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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미 Dec 04. 2022

이놈의 성질머리

  “방 청소 좀 해라”

  엄마의 잔소리다.

그러잖아도 방안이 더러워져서 청소하려고 비를 들었는데, 명령조의 잔소리를 들으니 청소할 마음이 싹 사라진다. 냅다 비를 집어던지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어려서부터 누가 뭘 하라고 하기 전에 미리 청소도 하고, 공부도 했다. 잔소리할 필요가 없었다. 깜박 나의 성질을 잊고 엄마가 뭐라고 시키면, 반항심이 생겨 튕겨 나가곤 했다. 대부분 자질구레한 일이 내가 할 일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방 청소부터 시작해서 집안 마당 청소도 하고, 대문 밖까지 쓸었다. 동네 아줌마, 아저씨들을 만나 인사하면, 그분들이 칭찬해주었다.

  “이 집 맏딸이로구먼. 참 부지런도 하지, 인사도 잘하고.”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난 별로 잘못한 일도 없는데, 부모님께 야단을 맞았다. 집을 나가라고 하셨다. 

  ‘잘못했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면 될 일이었다. 오기가 생겨 그 길로 집을 나갔다. 벌거벗고 나가라고 했는데, 할 수 없이 옷은 입었다. 동네를 돌아다니다 보니 배도 고프고, 컴컴해지자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공원에서 그네를 타고 혼자 놀았는데, 수상한 남자가 보였다. 할 수 없이 늦은 밤이 되어 집으로 몰래 들어왔던 일이 있다.     

 

  남에게 지기 싫어서, 공부했다. 학교에서 백 점을 받아와야지 직성이 풀렸다. 백 점을 받은 날은 시험지 그대로 들고 대문을 들어서며

  “엄마! 나 오늘도 백 점이야.”

  라고 소리를 질렀다. 하나라도 틀린 날이면 대문을 박차고 집안에 틀어박혀, 성질을 부렸다. 과외를 같이 하는 친구 중 나와 경쟁이 붙은 친구가 있으면, 그렇게 그 친구가 미웠다. 서로 공부하지 않았다고, 어제 본 드라마 이야기를 하며 연막술을 피웠다.      


  대학원 과제를 할 때도 제일 먼저 과제를 해서 올렸다. 교수님이 그 과제를 샘플링해서, 이렇게 올리라고 하면, 같은 과 학생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한마디로 ‘미운 오리 새끼’ 노릇을 톡톡히 했다. 전문상담교사 자격을 위한 일 년 코스를 다닐 때도 교수님이 A4용지 한 장을 과제로 내주면 거의 책 한 권을 써서 낸 적도 있다. 그걸 보고, 딸이 휴대전화에 나를 ‘박 마녀’라고 저장한 적도 있다. 

     

  그런 내가 그 성질머리를 죽인 적이 있다. 아마 성질머리 죽이는 시초였지 싶다. 딸의 돌봄을 위해 시어머니께서 올라오셨다. 딸을 돌보아주시는 어머니가 고마웠다. 회기동 시장 근처의 학교에서 근무할 때였다. 퇴근할 때, 회기 시장을 지나쳐 버스를 탔다. 홍시가 탱탱하니 맛있어 보이면 홍시를 사서 어머니를 드렸다. 색깔 고운 스웨터가 보이면 그것도 사서 드렸다. 뭐든 어머니를 위한 시선이 되어 극진히 모셨다. 그런데 어느 날 뭐에 심통이 나셨는지

  “ 난 내일 흑산으로 내려 갈란다.”

  라며 옷 보따리를 챙기시는 거다. 

  ‘아니 그렇게 가시면 어린 딸은 당장 누가 돌보나?’

  속이 상해 한참을 울었다. 

  “어머니,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잘할게요.”

  “너는 걸핏하면 잘못했다고 하더라.”

  ‘난 정말 잘못한 게 없는데. 딸을 위해서라면 어떻게 해? 할 수 없지.’

  이를 악물고 무조건 빌었다. 어머니는 화를 푸시고, 고향으로 내려가시지 않았다.  

    

  시어머니의 제사를 모신 지 22년이 지났다. 상을 차리면서, 내가 시어머니의 마음이 되어 생각해본다. 내가 퇴근해서 집에 오면 어머니는 집안일과 아이 돌보는 일을 하지 않으셨다.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못하고,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해야 했다. 주말에는 특히 쉬지를 못했다. 어떤 날은 딸과 보내는 시간이 아까워서 밥도 먹지도 않고,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었다. 밥 먹는 시간도 내겐 아까웠다. 그게 시어머니에게는 시위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었겠다 싶다. 낮에 드신 그릇이 제대로 설거지가 되지 않았다 싶으면 다시 설거지했다. 싱크대에 온통 고춧가루가 묻어 있어, 닦고 또 닦았었다. 그깟 고춧가루 조금 묻어 있는 게 무슨 대수라고. 나중에 남편에게 들으니 어머니는 팔을 다쳐서 팔목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다고 한다. 아이를 더 봐줄 수도, 설거지를 깔끔하게 할 수도 없었다. 자전거에 부딪혀서 팔을 다쳤으나 그 당시 치료비가 없어, 팔을 고치지 못해 소위 ‘뻐둥 팔’로 살 수밖에 없으셨다. 

  ‘어머니! 그땐 어머니가 불편한지도 모르고 서운하게만 생각되었어요.’ 

    

  딸을 키우면서도 그 성질머리를 내 마음대로 피울 수 없었다. 그런다고 사춘기 딸이 내가 생각한 대로 변화된다는 보장이 없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적성검사를 했는데, 이 아이를 억압해서 키우면, 창의력이 백 점인 아이가 최하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사사건건 참견하자니, 내 성질에 내가 먼저 죽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학교에서도 교감, 교장으로 올라갈수록 성질이 죽었다. 이상한 기질이 있어서, 동료와 관리자를 습관적인 민원으로 괴롭히는 교사가 있었다. 정상적인 사고로 대화가 되질 않으니 이 또한 참을 忍을 새기면서 살아야 했다. 알고 보면 괜찮은 사람도 있지만, 별별 이상한 교감, 교장을 다 만나 보았다. 만나는 사람에게 성질을 피우는 대신, 사람들의 말을 듣고, 참고 생각을 정제했다.      


  누군가 프로필에 ‘웬만해선 아무렇지도 않다.’라고 적어 놓은 걸 보았다. 내가 그렇다. 

  “여러분! 도를 아십니까?”     


  그런데, 요즘 SNS 등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가르치려 들면 아직도 다시 그놈의 성질머리가 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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