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영화 만들 건데 감독님 집 좀 빌려주시면 안 돼요?

089.

by Zinn


단편영화 좋지. 종종 안 풀리는 감독 중에는 장편 시나리오를 여러 편 썼는데 안 풀리고 엎어지길 반복하다 보면 뭐라도 하자는 심정으로 홧김에 단편영화를 찍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비추다. 장고 끝에 악수 두는 격이다.


누가 작정하고 도와주거나 제작비까지 투자해 주지 않는 이상 감독 혼자서 로케이션 헌팅부터 캐스팅 그리고 후반 작업까지 순전히 자기 돈으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해야 되는데 그런 식으로는 영화를 잘 찍기 어렵다.


기적같은 확률로 잘 찍어서 영화제에 진출하고 상을 받아봤자 어차피 다시 장편 시나리오를 써야 한다. 고작 단편영화 한 편 잘 찍었다고 단편영화 감독에게 누가 봐도 대박이 날 만한 검증된 상업영화 시나리오를 맡기며 연출 제안을 할 일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서연을 말릴 생각이 없다. 꿈과 희망을 북돋워 줄 것이다.


“시나리오 잘 쓰는 재주와 영화를 잘 찍는 재주는 다른 거잖아요?”

“완전 다르지.”

“그래서 말인데요.. 한 편 찍어 보려고요.”


양서연 피디 겸 단편영화 감독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야무지게 포부를 밝혔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얘기를 왜 내일이 없는 폭망 감독 따위에게 하는 거지? 설마.. 단편 영화 만드는 걸 도와 달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등골이 오싹해져서 나도 모르게 서연의 도발적인 눈빛을 외면해버렸다.


나를 현장 스태프로 쓰려는 건 아닐 것이다. 또래들끼리 화기애애 사이 좋게 청춘영화 분위기로 만들고 싶을 텐데 우중충한 늙다리 아저씨가 끼어 있으면 분위기가 흐려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다. 자동차 아니면 집. 어쩐지 자동차 때문은 아닌 것 같고 집 같았다. 다른 건 몰라도 집 만큼은 절대로 못 빌려준다.


한 편의 단편영화가 만들어지려면 주변에선 큰 희생이 따르는 법이다. 특히나 촬영장소로 집을 빌려줬다간 그야말로 난리가 난다. 생각조차 하기 싫다. 더 이상 서연과 엮였다간 물심양면으로 피곤할 일만 있을 것 같았다. 이미 충분히 피곤하다. 생각해보니 좋은 일도 없었다. 그동안 잘 해 준 건 아깝지만 빠른 손절이 답이다.


“그래. 단편영화도 나쁘지 않지. 양 피디 아니 양 감독도 알겠지만 단편영화부터 시작해서 감독이 된 감독님들도 많잖아? 잘 해 봐. 응원할게! 어이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오늘은 내가 일이 있어서 이만..”

“잠깐만요 감독님!”

“응?”

“제가요.. 엊그제 갑자기 느낌이 와서 단편 시나리오를 써봤거든요. 짧으니까 오래 걸리지도 않았고요. 그런데 막상 써 보니까 전 역시 이 쪽이 맞는 것 같아요. 단편영화 잘 만들어서 해외 영화제 쪽을 먼저 공략하고 싶어요. 마침 제가 그 쪽에 아는 선배가 있거든요. 그리고 감독님도 아시겠지만 감독이 글 쓰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영화를 잘 만들어야 감독이죠.”


서연 답지 않게 부연 설명이 길어지는 걸 듣고 있노라니 더 불안해졌다. 다음에 나올 말이 뻔하고 식상해서 벌써부터 가슴 한 구석이 답답해왔다. 법카는 오늘 당장 돌려주지 않아도 괜찮으니 단편영화 만드는 걸 도와달라는 부탁 만은 안 해주길 바랬다만 슬픈 예감은 현실이 됐다.


“그래서 말인데요. 혹시 감독님 집 좀 빌려주실 수 있으세요? 제 시나리오에 나오는 주인공 집이 어쩐지 감독님 집이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 주인공이 영화감독이거든요. 실제 영화감독 집을 주인공 집으로 하면 나중에 마케팅에도 도움이 될 것 같고요. 투자까지는 바라지도 않을게요. 저도 염치가 있는데.. 물론 해주셔도 되지만요. 그리고 감독님이 제작 맡아주실 거죠?”


