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행실패라는 동병상련의 정을 나누는 사이

090.

by Zinn


창한의 자작극일 수도 있겠다. 충분히 그럴 만하다. 결과적으로 가장 이익을 본 사람이 창한이기 때문이다. 지난 번 세미의 합의되지 않은 베드씬 사태를 해결한 것도 수상했는데 이번에도 냄새가 난다. 만약 창한의 자작극이라면 내가 자신의 작품을 훔친 것도 모자라 작가 계약조차 해 주지 않으니 경고 차원에서 유정을 테러했을 것이다.


창한은 테러범으로터 유정을 지켜줬지만 꼭 본인이 직접 나서지 않더라도 제3자를 고용해 테러를 사주하고 지켜주는 연기를 하는 건 일도 아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작품을 훔쳤으니 그에 따르는 보상을 하라는 무언의 협박이자 유정을 자기 편으로 끌어 들이는 일석이조 그 자체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심증 뿐이고 경찰에 신고할 일도 아니고 어디다 하소연도 못한다. 동민조차 안 믿을 것이다.


만약 이대로 계속 작가 계약을 해 주지 않고 버티면 다음 차례는 세미일까?



***



탑스타 차민오가 ‘가족사냥’ 출연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출연 계약 진행은 실무적인 일이라 강 대표와 석 팀장 둘이서만 차민오의 소속사에 가서 출연 계약서에 도장을 받아왔다. 도장이 찍힌 계약서를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한국 최고의 탑스타 차민오가 ‘꼴리는 영화’ 최경진 감독의 차기작에 출연한다고?


밀리언 필름은 잔치 분위기였다. 언제 문을 닫아도 이상하지 않을 망해가던 영화사가 내 덕분에 기사회생 한 것이다. 촬영까지 끝나야 입금되기로 한 잔금도 곧장 입금되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강 대표가 선심을 쓴 것이다. 촬영이 끝나면 보너스를 또 챙겨주기로 했다. 물론 그거야 그 때 가 봐야 알겠지만. 강 대표는 내 덕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님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었다며 감사하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밀리언 필름에서 감독 대우를 받기 시작한 건 ‘가족사냥’ 시나리오를 보여주고 나서부터지만 차민오가 출연 결정을 한 뒤의 감독 대우는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달랐다. 눈빛에서부터 나를 존경하고 있다는 진정성이 느껴졌다. 강 대표는 더 이상 작가 크레딧을 욕심내지 않았고 석 팀장 역시 ‘가족사냥’ 이후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았다. 모두가 일단은 ‘가족사냥’을 잘 만드는 것에만 전념하는 분위기였다. ‘가족사냥’이 잘 돼야 다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창한만 처리하면 된다. 난니맨은 당분간은 괜찮을 것이다. 양서연 피디가 걸리지만 만약 서연이 난니맨이라면 개봉 때까지는 별 일 없을 것이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제일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려 할 테니까. 하지만 창한은 다르다. 개봉 때까지 나를 곱게 내버려둘 리가 없고 알아서 사라져주지도 않을 게 분명하다. 설상가상 ‘가족사냥’이 표절이라는 증거인 ‘아빠딸’ 시나리오는 실종되어 버렸고 동민으로부터 소개받기로 한 ‘아빠딸’의 작가도 감감 무소식이다.


그냥 창한을 죽여 버릴까? 싸이코패스면 다야? 그게 무슨 벼슬도 아니고 싸이코패스가 아니라는 이유로 싸이코패스에게 마냥 당하고만 있으라는 법은 없다. 인생은 약육강식 각자도생. 문득 내가 지금까지 내가 안 풀린 건 남을 짓밟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임 감독의 단골 멘트가 떠올랐다. 임 감독에게 조감독을 그만두고 감독 준비를 하겠다고 얘기했을 때였다.


“넌 안 될 거야”


아무리 그릇이 작고 인성이 쓰레기여도 오랜 시간 자기와 함께 일한 조감독에게 덕담은 못해줄 망정 안 될 거라니. 빈정이 확 상해버려서 상종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이유라도 들어보고 싶었다.


“왜요?”

“딴 놈들 짓밟을 수 있어?”

“왜 그래야 되는데요? 같이 잘 살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넌 안 된다는 거야.”


