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대표
직원들은 대표이사인 내가 이메일에 중독된 거 같다고 놀린다. 거의 모든 업무를 이메일로 지시하고 의견이나 자료 요청도 이메일로 하기 때문이다. 본부장일 때는 그렇지 않았다. 사무실로 불러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간단한 것은 전화로 물어 보기도 했다. 본부 사무실을 어슬렁거리면서 직원들과 업무 얘기도 하고 농담을 주고받을 때도 있었다.
대표의 일은 본부장의 일과는 다르다. 대표의 일이란 여러 본부와 부서가 같이 엮여 있기 마련이다. 동시에 몇 사람의 임원, 팀장과 소통해야 하는데 할 얘기가 있을 때 마다 불러 모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대표가 된 후 이메일 소통이 늘어났다.
이메일의 다른 좋은 점은 조직 구석구석까지 내 목소리가 닿을 수 있다는 것이다. 회의에 참석한 임원들에게 회의에서 내가 했던 이야기를 팀장에게 전달하고, 팀장은 팀원에게 전달하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사실 나는 그렇게 해서 전달된다고 믿지 않는다. 왜 부하들을 신뢰하지 않느냐고? 나도 임원일 때 사장님 말씀 전하는 걸 깜빡하고 잘 빼먹었다. 태만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사장님 말에 공감하지 않으면 전달력이 떨어진다. 그렇다고 직접 전달하겠다고 예전처럼 월례조회를 할 수도 없으니 결국 이메일이 답이다.
이메일을 애용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직원들이 회의 때 전해들은 한 마디 보다 직접 받은 이메일의 한 문장을 더 깊이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어쩌다 받는 대표의 메일이라서 그런 것도 같고, 말은 사라지지만 글은 두고 읽어 보게 되어 그럴 수도 있는 거 같다. 역시 말보다 펜이 강한가 보다. 아, 말이 아니라 칼이구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외에도 이메일을 통해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조직 내 소통의 원칙을 세우거나, 대표의 관심을 보여주거나, 일의 책임과 권한을 명확히 하는 일이다. 이는 이메일의 내용이 아닌 수신자나 참조자를 선정하거나 답장하는 방법을 통해 할 수 있다.
직원들이 그걸 느끼겠느냐고? 요즘 직원들은 글에 예민하다. 카톡에서 ‘네’와 ‘넵’과 ‘네네~’에도 차이가 있는 세상 아닌가.
# 이 전무
김 대표의 메일을 하루에 서너 개는 받는 거 같다. 김 대표는 내게만 할 이야기가 있으면 전화로 하지만 다른 사람이 같이 들어야 하는 이야기는 반드시 이메일로 한다. 얼굴 보면서 하는 회의에서 같이 들은 이야기도 참석자마다 다르게 이해할 때가 있다. 이메일로 전달하면 최소한 서로 다른 소리는 안 해서 좋다.
이메일을 받으면 김 대표는 빼먹지 않고 답을 한다. 그냥 ‘대표님, 말씀하신 자료 첨부했습니다.’ 하고 파일만 첨부한 메일에도 꼭 ‘잘 받았습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한줄 답을 한다. 바쁠 때는 ‘쌩유’ 로 끝나기도 한다. (이건 젊은 친구들 흉내 내는 거 같다) 의견을 물었을 때 바로 답하기 어려우면 언제쯤 답을 주겠다고 답장을 한다.
김 대표가 이렇게 꼬박꼬박 답을 주니 나도 이메일을 보내고 나서 메일을 받았는지 다시 확인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다. 이메일이라는 게 전화나 카톡과 달리 못 받았다는 핑계가 많은 소통 방법 아닌가. 임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고 나서 카톡이나 비서를 통해 확인해 달라고 하는데 이건 두 번 일하는 꼴이다.
딸에게 카톡을 받고 답을 하지 않으면 ‘아빠가 내 톡을 읽씹 했다’고 불만이다. 딸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카톡이나 문자에 답을 못하면 왜 답을 하지 않느냐고 뭐라고 한다. 김 대표의 한줄 답에 대해 얘기하다 보니 이메일을 받고 답이 없는 것도 ‘읽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해?’ 하는 친구의 톡에도 답을 꼭 하면서 부하가 보낸 이메일에는 왜 답을 안 하는 걸까?
