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7.
들켰다. 역시 석 팀장! 모르는 게 없다.
“읽었어?”
“아니! 개나 소나 다 보여주고 다니면서 나한테는 왜 안 보여줘? 서운한데? 우리가 그 정도 사이 밖에 안 됐나? 그리고 차기작은 나랑 하기로 하지 않았어?”
“미안해 석 팀장. 내가 오죽하면 그랬겠어?”
“설마 ‘버진 어게인’이 메이드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석 팀장과 다음 작품을 하기로 했으면서 비밀 리에 여기저기 시나리오를 돌린 건 미안하지만 나의 소중한 오리지널 시나리오 ‘버전 어게인’을 욕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안 될 것도 없지 않아?”
“될 리가 없지. 유부녀가 이놈 저놈 막 주고 다니는 이야기를 누가 투자하겠니? 설마 떡 영화 감독으로 돌아가려는 거야?”
‘가족사냥’으로 레벨업 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석 팀장에게 나는 아직 폭망 감독 최경진일 뿐이다.
“나는 떡 영화 감독인 적이 없어. 지금 나 폭망 감독이라고 무시하냐? 읽어보지도 않았다며?”
“그걸 꼭 읽어봐야 아니? 대충 무슨 얘긴지 들으면 딱 아는 거지.”
사람 일 모르고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있는데 석 팀장은 계속 신경을 긁어댔다.
“버진 어쩌구는 관심 없고 내가 걱정하는 건 ‘가족사냥’이야. 버진 어쩌구가 최경진 감독 작품이라고 돌아다니면 감독을 의심하게 되거든. 정말 ‘가족사냥’을 같은 감독이 쓴 게 맞나. 어쩌면 다른 사람이 썼을 지도 모른다.. 야! 너 설마 차민오한테도 보낸 건 아니지?”
“안 보냈고 안 보낼 거고 내가 버진 어쩌구를 돌린 사람들은 차민오 쪽과는 안 친하니까 걱정 마.”
“약속 해.”
석 팀장은 몇 번을 신신당부 했고 나는 다시는 안 돌리겠다고 약속해 주었다. 어차피 더 이상 돌릴 곳도 없다. 연락이 온 곳이랑 미팅을 해보고 계약 조건 들어보면서 시간을 끌다가 여의치 않으면 이대로 버리긴 아까우니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에라도 지원해보자. 상금은 적지만 당선되면 신춘문예 출신 작가라는 타이틀은 얻을 수 있으니까. 폭망 감독보다는 신춘문예 당선 작가 타이틀이 차기작 메이드에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누구누구한테 보냈어? 알고나 있자.”
석 팀장에게 내 보잘 것 없는 인맥을 공개하고 싶지 않아 말을 돌리며 밍기적대고 있는데 차민오에게 카톡이 왔다. 시나리오 회의를 하자는 것이다. 석 팀장에게 혼나고 바닥을 뚫고 지하실까지 추락한 자존감이 탑스타 차민오의 카톡 하나로 다시 날아 올랐다.
석 팀장이 뭐래건 아직까지 나는 탑스타 차민오와 시나리오 회의를 하는 감독인 것이다. 언젠가 ‘가족사냥’을 훔쳤다는 사실을 들켜서 강제로 하차 당하기 전까진 차민오가 감독으로 인정해 주고 있는 이상 감독답게 행동해도 된다.
“잠깐 민오에게 카톡이 왔네.”
차민오랑 친하지도 않으면서 민오라고 부르며 석 팀장에게 차민오의 시나리오 회의를 하자는 카톡을 힐끔 보여주고는 정중하게 답톡을 보냈다.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면 찾아뵙겠다고. 차민오는 어디냐고 물었고 밀리언필름이라고 대답하자 지금 당장 압구정에 있는 자기 사무실로 오라고 했다. 그리고 이번 시나리오 회의도 1:1이니 꼭 혼자 오라고 했다.