당시엔 호기롭게 이야기했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임 감독 말이 맞았다. 딴 놈들을 짓밟지 않고도 잘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폭망 이후 10년간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했지만 이 모양 이 꼴이다. 그러다 구창한이라는 작가 지망생의 작품을 본의 아니게 훔치고 나서부터 풀린 게 그나마 이 정도다. 임 감독 말대로 딴 놈을 짓밟은 덕분인 셈이다. 그래. 이왕 할 거면 제대로 하자. 창한을 어설프게 달래려 하지 말고 아예 제거해 버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제거? 내가 창한을 죽일 수 있을까? 사람은 아무나 죽이나.. 나는 자신 없다. 하지만 죽일 듯이 갈구기 라면? 임 감독이 비록 감은 다 떨어지고 연출력도 형편 없었지만 사람 갈구는 거 하나는 정말 잘 했다. 저러다 자살이라도 하면 어떡하나 싶을 정도로 창한을 갈궈댔고 다행히 자살하진 않았지만 영혼의 상처를 입었는지 쥐도 새도 모르게 잠적을 했었지.


나도 그러면 된다. 창한이 임 감독 때처럼 잠적해주면 완전범죄가 가능하다. 다른 건 몰라도 임 감독이 창한을 갈구는 걸 오랜 시간 옆에서 직접 봤기 때문에 똑같이 갈굴 자신은 있었다. 나 역시 임 감독에게 수년간 갑질과 가스라이팅을 당해 봐서 그 노하우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창한을 임 감독처럼 갈구다가 임 감독처럼 자살 당하면 어쩌나 걱정이 됐지만 임 감독과는 달리 나와는 형 동생 하는 사이가 됐고 유정과 세미와도 가족 같은 관계이니 설마 자살 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



“살인마가 진짜 이런 말을 할까? 어떻게 알아? 구 작가가 사람 죽여봤어? 살인자랑 얘기해봤어? 살인자랑 얘기도 안 해보고 이런 대사를 썼어? 최소한 살인해 본 사람을 만나보기라도 한 거야? 아니라고? 그럼 가짜잖아. 나보고 가짜를 연출하라고?”


캐릭터 얘기를 하자며 불러놓고 차민오의 갑질을 시험삼아 창한에게 그대로 시전해보았다. 하지만 창한은 예전의 창한이 아니었다.


“죽여봤으면요?”

“주.. 죽여봤다고? 지금 나랑 장난해?”


임 감독처럼 갈군다고 갈궈봤지만 타격감이 전혀 없었다.


“죽여보고 쓴 거면 괜찮은 거에요?”


창한의 눈빛이 오싹해서 너무 무서웠다. 나를 형님이라 부르며 따르던 창한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에이.. 재미없다 구 작가. 그냥 해 본 소리에 왜 정색을 하고 그래?”


나는 임 감독이랑은 다르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고 갑자기 생전 안 하던 갑질을 하려니 씨알도 안 먹혔다. 창한의 본 모습에 소름이 돋은 이후 나도 모르게 선을 넘지 않으려 조심하다 보니 갈궈서 떨구기 작전은 흐지부지 실패로 돌아갔다. 모름지기 감독이라 하면 배우와 스태프들의 고혈을 쥐어짤 수 있어야 하는 법인데 그런 면에서 나는 감독실격이다. 임 감독 말이 맞았다.


설상가상 난니맨의 협박도 이어졌다. 새로 도착한 메일에는 다른 내용 없이 오직 ‘감독인생 2회차’를 잘 읽었다는 멘트만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난니맨은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애널맨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신기한데 ‘감독인생 2회차’의 왕복동 작가라는 사실까지 알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난니맨은 양서연 피디가 아닐 수도 있다. 양서연이 쓴 장편과 단편 시나리오 속에 등장하는 폭망 감독은 나를 롤모델로 삼아서 비슷한 구석이 많았지만 남 몰래 19금 웹소설을 쓰는 캐릭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감독인생 2회차’를 읽었다면 폭망 감독의 노예가 되는 여자 기획피디의 롤 모델이 자신이라는 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그 모든 걸 알았다면 집을 빌려달라는 것 정도로 끝나진 않았을 것이다.