제작비 투자는 못들은 걸로 했고 법카도 모자라 집까지 빌려달라니 도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묻고 싶어졌다. 대학로에서 나와 함께 비포 선라이즈를 찍은 혜나가 이런 부탁을 해도 들어줄까 말까다.


내가 자기랑 연애하자고 쫓아다니는 호구 찐따도 아닌데 왜 이러는 걸까? 폭망 감독이라고 우습게 보는 거냐고 화를 내도 될 것 같은 상황이지만 나는 사람이 한결같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주의다. 지금까지 잘 해 준 게 있으니 애써 내색하지 않고 차분히 대화를 이어갔다.


“제작이라..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는데?”

“제가 쓴 장편 시나리오에서 엑기스만 따 왔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미안한데 감이 잘 안 잡혀.”


그냥 일어날 수도 있지만 그래도 후배 감독이 단편영화 시나리오를 썼다고 하니 무슨 내용인지 궁금해 하는 게 인생 선배로서의 예의다. 서연은 내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가방 속에서 주섬주섬 A4 뭉치를 꺼내 건넸다. 10장 짜리 단편 시나리오였는데 가볍게 읽기 시작했지만 다 읽자마자 괄약근이 바짝 조여지며 현기증이 났다.


주인공은 30대 중반에 데뷔하자마자 폭망 후 10년 째 차기작을 준비하고 있는 40대 중반의 영화감독인데 유부남인 주제에 우연히 알게 된 여자 작가 지망생을 잘못 건드린 후 데뷔 시켜주겠다고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했다가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협박을 받는다는 이야기였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헐리우드 B급 짝퉁 스릴러 우라까이지만 정체불명의 괴한이 하는 행동들이 지나치게 난니맨과 흡사했다. 폭망 감독의 10년 전 데뷔작에 악플을 달고 협박 이메일을 보내고 은퇴를 요구하고 등등. 현기증이 나서 눈앞이 흐려질 정도였지만 폭망 감독의 최후가 궁금해서 끝까지 읽었으나 아직 엔딩은 없었다.


“이게 끝이야?”

“네. 아직 미완성이에요. 어때요?”


양서연이 난니맨을 어떻게 알지? 설마 네가 난니맨이었어? 그런데 왜? 도대체 내가 너한테 무슨 잘못을 했다고?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 같았지만 양서연이 자기 입으로 먼저 자기가 난니맨이라고 자수하지 않는 이상 내가 먼저 네가 난니맨이냐고 물어볼 순 없었다.


만약 양서연이 난니맨이고 나의 모든 비리를 알고 있다면 언제라도 나를 나락으로 보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아직까지 놔두고 있는 이유는 뭘까? 높은 곳에서 떨어질 수록 타격이 더 크기 때문일까? ‘가족사냥’ 개봉 쯤이 천국일 것이고 그 때쯤 나의 비리를 폭로하면 하루 아침에 천국에서 지옥일 것이다. 폭망 감독으로라도 연명하던 그 때 그 시절이 그리워 질 수도 있다.


그래. 일단 집은 빌려주는 걸로 하자. 단편영화니까 금방 끝나겠지. 액션 씬이 있는 것도 아니니 촬영 끝나고 뒷정리만 잘 하면 별 문제는 없을 거야. 서연에게는 나 혼자 사는 집은 아니니 일단은 집에 가서 가족들에게 양해를 구하겠다고 하고 시간을 벌었다.


“흠흠.. 재밌네. 완전 리얼한 걸?”

“다 감독님 덕분이에요. 감독님 인터뷰 정리하다 영감이 떠올랐으니까요.”

“내가 이런 얘기를 하진 않은 것 같은데? 작가 지망생을 건드리고 악플러에게 협박을 받고..”

“에이.. 선수끼리 왜 이러세요? 흔한 클리쉐 잖아요.”

“그렇긴 하지. 그런데 꼭 우리 집이여야 할까?”

