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전 생각 난다 괜히 잘 해 줬다

088.

by Zinn


살인 경력자를 만나게 해 주겠다는 말에 차민오가 피식 웃으며 나를 노려봤다.


“장난해?”

“장난 아닌데?”

“살인 전과자인 거야?”

“아니. 아직 안 잡혔거든..”

“그럼 살인자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딱 보면 알아. 그 정도도 몰라보면서 어떻게 진짜를 연기 한다는 거지?”

“알았어. 만나볼게. 만났는데 아니면.. 알지?”

“그래. 대신 우리 셋이서만 보는 거야.”

“날 정해서 알려줄게.”

“아직 만나주겠다고도 안 했잖아. 물어보고 날은 내가 알려줄게. 연락 기다려.”


홧김에 살인 경력자를 만나게 해주겠다고는 했지만 후회막심이었다. 내가 아는 살인 경력자는 창한 한 명 뿐인데 그것도 심증만 있을 뿐이고 차민오와 창한을 만나게 해 줬다간 내 감독 자리가 위태로워 질 수 있다. 설상가상 창한의 시나리오를 훔쳤다는 사실을 자백하는 셈인데 창한이 진짜 연쇄 살인마라면 나도 임 감독처럼 자살 당할 수도 있다.


한편으론 차민오가 하도 진짜 타령을 해서 창한을 소개시켜주고 과연 진짜 살인마인지 아닌지 의견을 구하고픈 마음도 있었다. 창한도 차민오를 만나게 해 주면 나에 대한 존경심을 되찾을 것이다. 왜 자기 시나리오를 훔쳤냐고 따지면 그건 본의가 아니었고 결과적으로 작품이 메이드 되고 제작사에 잘 얘기해서 각본은 아니어도 각색 크레딧에 올려주면 너한테도 도움이 되는 거 아니냐고 구워 삶을 수도 있지 않을까?


차민오에게 살인 경력자를 만나게 해준다고 했으니 창한에게는 뭐라고 해야 본인이 ‘가족사냥’ 작가라는 사실을 비밀로 하고 차민오를 만나 자신을 살인 경력자라고 소개할 지 작전을 짜고 있는데 차민오에게 전화가 왔다. 그리고 수화기에선 백연희 이사가 아파트 계단에서 굴러서 크게 다쳤다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얼마나 다쳤는데? 어디야?”


차민오는 전화를 끊고는 백 이사가 다쳐서 병원에 가봐야겠다며 황급히 뛰쳐 나갔다. 문득 얼마 전에 창한에게 백 이사가 차기작 메이드에 걸림돌이라고 하소연했던 기억이 났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진 사고다.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일련의 묻지마 테러 사건의 범인은 역시 창한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백 이사 다쳤다며? 병문안은 언제 갈거야?”


차민오의 건물에서 나오며 석 팀장과 함께 병문안을 가려고 전화를 걸었는데 석 팀장의 발언이 예상 외였다.


“연희가 오지 말래.”

“당연히 가야지. 갑님이 다치셨는데..”

“아니 절대로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어. 특히 최 감독 너는 절대로 데려오지 말래.”


석 팀장이 이렇게 강경하게 나오는 걸 보니 백 이사는 단순 사고를 당한 게 아닌 듯 했다. 특히 나를 데려오지 말라는 걸 보면 창한에게 나를 방해하지 말라는 협박을 당했을 지도 모른다. 임 감독, 심 대표, 태준이 그리고 이제는 백연희 이사까지. 이 모든 사고들이 우연이 아니라면 범인은 창한 뿐이다. 그게 아니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은조의 주장대로 임 감독의 사라진 노트북을 찾아야 한다. 창한의 비밀스런 범죄 행각들이 담겨 있을 지도 모르는 임 감독의 노트북만 찾으면 게임 오버다. 노트북을 증거로 경찰에 신고하면 구창한 작가를 연쇄 살인 혐의로 체포해 사회와 격리시키고 ‘가족사냥’은 최경진 감독 오리지널로 진행할 수 있다. 자기가 작가라고 주장해봤자 연쇄 살인범의 말은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아빠딸’의 작가가 언제 나타날지 모른다는 사실이 걸리지만 싸이코패스 연쇄 살인마도 깔끔하게 처리했는데 작가 지망생 하나 쯤은 우습지도 않다.