차민오가 지금 당장 압구정에 있는 사무실로 오라고 했다니까 석 팀장은 화들짝 놀라며 자기가 데려다 주겠다고 했지만 쿨하게 거절했다. 듣보잡 신생 제작사 프로듀서이다 보니 어떻게든 탑스타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친분을 돈독하게 다지고 싶은 마음은 알겠다만 차민오가 꼭 혼자 오라고 했으니까 따라오지 말라고 했다.
***
‘가족사냥’이 엎어지는 건 싫지만 그렇다고 메이드 되는 걸 원하는 것도 아니다 보니 차민오와의 미팅을 앞두고도 그다지 긴장이 되지 않았다. 차민오를 만나고도 마찬가지였다. 차민오는 언제나처럼 잔뜩 가오를 잡으며 영화와 인생과 연기에 대한 개똥 철학을 늘어 놓았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 집중이 되질 않았고 살짝 하품도 났다.
“감독님 오늘은 좀 다르시네요.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차민오가 안 보는 사이 몰래 하품을 했는데 차민오는 자기가 썰을 풀고 있는데 하품을 했다는 걸 눈치챘는지 불쾌한 눈치였다. 감히 폭망 감독 따위가 내 앞에서 하품을? 자기가 입을 벌리면 대부분은 각잡고 경청하지 나처럼 하품하고 지루해 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눈치 백단이라 내 미묘한 심경의 변화를 눈치 챘을 수도 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하고 싶은 말을 계속 참고 있으면 음흉한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차라리 솔직한 게 낫겠다.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물어봐도 될까요?”
“처음이네요. 저한테 질문하는 거. 좋아요. 물어보시죠.”
“‘살인 안 하는 호감형 싸이코패스 연쇄 살인마’가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말이 안 되죠.”
차민오도 같은 생각이었다. 우리 사이에 더 이상의 토론은 필요 없었다.
“그러면 말이 안 되는 거 억지로 하지 말고 다시 ‘살인하는 싸이코패스 연쇄 살인마’ 버전으로 돌아가면 어떨까요?”
‘살인하는 싸이코패스 연쇄 살인마’ 버전으로 돌아가야 내가 주도권을 잡고 프로젝트를 질질 끌 수 있다.
“나쁘지 않네요. 살인마는 살인을 해야 살인마 니까요.”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방해꾼 없이 둘만 얘기해서인지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전해 들은 바로는 비즈니스적인 이유 때문에 ‘살인하는 연쇄 살인마’ 설정은 절대 안 된다고 하던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아 그 광고 얘기군요. 그거라면 신경쓰지 마세요. 제가 지금 광고 걱정할 때가 아닌 것 같아요.”
얘기를 들어 보니 광고 모델로 계약 기간 동안은 살인범이나 범죄자 역할을 맡으면 안 된다는 조항이 있다고 했는데 계약 기간이 거의 끝날 때가 됐고 지금 자신에게는 광고가 아니라 배우로서의 생명을 연장시켜줄 캐릭터가 중요하다고 했다.
바보는 아니었다.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지금 상태로는 배우라는 본업이 위태로워질테니 광고 모델로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사주 때문이었다. 내 사주에서 뭐가 나왔는진 모르겠지만 차민오 말로는 자기가 내 사주를 봤는데 이번 영화에서는 나만 믿고 따라야 한다고 했다. 고맙다고 하자 조건이 있다고 했다. 자기가 광고를 포기하고 올인 한 만큼 나도 올인해줬으면 한다는 것이다.
“‘가족사냥’을 감독님 인생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생각해주셔야 합니다. 아시겠어요?”
차민오가 드디어 나를 감독으로 인정한 것 같아 드디어 행복 시작인줄 알았는데 지금까진 백연희 이사 덕분에 알지 못했던 차민오의 본색이 드러났다. 나만 믿고 따르겠다는 건 립서비스 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제부턴 말 편하게 해도 되죠? 불편하잖아?”