# 박 상무
김 대표는 이메일로 지시할 때 참조자에 정확히 관련된 사람을 포함시킨다. 본문에 ‘참조에 포함된 관련 부서장과 협의하여’ 라고 해 주니 이게 일을 참 편하게 한다. 그냥 나한테만 지시를 했다면 그 일에 관련된 임원이나 팀장에게 내가 대표 지시로 이러저러한 일을 해야 하니 당신의 저러저러한 도움이 필요하다고 다시 이야기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대표 지시라고 말해 주어도 미적거리거나 자기 일이 아니라고 뺀질거리는 부서장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대표가 참조자에 그들 이름을 넣어주면 ‘꼼짝 마라’ 이다. 그런 뺀질이가 누구인지 알고 일부러 그러는 거 같다.
김 대표의 다른 이메일 습관? 아, 나쁜 게 한 가지 있다. 한 밤중에 메일 좀 보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 최 팀장
우리 회사는 여러 팀이 관련된 프로젝트를 할 때 수신자에는 팀장, 참조자에는 담당 팀원을 모두 넣고 하나의 이메일로 계속 소통을 한다. 한번은 대표님을 이메일의 참조자에 포함시켰다. 왜 대표를 참조자에 넣었느냐고 다른 팀장들에게 한소리 들었다. 내가 대표에게 잘 보이려고 그러는 거 같다고 생각했던 거 같다. 프로젝트의 성격 상 굳이 대표가 진행에 대해 자세히 알 필요는 없었다. 사실 대표를 참조자에 넣은 건 대표님이 자신이 프로젝트에 관심이 많으니 참조자에 넣어달라고 내게 부탁했기 때문이다.
프로젝트를 시작한 초기에 빈번하게 이메일이 오고갔지만 대표는 읽는지 마는지 별 말이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전체 메일의 본문에서 한 사람을 지목해서 그가 맡은 부분에 대해 질문을 했다. 또 그러다 좋은 중간 성과가 있으면 수고 많았다거나 칭찬하는 메시지를 전체 회신으로 보냈다. 사실 참여자들은 대표가 메일 참조자에 있었는지도 잊고 있었다. 그러다 불쑥 칭찬을 받거나 질문을 받으니 대표가 관심을 갖고 있구나 하는 걸 느끼게 되었다.
이후로 이런저런 프로젝트의 리더들이 대표님을 참조자로 넣는 경우가 많아졌다. 부서 간 협조가 필요한 일에서는 대표의 힘을 빌리려고 하는 거 같았고 대표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도 같았다. 그런데 대표가 어떤 프로젝트에서는 자신을 참조자 명단에서 빼달라고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내가 진행을 일일이 알 필요는 없고 그대들이 알아서 잘 하면 된다고 하면서. 요즘 말로 ‘낄끼빠빠’인가 보다.
# 정 대리
나는 매주 월요일이면 임원과 팀장에게 전 주의 생산실적을 이메일로 보낸다. 사실 나는 이 이메일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경영자 정보시스템의 생산실적 메뉴에서 모두 볼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윗사람 잘 모시는 생산기획팀장이 보내라고 하니까 보내는 거다.
메일 내용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이 없으니 받은 사람들이 메일을 보는지 보지 않는지 잘 모르겠다. 사실 숫자만 달라지는 거지 질문할 내용이 있는 건 아니다. 그런데, 대표님이 취임하신 후에 변화가 생겼다. 대표님은 매주 보내는 메일에 꼭 답을 주시는 거다. 대단한 건 아니고 ‘잘 받았습니다.’ 또는 ‘정 대리, 수고 많습니다.’ 하는 한줄 답이다. 가끔 생산 차질로 숫자가 튀었을 때는 이유가 무엇인지 질문도 하신다. 메일을 보고 있다는 거다.
가끔은 그냥 잘 받았다는 말이 아니고 ‘정 대리, 춥습니다.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하는 말로 답이 온다. 김 대표님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기는 한다. 그런데, 가을 이후에는 날씨가 따듯하던 춥던 매번 감기 얘기를 하시고 여름에는 덥던 별로 덥지 않던 매번 더위 얘기를 하신다. 그래도 아무런 답이 없는 것 보다는 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