그런데 연락 두절이라는 혜나도 창한의 소행일까?


혜나의 자칭 사촌동생은 혜나 누나가 내 조감독의 전화를 받고 나갔다고 했다. 있지도 않은 내 조감독을 사칭할 만한 캐릭터는 내 주변에선 창한 뿐이다. 혹시나 해서 창한에게 혜나라는 배우에 대해 아냐고 떠 봤는데 전혀 모르겠다는 듯 시치미를 뗐다. ‘꼴리는 영화’에 나온 배우라고 하자 그제야 알겠다는 티를 냈다. 창한은 바보가 아니다. 이런 식으로는 꼬리를 잡을 수 없다.



***



혜나의 사촌동생은 계속해서 내 조감독 사칭범을 찾아내라고 닦달했고 나는 슬슬 귀찮아져서 계속 연락하고 찾아오면 스토커로 신고해버리겠다는 문자를 남기고 수신거부해버렸다. 혜나야 뭐, 아직 젊고 예쁘고 매력적이니까 주변에 남자들이 많을 테고 그 중에 불행히도 유부남과 눈이 맞았다면 사랑의 도피 여행 같은 걸 떠났을 수도 있겠지.


백연희 이사가 사고로 ‘가족사냥’에서 손을 떼자 차민오의 태도도 급 공손해졌다. 굳이 진짜 살인자를 만나게 해 줄 필요도 없었다. 예상대로 괜한 갑질이었던 것이다.


“죄송해요 감독님. 제가 트집을 잡아서.. 살인자 만나게 해 달라고 한 건 없었던 일로 해 주세요.”

“아니야. 연기에 도움이 된다면 뭐든 해야지. 배우의 연기를 끌어내는 게 감독의 일이잖아? 진짜로 사람을 죽이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왜 다시 존대말?”

“에이 왜 이러세요 감독님. 감독님에게 어떻게 반말을 해요. 지난 번엔 그냥 쎈 척 한 거니까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하긴 뭐.. 내 시나리오가 진짜 같진 않지. 민오는 좋은 작품 많이 했으니까 자연스럽게 비교가 되겠지.”

“무슨 말씀이세요 감독님! 배우에겐 다음 작품만 중요해요. 그리고 꼭 살인을 해 봐야 살인자 연기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시나리오는 다시 감독님 버전으로 수정해주세요. 그게 맞는 것 같아요.”

“백 이사 상태는 어때? 좀 괜찮아졌어?”


듣자하니 연희는 병원에선 퇴원했는데 번아웃이 왔다며 당분간 쉬겠다고 잠수를 탔다고 했다. 차민오는 백 이사가 이렇게 무책임한 캐릭터인줄은 몰랐다며 서운해했고 나를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미신을 중요시한다더니 태준과 백 이사까지 다치는 걸 보고는 나를 괴롭혔다간 다음 차례는 자기가 될 지도 모른다며 두려워 하는 것 같았다.


태준도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컨디션도 회복됐지만 나 대신 감독을 맡을 상황은 아니다. 백 이사는 병원에서 퇴원 후 잠수를 탔고 혜나는 실종이고 난니맨은 잠잠하다. 익명의 사이버테러에 싫증이라도 난 모양이다. 이제 창한만 처리하면 걸림돌은 다 제거된 셈이다. 그런데 창한은 작가 계약에 대해 더 이상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어쩌면 내가 자기 시나리오를 훔쳤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지만 이제 가족 같은 사이가 됐으니 그냥 모른 척 넘어가주려는 걸까?



***



창한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어서 불안하던 와중에 서연은 당근과 채찍 작전 실패 이후 여전히 찬바람만 불었다. 인사는 건성이고 눈도 안 마주쳤고 카톡도 읽씹했다. 설상가상 인스타에는 여전히 정체불명의 남자 손과 함께 맛집 술집 사진이 연이어 올라와서 복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할 말이 있다고 카페로 부르더니 더 이상은 내 지도 편달이 도움이 안되므로 자기가 시나리오를 완성할 때까지는 업무 외적인 일로 연락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내 연락을 받으면 집중이 깨져서 집필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감독 데뷔 시켜달래서 매일 같이 카톡을 주고 받으며 정을 쌓아 오다가 하루 아침에 차단 당하니 그저 허탈할 뿐이었다. 뭐라 답을 해야 할 지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관계가 끝나는 건 아닌 것 같아서 어떻게 달래야 할 지 고민하고 있는데 서연은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횅하니 나가버렸다. 아니 이럴 거면 최소한 법카는 돌려줘야 하는 거 아닌가?


