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영화가 엎어지면 좋겠는 심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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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nn


하나도 화가 나진 않았지만 화가 난 척을 하면서 곧장 백연희 이사에게 만나자고 했지만 이미 나에게 두 번이나 패싱당했으니 앞으로 둘이 만나서 할 이야기는 없을 것이고 이번 각색 작업도 석 팀장 통해서 진행 상황을 공유해드리겠다고 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번 각색 작업은 백 이사가 진행할 것 같았다. 다시 내가 주도권을 잡고 프로젝트를 질질 끌면서 시간을 벌려면 방법은 하나 뿐이다. 차민오. 이왕 이렇게 된 거 또 다시 백 이사를 패싱하고 차민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차라리 영화가 엎어지면 좋겠는 심정으로 ‘살인 안 하는 호감형 싸이코패스 연쇄 살인마’ 캐릭터가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고 물어보았고 차민오는 그제야 솔직히 털어놓았다.


사실 ‘살인 안 하는 호감형 싸이코패스 연쇄 살인마’ 캐릭터는 연희의 고집이다. 여러모로 반드시 이번 광고 계약을 따내야 하는 상황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저는 살인범 이미지 나쁘지 않아요. 스타가 아닌 배우의 길을 걷고 싶거든요. 연희만 꺾으면 돼요. 감독님이 설득해보세요. 저로선 연희 누나가 싫다는 걸 억지로 할 수는 없는 사정이 있거든요.”라고 덧붙였다.


차민오와의 통화를 마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창한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창한을 앞에 두고 백연희 이사 뒷담화를 까고 있었다. 영화에 대해 아는 것도 하나 없으면서 차민오가 채워준 완장을 차고 영화를 망치려 든다. 그렇게 시나리오에 대해 자신이 있으면 자기가 직접 쓸 것이지 왜 남이 쓴 걸 자기 마음대로 고치려는 지 모르겠다. 완전 선무당이 사람 잡는 꼴이다. 이러다 영화가 엎어지기라도 했다간 나의 컴백과 너의 데뷔도 나가리다. 하지만 연희만 빠져주면 일이 잘 진행될 수도 있다.. 창한은 내 말을 들으며 특유의 쎄한 표정으로 돌변했다. 지난 번에 태준이 뒷담화 깔 때 지었던 바로 그 표정이었다.


나 혼자만의 힘으로 백연희 이사를 꺾을 순 없으니 창한의 힘을 빌리고 싶었던 것 같다. 창한에게 누구 때문에 일이 안 된다고 뒷담화를 까면 얼마 뒤 누구는 제거되고 일이 순조롭게 풀리는 경험을 몇 번 하고 나니 의지하게 된 것이다.


아직까지는 나쁘지 않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나는 탑스타 차민오와 캐스팅을 논의 중인 작품의 감독이다. 프로젝트가 엎어지기 전이라면 충분히 나쁘지 않은 조건으로 다음 프로젝트로 넘어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 전까진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하는데 내 힘으론 안 되니 창한의 힘을 빌릴 수 밖에.



***



‘감독님 많이 힘드시죠? 저는 감독님 편입니다. 화이팅!’


서연의 톡이다. 서연 뿐 아니라 다들 내가 프로젝트의 주도권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는 줄 아는 것 같은데 전혀 아니었다. 그냥 감독 방에 틀어박혀 태준이 그랬던 것처럼 연희 관련 뉴스가 업데이트 되길 기다릴 뿐이었다. 양심의 가책은 들었지만 남 걱정할 때가 아니고 일단 내가 살아야지.


그래도 양심의 가책 때문에 싱숭생숭한 가운데 혜나의 사촌동생이 이번에는 혼자서 영화사로 찾아왔다. 이 바닥은 소문이 참 빠르다. 감독 복귀했다고 떠벌리고 다니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벌써 알았지? 그런데 그는 캐스팅 때문에 찾아온 게 아니었다. 혜나와 연락이 안 된다며 찾아온 것이다. 며칠 전에 혜나가 날 만나러 간다고 하고 연락이 끊겼다며 혹시 그 날 혜나와 만났는지 또는 연락이 되는 지 알려달라는 것이다.