“네. 전 리얼한 게 좋거든요. 감독님 집이라면 미술도 필요 없을 거잖아요. 진짜 유부남 영화감독 집이니까요.”


진짜로 폭망한 유부남 영화감독이 아니라 그냥 유부남 영화감독이라고 해 줘서 고마웠다.


“다른 유부남 영화감독 집도 알아봐 줘?”

“감독님 집 있는데 뭐 하러요?”


내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은은한 억지 미소를 짓고 있자 서연은 수락의 뜻으로 알고 먼저 자리를 떴다. 양서연이 난니맨일 수도 있다는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받아보니 아파트 관리실이었다.


“아내 분이 다치셨어요!”

“네?”


황급히 집으로 달려와 경비실에 물어보니 유정이 아파트 주차장에서 헬맷을 쓴 남자에게 테러를 당했다는 것이다. 남자가 오토바이 헬멧을 쓰고 있어서 정체를 알 수는 없고 경찰에게 신고는 했지만 CCTV를 확인하더니 심각한 수준은 아니라며 순찰을 늘리겠다는 말만 남기고 떠났다는 것이다.


CCTV 영상을 보니 유정이 지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 오는데 맞은 편에서 헬맷을 쓴 남자가 걸어오다가 유정에게 어깨 빵을 했고 순간 중심을 잃고 넘어진 유정이 놀라서 남자를 올려다 보는 타이밍에 뒤에서 창한이 나타나자 헬맷을 쓴 남자가 잽싸게 도망가는 흐름이었다.


마침 창한이 세미를 지하 주차장에 내려주고 나가는 길이었던 것이다. 창한이 아니었다면 헬맷을 쓴 남자가 바닥에 쓰러진 무방비 상태의 유정에게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이 영상만으로는 남자가 테러나 강도짓을 하려 했다는 걸 증명하기엔 애매했다. 단순 길거리 어깨빵 시비 정도라면 모를까.


집에 올라가보니 유정과 세미는 창한과 함께였다.


“고맙다. 경비실에서 얘기는 들었어. 내가 요즘 촬영 때문에 바빠서..”

“괜찮아요. 감독님 우리 사이에 고맙긴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은 한 것 뿐인데요.”


유정은 크게 놀랐는지 안색이 창백했고 세미는 나 들으라는 듯 창한 아니었음 엄마가 죽었을 수도 있다는 둥 창한이야말로 진짜 남자라는 둥 극찬을 늘어놓았다. 창한 같은 오빠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세미의 말이 창한 같은 아빠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로 들렸다. 동시에 아빠는 엄마를 지켜주지 않고 뭐 했냐는 원망 같기도 했다.


창한이 시나리오 계약 얘기를 꺼내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그런 얘기는 전혀 없었고 유정이 많이 놀랐으니 잘 챙겨달라는 말과 함께 자리를 비켜 주었다. 정말 오랜만에 우리 가족 셋 만의 시간이었지만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다. 유정과 세미도 창한이 없으니 허전해하는 듯 했다. 심지어 내가 있는 걸 불편해 하는 눈치였다.


언젠가부터 창한이 나 대신 우리 집의 가장 역할을 해주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내가 설 곳이 없다고 느껴지자 썩 유쾌하진 않았다. 그리고 이번 사건으로 유정도 창한에게 마음을 오픈할 게 분명했다. 내가 감독이랍시고 밖으로 나도는 사이에 나만 빼고 셋이서만 친해진 것이다.


가족들과는 소원해졌고 서연과의 관계는 풋풋하고 가슴 설레는 로맨스에서 찝찝하고 불쾌한 추리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로 변질됐다.


이제 나에게 남은 건 영화 뿐이다. 차기작을 만드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반드시 대박을 내서 폭망 감독이 아닌 흥행 감독으로 거듭나는 것만이 살 길이다. 그냥 성공으론 부족하다. 오직 초대박 만이 이 모든 고통과 어려움을 해결해줄 것이다. 목숨 걸고 올인 한다는 비장한 각오로 잠자리에 들었는데 불현듯 의혹이 솟아올랐다.


유정을 테러한 게 설마 창한의 자작극은 아니겠지?


keyword
월, 수, 금 연재
이전 28화본전 생각 난다 괜히 잘 해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