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시절 교과서에서 접했고, 전문을 통으로 외우고 다니며 읊을 만큼 좋아했던 시가 있었다.
바로 윤동주의 ‘서시’였다. 이 글을 쓰기 전까지는 단순히 중2병으로 치부하고 있었으나 이제는 그 시절을 다시 추억할 만큼 자란 것 같다. 교과서에서 처음 접하고, 내 마음을 크게 울려 후에도 시집을 읽게 만든 시일만큼 내게는 참 소중한 시인 것 같다.
한 가지 조금 아쉬운 것은, 시를 다 외우고도 그 뜻을 외웠을 만큼 공부했음에도 서술형에서 삐끗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시가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이유가 있다. 이 시를 접한 이후로 시집을 읽게 됐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나는 심리학에도 관심이 있어 <미움받을 용기>를 읽었다.
거기서도 꽤 많은 것을 배웠다. 하지만 책을 한 권만 읽은 사람이 제일 무섭단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가 보다. 나는 더 다양한 심리학을 접하고 응용하지 않고 미움받을 용기에 머물렀다. 그 결과 19살에는 이와 관련한 대화에서 상처를 주게 된 사건까지도 있었다. 이러한 사건을 겪으며 나는 책 읽는 것이 확장되어 갔다. 다시 시 얘기로 돌아와 보자면, 기억에 남는 나태주 시인이다. 접근성도 좋았고 진입장벽도 낮았다. 더 어렵고 깊은 시를 찾아 떠나기 전까진 나태주 시인의 시를 참 많이도 읽었다. 나태주 시인 이후로도 시집을 읽긴 했으나 그 사이 공백은 있었다.
긴 공백 이후로 나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다시 시집을 읽었다. 이 무렵 나는 시 쓰는 사람들이 모인 오픈채팅방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시집을 구매했다. 이렇게 어렵고 어딘가 있어 보이는 것들로 나를 채우려 했지만, 아무래도 소화불량이었던 것 같다. 나는 시를 잘못된 방식으로 접근했던 것만 같다. 이제, 다시 서시를 외우던 시절의 나를 소환해 시에 관해 물어보는 시간을 가져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