내가 너보다 나이도 많고 그래도 감독이고 업계 선배인데 반말? 너무 무례한 거 아닌가 싶었지만 나와 함께 영화를 찍기 위해 광고도 포기하고 올인하겠다는 탑스타에게 그러지 말라고 할 용기는 없었다.
“아.. 네.. 그러시죠.”
“감독님도 말 편히 하시든가.”
“그래도 될까요?”
“어. 나보다 나이도 많잖아.”
“응. 알았어.”
지금까진 깍듯이 존댓말을 썼지만 앞으론 감독 답게 하대하려고 했는데 반말이 영 어색하고 느낌이 살지 않았다. 차민오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계속 궁금한게 있었는데 물어봐도 되지?”
“당연하지.”
“대사 말인데 살인마가 정말 말을 이런 식으로 할 거라고 생각해?”
뭐지? 시비 거는 건가?
“극중 살인마 캐릭터에는 어울리는 대사 같은데?”
“대사 같은데? 모른다는 얘기잖아.”
“알아. 내가 썼는데 모르긴.”
“감독님이 살인마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어떻게 알아? 사람 죽여봤어?”
“아니.”
“살인자랑 얘기라도 해봤어?”
“그건 아니지만..”
“어이가 없네. 살인자랑 취재도 안 하고 만든 캐릭터를 나보고 연기하라는 거야? 최소한 살인을 해 본 사람을 만나보기라도 했어야지!”
“작가들이 꼭 살인을 해 보거나 살인자랑 얘기를 해 봐야 살인자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건 아니야.”
“아니라고? 그러면 가짜잖아. 나는 가짜는 취급 안 해. 내 스타일 모르나본데 난 글 속에 진짜가 없으면 연기가 안 나온다고.”
본인은 메소드 연기 스타일인데 작가가 살인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살인자랑 얘기도 안 해보고 쓴 시나리오라면 메소드 연기가 불가능하다는 듣도 보도 못한 참신한 갑질이었다. 급기야는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물어볼게. 솔직히 불어. 이거 정말 감독님이 쓴 거 맞아?” 라며 또 다시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기가 봤을 땐 시나리오 속에 진짜 살인이 담겨 있는데 시나리오를 썼고 연출을 맡을 최경진 속에는 진짜가 안 느껴져서 혼란스럽고 배역에 몰입이 안 된다는 것이다. 졸지에 사기꾼 작가이자 가짜 감독으로 전락해버렸는데 구구절절 맞는 말이어서 반박할 수가 없었다.
문득 임 감독에게 진짜를 써내라고 무한 갑질과 가스라이팅을 당하던 창한의 과거가 떠올랐다. 그 때 창한의 심정이 이랬겠구나 싶었다. 나도 그 당시의 창한처럼 다 때쳐 치우고 속 편하게 잠적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으나 그럴 순 없었다. 지금 잠적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알아.”
“뭘?”
“살인자.”
어차피 확인할 길은 없겠지만 살인을 해 봤다고 할 순 없으니 최소한 살인 경력자를 알고 있다고 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갑질을 당하다 결국은 하차 당할 것 같아서다.
“진짜?”
“응.”
“감독님이 살인자를 안다고?”
“확실히 안목이 있네. 니 말이 맞아. 살인자랑 얘기도 안 해보고 이런 글을 쓸 순 없지.”
차민오가 요 놈 봐라는 눈빛을 지었다.
“어떻게 아는 사이?”
“그건 말 못하지. 그 사람도 프라이버시라는 게 있는데.”
차민오는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믿겠다며 그 살인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살인자를 만나보고 진짜 살인자라는 믿음이 가면 출연 계약서에 도장을 찍겠다는 것이다. 나는 살인자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냐고 물었고 차민오는 자기가 보면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있으니 만나게나 해달라고 했다. 차민오를 캐스팅하려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밑져야 본전 이판사판이다.
“알았어. 그럼 만나게 해 줄게. 살인 경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