당장이라도 법카는 돌려달라고 연락하고 싶었지만 연락하지 말라는데 연락하면 스토커 취급을 받을 것 같아 두려웠다. 20대 여직원을 스토킹한 40대 폭망 감독으로 언론에 오르고 싶진 않았다. 그러다 ‘가족사냥’에 불똥이 튀기라도 하면 감독은 영원히 안녕이다. 법카는 아쉽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먼저 연락하지는 말아야겠다고 맹세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랑은 관계를 차단하고 다른 남자와 내 법카로 놀러다니는 꼴은 차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법카를 돌려달라고 연락하는 건 예외로 봐줄 것 같아 연락을 해 보려다가 홧김에 그 동안 나와 업무 외적으로 주고 받은 문자를 석 팀장이나 외부에 유출하기라도 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초래될 것 같아 꾹 참았다.


잠깐 좋은 꿈을 꿨다치고 잊어 버리려는데 며칠 후 서연에게 먼저 카톡이 왔다. 시나리오 때문에 할 말이 있으니 잠깐 시간을 내달라는 것이다. 긴 장마 끝에 한 줄기 햇살을 목격한 기분이었다. 간만의 만남이니 예쁘게 차려입고 접선 장소로 나갔다. 서연은 카페에 먼저 와 있었고 나는 만나자마자 시나리오 근황부터 물었다.


“오랜만이네. 시나리오는 잘 돼가?”

“사무실에서 맨날 보는데 오랜만이라뇨. 그리고 그 작품은 접으려고요.”

“왜?”

“아무리 생각해봐도 폭망 감독이 차기작 만들려고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누가 궁금해 하겠어요. 그냥 혼자서 소설로 쓰면 모를까. 캐스팅도 투자도 안 될 것 같아요.”

“그렇긴 하지.”


재밌을 것 같다고 할 땐 언제고 기껏 시간 내서 인터뷰 까지 해 준 사람에게 접었다는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털어놓았다. 태도도 달라졌다. 감독 대접은 커녕 폭망 감독 취급에 가까웠다. 본전 생각이 났고 괜히 잘 해 줬다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나중에 어떻게 될 지 모르므로 좋은 기억으로 남아야 한다.


“감독님 작품 준비 하는 거 봐도 그렇지만 장편 시나리오 한 편 잘 썼다고 바로 감독을 시켜줄 것 같지도 않고요.”

“그래 잘 생각했어. 양 피디는 머리가 좋은 것 같아. 사실 기획 피디도 괜찮아. 점점 IP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으니 앞으로는 감독이나 작가보다 기획 피디가 더 각광받는 시대가 올 거야. 굳이 영화만 고집할 필요도 없고. 드라마 좋잖아? 영어 잘 하면 넷플릭스 같은데 지원해보는 것도 괜찮고.”


감독 준비 한답시고 흐지부지 시간을 끌며 법카만 써대는 전개를 예상했던 터라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이제 감독 꿈은 접었으니 법카는 돌려주겠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 나왔다. 사실 법카 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품위를 유지하려니 은근히 부담이 컸다.


본인이 먼저 감독의 꿈을 포기하겠다고 했으니 나도 더 이상 억지로 제작자 코스프레 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 내가 먼저 법카를 돌려달라고 말 할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서연은 법카를 돌려주기는 커녕 법카에 대한 언급조차 없었다. 감독님 덕분에 잘 쓰고 있다는 말 한 마디 정도는 예의 아닌가?


나도 딱히 할 말이 없고 내가 만나자고 한 것도 아니어서 잠자코 있는데 서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장편 시나리오 보다는 끝내주는 단편 영화를 한 편 찍는 게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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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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