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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미 Nov 06. 2022

친구 놀음

남편은 흑산도에서 태어났다. 흑산 비리 집에서 초등학교에 가려면 가파르게 높은 산을 넘어야 했다. 산등성이를 넘다 보면 배가 고파 친구들과 더덕꽃도 따먹고 찔레꽃 줄기와 보리수 열매를 먹었다. 뱀과 개구리를 구워 먹었다. 가끔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 지각해서 담임 선생님께 맞았다. 닭서리를 위해서 누구네 집이 적당한지 의논하였다. 사방으로 도망가기 쉬운 작은아버지 집을 택해 닭서리를 했다.

  “느그들 뉘 집 아들인지 다 안다!”

  작은아버지가 닭 울음소리를 듣고 뛰쳐나와 남편과 친구들을 잡으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마을에서 닭을 잡아먹으면 연기가 나고 증거가 남아서 멀리 배를 타고 나갔다. 아지트로 정한 동굴에서 친구들과 훔친 닭을 삶아 먹고는 포만감에 배에서 늘어지게 잠을 잤다.


  그는 부모와 함께 묵호로 갔다. 명태잡이를 했다. 미끼를 다 끼우려면, 사십 개의 명태 바구니에 미끼를 끼우는 작업을 하루 내내 해야 해서 학교에 가지 못했다. 그는 손재주가 좋아 헝클어진 어망 줄도 순식간에 잘 풀고 추렸다. 어느 순간부턴 아예 학교에 가지 못하고 명태잡이 주낙 줄 준비에 동원되었다. 고생하는 부모를 돕는 일이 좋았다. 9월에 시작해서 그다음 해 4월에 작업이 끝나 그 시기엔 꼼짝을 못 하고 그 일에 매달렸다. 배 기름 냄새와 갯물 냄새에 익숙해졌다. 해 질 무렵의 명태덕장은 바다의 노을과 어우러져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다. 남편의 그 무렵의 친구는 명태 미끼로 쓸 소금 간 한 오징어와 어망 줄이었다.   

   

  초등학교에 전학하려니 문제가 생겼다. 명태잡이로 학교를 한 해 쉬었기 때문이다. 한 학년 아래로 흑산도 학교에 가려니 어려서부터 친했던 또래 친구들을 형이라고 불러야 했다. 할 수 없이 목포의 학교에서 한 학년 아래로 유예하여 다니게 되었다.     


  여름이 무르익으면, 삼학도에는 무화과 열매가 탐스럽게 열렸다. 목포 선창에서 삼학도까지 수영하여 건너갔다. 친구들과 내기 시합을 했다. 무화과를 많이 따먹으면 주둥이가 새까매졌다. 누구의 주둥이가 새까만지 제일 새까만 사람이 이기는 시합이다. 일부러 주둥이 가장자리에 까만 물이 잘 들도록 해서 먹었다. 삼학도까지 건너가다가 해양 경비정 해경이 소리를 쳤다.

  “야 이놈아! 스크루에 빨려 들어가면 죽어!” 

  꼼짝없이 해경에게 걸렸다. 팬티도 목포 선창 비밀장소에 숨겨 놓아 홀딱 벗은 몸이다. 벌거벗은 채로 해경 아저씨에게 맞았다. 그래도 삼학도까지 건너왔으니 색시 촌 누나들에게 가서 초코파이를 얻어먹었다. 매일 해경에게 두들겨 맞아도 삼학도에 오는 이유는 바로 이 초코파이 때문이다. 

  “이 새끼야 위험한데 왜 자꾸 여길 오는 거야?”

  “다신 안 그럴게. 누나? 근데 초코파이 하나 더 주면 안 돼?”

  “아따! 이놈 연장이 실하네이!”

  낄낄거리며 색시 촌 누나들이 번갈아 가며 고추를 만지고 농담했다. 새까만 몸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친구들도 함께 웃었다.   

