하는 고객사가 있다. 대신 가격은 A급의 60-70% 수준으로 팔아보아야 영업이익 적자이다. 그래도 비용을 들여 폐기하느니 낮은 가격이라도 받고 팔면 이익에 도움이 된다.


이 사원은 입사 이후에 계속 B급 제품만 담당해 왔다. 아무리 많이 팔아 보아야 적자이니 영업하는 재미가 없다. 고정 고객사도 없고 물량으로 넘기는 영업이니 영업도 아니다. 그도 제대로 된 제품을 주요 고객사에 멋지게 팔아 보고 싶다. 제대로 된 제품으로 신규 고객사도 개척하고 용도 개발도 하고 싶다. 곧 대리가 되면 큰 고객사를 맡게 될 텐데 기타제품만 팔면서 영업을 제대로 배우고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렇다면 신입사원이 관행적으로 해 온 세 가지 일(‘잡무’, ‘보조 업무’, ‘기타업무’)을 어떻게 할 것인가? 길게 보자. 신입은 육성해야 할 자원이다. 신입사원은 세 가지 일을 시키기 위해 뽑은 것이 아니다. 팀원 한 사람의 역할을 수행할 것을 기대하면서 뽑았다. 그렇다면 가능한 빨리 신입사원이 제 밥값을 하도록 육성해야 한다.


신입사원을 세 가지 일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개인의 잡무나 보조업무는 구성원 개인이 하도록 하고, 공통 잡무나 기타업무는 나눠서 하도록 해야 한다.


‘회의실 신청과 같은 잡무를 팀장이 하는 게 맞느냐?’ 하고 반문할 것이다. 무조건 신입사원이 잡무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신입을 조기에 육성해야 한다면 신입에게 모든 잡무를 몰아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인원이 많은 부서라면 잡무만 모아도 한 사람 일이 된다. 부서 잡무를 하느라 자신의 시간의 1/3 이상을 사용하는 신입사원이 있다면 무언가 잘못 되었다.


과거에는 ‘서무’라고 해서 부서의 잡무나 보조업무를 도와주는 직원이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뽑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업무보조 사원은 생산성 향상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들을 더 이상 뽑지 않는 이유가 인건비 절감, 노무관리임을 생각해 보면 앞으로 다시 생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와 비슷하게 잡무를 신입사원과 평사원에게 몰아주듯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새로운 관행을 만들어나갈 필요가 있다.


팀장이 스스로 공통 잡무를 하나 맡는다면 고참들도 잡무를 하나씩 맡는데 불만이 없지 않을까? 사람 좋은 영업팀 최화통 팀장이 자진해서 정수기 물통 교체 당번을 한다면 까칠한 김고참 차장도 사무용품 신청 담당을 맡을 것이다.


선배들이 잡무를 덜어주어 여유가 생긴 신입사원은 무엇을 해야 할까? 잡무나 보조업무에서 벗어나 제 밥값을 하고 홀로 서는데 집중해야 한다. 먼저 부서장은 6개월이든 1년이든 시점을 정해 놓고 그때가 되면 신입사원이 ‘담당자’로서 역할을 수행하도록 한다는 목표를 세워야 한다. 그 이전까지는 잡무성의 부서 살림도 해 보고 선배들을 도우면서 업무를 배우도록 해야 한다. 정해 놓은 시점이 되면 담당 업무를 시작하게 하고 부족한 점은 상사와 선배들이 돕도록 한다.


신입사원이 중견사원으로 제대로 밥값을 하기 시작하는 시점은 업무마다 다르다. 대개 마감이나 시즌을 한두 사이클 겪어 보아야 한다. 회계는 년 결산을 두 번, 영업이나 마케팅도 시즌을 두 번쯤 겪어 보아야 한다. 생산은 연간 유지보수나 신증설을 두 번, 연구개발은 프로젝트를 두 개쯤 해 보아야 한다. 신입사원을 얼른 준비시켜 이 두 번의 사이클을 시작하도록 해야 한다. 잡무와 업무보조로 낭비할 시간이 없다.


신입사원을 뽑아 가르쳐 놓으면 그만 둔다고 관리자들은 한숨을 쉰다. 젊은 직원들이 회사를 떠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성장의 기회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입에게 성장의 경로를 보여 주고 그 경로의 출발점에 자신이 서 있다는 것을 알게 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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