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증’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보통 “기분이 엄청 좋다는 거 아니야?”라고 말한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에게 조증은 그저 신남과 들뜸의 연장선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신남의 이면이 얼마나 날카롭고 무서울 수 있는지. 조증은 단순히 좋은 기분이 아니다.
그것은 균형이 무너지는 상태다. 정신과 선생님은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기분으로 조증과 울증을 판단하진 않아요.” 처음엔 이해하기 어려웠다. 단순히 ‘기분’만으로 스스로를 판단했던 적이 많았으니까. 경조증이 시작되면 나는 부쩍 외향적으로 변한다. 할 일이 많아지고, 하고 싶은 일은 더 많아진다. 잠이 줄어도 피곤하지 않고, 식욕은 늘어난다. 입에 모터 달린 사람 마냥 말을 쏟아내고, 세상이 내 속도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그때는 모든 것이 가능할 것 같고, 내가 아주 특별해진 느낌까지 든다. 그 상태면 오히려 괜찮은 듯 보인다.
문제는 그 뒤에 따라오는 급격한 붕괴다. 조증은, 경조증과 차원이 다르다. 내가 나를 잃어버리는 감각, 감정과 행동이 한 방향으로 폭주한다. 그 시기에 나는 충동적인 소비를 하고, 지나치게 많은 약속을 만들고, 스스로의 현실을 과대평가하기도 했다. 한창 상태가 심했을 땐 ‘잠을 자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밤새 작업을 하고도 아무렇지 않다고 믿었다. 하지만 결국은 모든걸 포기하게 됐고 무너진 계획 속에서 자책감에 빠졌다. 그 과정이 무섭다. 내가 아닌 것 같은 나. 지나치게 들떠 있는 나를 보는 건 즐거움이 아닌 공포였다.
그래서 경조증이 찾아오면, 나는 먼저 나 자신을 경계한다. “혹시 지금, 내가 조증의 문턱을 넘으려는 건 아닐까?” 이 물음이 나를 보호해준다. 요즘 나는 일기를 쓴다. 기분과 수면, 활동량을 기록하면서 나의 흐름을 지켜보는 것이다. 내가 기분이 좋다고 느낄 땐, 오히려 스스로를 점검해야 할 때일지도 모른다.
이 모든 건, 조증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한 나의 방식이다. 이 병은 내가 사라지는 감각을 줄 수 있지만, 동시에 나를 가장 깊이 들여다보게도 만든다. 내 감정의 동요에 더 예민해지고, 생각의 흐름을 더 잘 읽게 된다. 조증은 나를 몰아붙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나를 더 잘 이해하게 만든다. 지금의 나는 조금은 균형을 찾았다
신나고 기분 좋은 날들이 있어도, 그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잠시 바라보는 연습을 한다. 그 신남 너머에 어떤 불안이 숨어 있는지 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묻는다. “지금의 나는, 괜찮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