   

  운동회 연습으로 ‘인간 탑 쌓기’를 했다. 연습하다 중간에 도망을 가기 일쑤였다. 맨 밑에서 덩치가 큰 아이들이 깔려있고 그 위에 아이들이 올라가는 쌓기 게임이다. 남편은 덩치가 큰 편이라 항상 맨 밑에 엎드려야 했다. 배는 고픈데 밑에 깔려있자니 기운이 없었다. 그가 먼저 도망을 가면 꼭 한두 명 친구가 뒤따라왔다. 학교 담을 넘으면 바로 갯벌이었다. 갯벌 주변 풀밭에 낚싯대와 된장을 숨겨 놓았다. 갯지렁이를 미끼 삼아 사방에 깔린 문저리를 잡았다. 문저리 머리서부터 꼬리 쪽으로, 엄지손가락으로 꾹 누르면 내장이 쏙 빠져나온다. 갯물에 씻어 된장에 찍어 먹으면 환장할 맛이다. 벼가 누렇게 익을 무렵이면 메뚜기가 지천이었다. 메뚜기를 구워 먹고 남은 것은 집에 가져가기도 했다.


  중학교 졸업하던 해였다. 떠돌이 행상으로 목포집 월세며 학비를 대던 어머니가 돈을 버는 일이 너무나 힘들다고 하였다. 목포에서 여자들 옷을 떼어다가 흑산도 사람에게 팔았다.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열두 개 마을을 산등성이를 넘어 다녔다. 글을 모르는 어머니가 외상을 주며 장부도 적지 않고 옷값을 받는 게 신기했다. 어떨 때는 돈 대신 미역이나 마른 생선을 받기도 했다. 어머니가 돈이 없다는 말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한 채 흑산으로 돌아왔다. 큰 집 소 풀을 뜯기는 일도 하고 배 타고 나가 고기를 잡았다. 밭 언덕에 비가 오면 흙이 흘러내렸다. 돌로 쌓아 밭에 40m 축대를 만들기도 했다. 돌을 지게에 실어 나르다 보니 지게질 도사가 되었다. 고등학교 입학을 위한 공부도 틈틈이 했다. 그렇게 한 해가 후딱 지났다.   

  

   참고서를 달달 외워 공부를 열심히 한 탓에 목포의 최고 명문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우수 학급에서 공부를 이어 갔다. 2년을 집안 형편 때문에 원치 않는 유예와 재수를 하다 보니 친구 관계에 문제가 생겼다. 흑산 고향 친구들 만나서 말을 놓으면 그 옆의 선배가 자기 친구에게 말을 놓는다고 두들겨 팼다. 동생들과 함께 있을 때, 같은 학년의 친구가 말을 놓으면 동생들이 자기 친구가 형에게 말을 놓으니 참지 못하고 그 친구를 야단치고 주먹질해댔다.  

    

  그는 지금도 바다를 그리워한다. 마도로스가 되는 게 꿈이었다. 바다에 대한 향수 때문에 해양대학에 가려고 했는데 그놈의 나이 제한에 걸려 포기하였다. 두 해의 유예가 사단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진도에서 교사가 되었다. 경기도를 거쳐 서울로 전출해 나를 만나게 되었다.    

  

  결혼 후에도 남편은 친구들 만남을 좋아했다. 친구를 좋아해서인지, 술을 좋아해서인지는 모르겠다. 신혼 초에 대출받아 친구에게 돈을 이백만 원을 빌려주었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대출을 받아 돈을 빌려주니 아내인 나는 당연히 화가 났다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면,

  “고등학교 때 그 집에서 얻어먹은 밥값이야. 방학이면 그 집에서 살았어.”

  라고 응수하였다. 친구는 돈을 갚지 않았다. 어머니가 칠순이라고, 재혼하게 되었다고, 초대장이며 청첩장을 보내왔다. 우리 시어머니 칠순 잔치도 해드리지 못했는데, 남편은 축의금을 마련해서 다녀온 눈치다. 어쩐 일인지 백만 원을 갚았다. 그러고는 30년이 지난 여태까지 깜깜무소식이다.   

