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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서를 언제 써 보셨습니까?

by 박코치


“언제 마지막으로 이력서를 써 보셨습니까?” 한 직장에서 오래 근무한 A상무를 코칭하면서 질문을 던졌다. 그는 직급은 상무이지만 자회사의 대표를 맡고 있었다. 이십오 년 전 입사 지원 때 이후에는 이력서를 써 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다음 코칭까지 이력서를 써 오라는 숙제를 냈다. A상무는 같은 직장에서만 일해 와서 이력서에 쓸 것이 별로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처음 직장을 찾는 사람의 이력서는 간단하다. 각급 학교를 언제 졸업했다는 것을 적고 사진을 붙인다. 그 이외의 사항은 ‘기타’ 난에 쓴다. 동아리 활동에서 어떤 역할을 했고 어떤 자격증을 갖고 있고 학교 전공 외에 다른 공부를 한 내용이 포함된다.


오랜 동안 직장 생활을 한 사람의 이력서는 달라야 한다. 다녔던 직장의 이름과 부서명에 언제부터 언제까지 대리였고 과장이었다는 내용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제목일 뿐이다. 경력을 쌓은 사람의 이력서에는 직장에서 직급 별로 담당 업무는 무엇이었고 어떤 성과를 냈고 그래서 달라진 것이 무엇이라는 내용이 들어가야 한다. 또한 담당 업무 외에 참여했던 프로젝트와 그 의미에 대해서도 써야 한다. 업무와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가능하면 숫자까지 기술하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자금팀에 있었다고 그냥 자금 업무를 했다고만 하면 안 된다. 담당 업무가 어음관리였고 지급어음과 받을어음을 관리하는 일을 했다고 구체적으로 쓴다. 업무 방식을 개선한 게 있으면 반드시 포함한다. 전자어음이 도입되면서 수기어음과 전자어음을 통합 관리하는 시스템을 개발했다고 쓴다. 일상 업무인 어음관리와 함께 프로젝트로 회사채 발행을 했다면 회사채 규모가 얼마였는지, 그 회사채가 이전 회사채 발행과 어떤 점이 달랐는지 기술한다. 그래서 좋아진 성과가 무엇일까? 좋은 조건에 회사채를 발행해서 연간 지급이자가 줄었다면 큰 성과이다.


A상무가 다음 코칭에 가져 온 이력서는 11포인트의 폰트로 두 쪽이 넘었다. A상무는 이력서를 쓰면서 기분이 무척 좋았다고 했다. “이력서를 쓰면서 내가 괜찮은 경력을 쌓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뿌듯했습니다.” 그는 별로 해 온 일도 없이 세월만 흐른 거 같았는데 이력서로 정리해 보니 경험한 일이 많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고 했다. 이십오 년 동안 직장 생활을 했는데 이력서에 쓸 내용이 없을 리가 없었다.


다음 숙제를 냈다. 이력서 앞부분에 들어갈 자신을 소개하는 프로필을 문장으로 써 오라고 했다. 이 프로필은 반드시 삼인칭으로 써야 한다. 즉, ‘나는...’ 이라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A상무는...’ 이라고 시작해야 한다. 삼인칭으로 쓰면 자신을 객관화하게 된다. 마치 자신이 책의 저자이고 책날개에 담을 저자 소개를 쓴다고 생각하면 된다. A상무의 프로필은 이러했다.


“A상무는 B2B 제조사의 CEO이다. 재무에서 경력을 시작했고 엔지니어도 아니지만 드물게도 지난 5년간 제조회사의 경영을 맡고 있다. 그는 재무 중에서도 자금 조달 업무에서 잔뼈가 굵었으며 중견 간부가 된 이후에는 사업부의 분사와 M&A에서 경험을 쌓았다. 적자 사업부를 자회사로 분사하면서 예상하지 않게 대표이사를 맡았고 2년간 각고의 노력을 통해 성공적으로 회생시켰다. 이후 다른 자회사의 대표를 맡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는 재무 출신답게 엄격한 리더십을 갖고 있으며 정확하고 솔직한 일처리를 좋아한다. 반면에 필요에 따라 유연성을 발휘할 줄 아는 상사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는 주말에는 친구들과 자전거를 탄다.”


코칭 중에 A상무에게 자신의 프로필을 소리 내어 읽어 보도록 했다. 읽으면서 어떤 기분이 들었고 자신의 모습이 머릿속에 어떻게 그려지는지 물어 보았다. A상무는 실력있고 자신감 넘치는 멋진 경영자의 모습이 그려진다고 말했다. 반면에 글로 표현하지 못한 자신의 고쳐야 할 점이 떠올라 반성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학교 선배인 B사장은 일 년에 한 번 이력서를 쓴다. 처음 직장 생활을 시작한 날이 되면 자신의 이력서를 고쳐 쓴다. 그가 직장 생활을 시작한 날은 마침 새해가 시작되는 1월 15일이다. 작년에 어떤 일을 했고 어떤 성과를 냈고 그 일이 자신의 경력에 어떤 의미인지 이력서에 정리해 본다. 중견 기업의 CEO인 B사장은 같은 나이 또래에 비해 직장을 여러 번 옮겼다. 그래서 이력서를 여러 번 쓰게 되었고 이제 이력서 고쳐 쓰기는 그만의 입사기념일 의식이 되었다.


B사장은 말했다. “이력서를 정기적으로 쓰다 보니,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나중에 이력서에 들어간다면 어떻게 보일지 궁금해지더라고. 이력서에 들어갈 만큼 중요한 일일까? 꼭 해야 하는 일일까?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면 어떻게 다르게 해야 할까? 이 일이 리더로서 내 경력에 어떤 의미가 될지 생각하게 돼. 마치 실록에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염려하던 조선시대 임금님처럼 말이지.”


이력서 쓰기는 과거의 나를 돌아보고 발견하게 한다. 또한 이력서 쓰기는 앞으로 쓸 이력서라는 캔버스에 그려질 지금, 이곳의 일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언제 마지막으로 이력서를 보았는가? 지금 컴퓨터 폴더에서 마지막으로 쓴 이력서를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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