양서연은 아닌 것 같다. 이 정도로 나에 대해 알고 있다면 단순한 지인은 아니다. 작정하고 내 스마트폰을 해킹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이 정도로 나에 대해 알 수는 없다. 난니맨은 이미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내가 살려면 난니맨은 죽어야 한다. 양서연이 난니맨이 아니라면 유력한 용의자는 딱 한 명 남는다.


구창한 작가.



***



이래저래 제거해야 할 이유는 늘어만 가는데 죽일 순 없고 갈구지도 못하겠다. 이제 캐스팅도 됐으니 정말 잘 찍을 준비를 해야 하지만 창한 때문에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출근해서도 어떻게 해야 창한을 해결할 수 있을까 고민만 하고 있는데 석 팀장이 노크도 없이 불쑥 감독 방으로 들어왔다.


“뭐야?”

“최 감독! 혹시 요즘에도 이현철 감독이랑 연락해?”

“아니. 마지막 연락은 몇 달 전쯤?”


이현철 감독이라면 전작의 흥행 실패 이후 여기 저기 떠돌아 다니다 밀리언 필름에서도 잠깐이나마 감독 준비를 한 적이 있고 나와는 흥행 실패라는 동병상련의 정을 나누며 종종 연락을 주고 받는 사이였다. 마지막 연락은 몇달 전 안부 카톡이었고 내가 밀리언필름에 왔다고 톡을 보내자 이현철 감독은 그 회사 돈 없고 거기 탈출은 지능 순이니 하루 빨리 탈주하고 소주나 한 잔 하자고 답을 보냈었다.


“무슨 연락?”

“별 거 없고. 그냥 소주나 한 잔 하자는?”

“빨리 차단해.”

“왜?”

“살다살다 이런 일이 아 나 진짜.. 보내줄테니 읽어 봐.”


석 팀장은 골치 아프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채 카톡으로 신문 기사 링크 하나를 보내주었다.


‘대낮 가정집 노린 절도범, 잡고 보니 영화감독’


영화감독이 절도범? 얼른 링크를 클릭해서 기사를 읽어보니 대낮 가정집에 침입했다가 검거된 절도범의 정체가 과거 흥행 실패 후 오랜 시간 차기작을 준비 중인 영화감독 C(47세)였고 범행 이유는 차기작으로 도둑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를 준비 중에 캐릭터 연구와 취재 겸 실제 범행을 저질렀다고 했다.


“여기 나온 C가 이현철 감독이야?”

“미치겠네 진짜. 이게 무슨 개망신이냐. 아침부터 기자들에게 이현철 감독에 대해서 묻는 전화 오고 난리도 아니였어. 우리 회사랑은 아무 관계 없는 사람이라고 선을 그었으니 최 감독도 그런 줄 알아.”


석 팀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잽싸게 이현철 감독의 전화번호를 차단했고 카톡 방에서도 나와 버렸다. 이현철 감독과 친분이 있었던 건 사실이나 행여나 친하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이현철 감독이 누구지? 내 기억엔 없는 이름인데?”

“그래 그렇게 정리하자고. 그리고 행여나 그럴 일은 없겠지만 탄원서 같은 거 써달라고 연락 올 지도 모르는데.. 알지?”

“누군지도 모르는 절도범의 탄원서를 내가 왜 써 줘?”


사실이다. 나는 이현철 감독에 대해 잘 모른다. 그저 흥행실패라는 동병상련의 정을 나누는 사이였을 뿐. 내가 이현철 감독에 대해 아는 거라곤 돈이 많은 감독 같진 않았다는 것이다. 영화감독은 원래 돈이 많은 감독과 그렇지 않은 감독의 두 종류로 나뉘는데 이현철 감독은 후자였을 것이다.


원래 돈이 많지 않은데 변변한 벌이 없이 오랜 시간 감독 준비를 하다 보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어렸을 때야 편의점 알바라도 하지 40대 중반은 알바 자리도 없다. 그렇다고 육체적으로 고된 일을 할 수도 없다. 감독 준비에 쓸 시간과 체력이 남아나질 않기 때문이다.


남의 일 같지 않았다.
















p.s. <감독실격> 시즌3를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개인 사정으로 인해 연재를 잠깐 쉬고 8월에 시즌4로 돌아오겠습니다! 시즌1,2,3를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p.p.s. 8월에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9월에는 꼭 시즌4 연재를 시작하겠습니다!!


p.p.p.s. 추석 연휴 지나고 뵙겠습니다!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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