   

  한 번은 고교 시절 친구를 만나고 왔는데, 손에 꾸러미를 잔뜩 들고 왔다. 은행 지점장으로 퇴직했는데 우연히 남편의 소식을 듣고 만나게 되었다고 했다. 아내의 화장품이라고 받아왔다. 나는 그 친구가 돈 부탁을 할 거라고 남편에게 절대 휘둘리지 말라고 했다.

  “이 사람아! 자네는 왜 사람을 그렇게 생각하는가? 좋은 친구이니 그럴 일 없네.”

  며칠 지나 엄청난 크기의 노래방 기계를 들고 왔다. 그 친구의 부탁으로, 월부로 삼백만 원에 샀다고 했다. 그 기계는 아파트의 소음 때문에 몇 번 쓰지도 못하고 이사 다닐 때마다 흉물처럼 끌고 다니다가 어느 날인가 폐기처분했다. 이런저런 친구의 부탁으로 전집도 사고 백과사전도 서재에 쌓여갔다.  

    

  고향 친구들과의 부부 동반 모임에 참석했다. 함께 설악산 여행도 하였다. 친구들이라면 끔찍했던 남편이 어느 날인가부터 동창회나 향우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남편이 참석하면 선후배 관계가 얽혀 호칭 때문에 서로 눈치를 보고 분위기가 이상해졌단다. 남편은 가만히 있는데 주변에서 서로 싸움을 하는 일이 잦았다.   

   

  그 일이 있고부터 고향 친구는 일대일로 만나고, 대학원 시절 친구나 직장에서 만난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눈치다. 어느 날은 새벽 두 시에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와 술자리가 이어지는 일도 있었다. 그 무렵 나는 수업 개선 교사로 한 달에 두 번 정도 수업 공개를 했었다. 하필이면 수업 공개 전날 꼭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와 잠을 설친 얼굴로 수업을 공개해야 했다. 교장으로 승진하고는 술 마시는 빈도가 빈번해졌다. 학년 회식이라고, 배구대회가 끝났다고, 학교 행사가 끝났다고 술을 퍼마시곤 했다.      


  정년으로 퇴직을 한 다음 해 건강검진을 마친 어느 날, 남편이 술을 끊겠다고 선언했다. 술을 너무 마셔서 췌장에 물혹이 생겼다고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남편은 그 이후로 술을 딱 끊었다. 퇴직하기 전에는 남편과 가장 친한 친구 몇몇과 여행도 다니고, 맛집을 같이 다니기로 했었다. 그런데 그마저 못한단다. 어떤 친구는 뇌졸중에도 걸려 휠체어를 타고 다니고, 어떤 친구는 암에 걸려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게 되니 그런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남편은 자신이 ‘젖은 낙엽’이란다. 쓸어도 쓸어도 쓸리지 않고 아내 곁에 딱 붙어 있는 존재라고 스스로 비하한다. 젊어서는 내가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해도 얼굴 한 번 제대로 비치지 않고 친구 놀음으로 세월을 보내더니, 이제는 나와 놀잖다. 꼭 젊어서 외도한 남편을 용서하고 받아주는 기분이다, 아니 아직 받아들일 준비도 되지 않았다. 턱도 없다. 내가 퇴직하면 남편이야 어떻든 친구들과 신나게 여행하고, 딸이 국제선 승무원이니 Lay-over 할 때 함께 해외여행을 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나의 계획도 코로나로 무산되었다. 딸도 얼마 전 결혼해서 내 곁을 떠나갔다. 이제는 우리 둘만 남았다. 어쩌겠는가? 둘이 친구가 되어야지. 

    

  오늘도 외출 준비를 하는 내게 어디를 가느냐고 묻는다. 간 큰 남편이지만 목적지는 늘 알려준다. 가끔 제주나 동해 여행에 동행한다. 걷기 운동과 골프 연습도 함께 한다. 건강을 잃으면 서로에게 ‘젖은 낙엽’이 될 수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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