혜나가 무슨 이유로 나를 팔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혜나에게 만나자고 연락한 사실이 없다고 했더니 나에게 연락을 받은 건 아니고 내 조감독한테 연락을 받고 나갔다고 했다. 조감독? 자승이? 자승이는 아직 조감독 아닌데? 자승이는 물론이고 내 조감독을 사칭해서 혜나에게 연락을 할 만한 사람은 전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자칭 혜나의 사촌동생은 아직 조감독이 없다는 내 말을 순순히 믿는 눈치는 아니지만 알았다고 하고는 혹시 연락이 되면 꼭 좀 알려달라고 했다.


그와 헤어진 후 동민에게 전화해 혹시 혜나와 최근에 연락 한 적 있냐고 물어보니 전혀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것도 창한의 배려일까? 혜나라는 듣보잡 여배우가 내 발목을 잡고 ‘가족사냥’의 메이드에도 방해가 될 것 같으니 알아서 제거해 준 것이다. 창한에게 혜나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다고 하소연 한 것 같긴 한데.. 에이.. 설마 그런 헐리우드 B급 스릴러 영화 같은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불행한 사건들이 창한의 소행이거나 배후에 창한이 있다면 적어도 ‘가족사냥’은 메이드 될 가능성이 높고 나는 잘 찍기만 하면 된다. 작품을 도둑질한 것 정도야 뭐 그까짓꺼 가족 같은 사이니까로 퉁쳐서 넘어갈 수도 있을 지도 모른다. 굳이 서연의 감독 데뷔에 목을 맬 필요는 없을 듯?


양서연 피디 본인도 감독 데뷔에 자신이 없어졌다고 했으니 마침 잘 됐다. 조만간 프리 프로덕션 단계가 되면 눈 코 뜰 새 없이 바빠질테니 그 전에 그동안 신세 진 지인들에게 보은을 하고 감독으로서 품위도 유지해야하므로 슬슬 법카를 돌려달라고 해야겠는데 서연의 인스타에 그동안 못 보던 남자가 등장했다.


정확히는 남자가 아니라 남자의 손이다. 누군가와 다정하게 손을 잡고 있는 사진이 인스타에 업로드 된 것이다. 몇 번을 다시 봐도 남자 손이 확실했다. 서연이 내 책상 위에 올려둔 서울의 온갖 핫한 맛집들의 영수증을 보니 아마도 그 남자와 맛집 투어 중인 듯 했다.


내 법카는 감독 준비에 쓰라고 준 거지 남자랑 놀러다니라고 준 게 아닌데 어이가 없었다. 더 짜증나는 건 손만 봐도 남자가 훈남 같다는 사실이다. 백퍼 남친이 생긴 것이다. 남친이 생긴 것만으로도 짜증이 나는데 데이트 비용까지 내 법카로 쓰다니.. 이건 배신이다.


서연이 요즘 들어 내가 면담 요청을 하면 자꾸 피하고 바쁜 척을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모르는 척 넘어가려고 했지만 너무 호구가 된 기분에 억울해서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쓴소리 타임이 한 번은 필요할 것 같았고 그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간만에 선톡으로 그동안 작업한 걸 보내달라고 했다.


남자랑 놀러다니느라 작업한 게 없을테니 못 보내줄 것이고 그러면 그 동안 뭐 했냐고 한 소리 하면서 법카를 돌려받는 시나리오를 구상했는데 예상 외로 순순히 시나리오를 보내주었지만 완성도가 처참한 수준이었다. 모름지기 사람에겐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써야 하는 법이다. 지금까지 당근은 충분히 먹였으니 이제부터는 채찍이다! 서연을 카페로 불러내 눈시울을 붉힐 작정을 하고 시나리오에 대해 쓴소리 융단 폭격을 퍼부어주었다.


“양 감독님. 오해하지 말고 들어줬으면 좋겠어.”

“네 감독님.”


내가 자기와 단 둘이 있을 때 이렇게 진지한 표정을 지은 건 처음인지 살짝 긴장한 눈치였다.


“잘 쓰고 말고를 떠나서 자기 시나리오는 영상화 작업에 적합치 않아. 동사가 아니라 형용사라고나 할까? 그냥 설명과 묘사만 있고 액션이 없어. 영화는 사건이야. 뭔가 벌어져야 하는데 자기 시나리오는 이런 일이 있다 또 있다 또 있다의 반복일 뿐이잖아. 이런 건 대본이라 하기도 그래. 내 인터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감독 캐릭터 빼고는 쓸 게 없어. 솔직히 실망이야. 더 노력해야겠어 양 감독. 감독하고 싶다며? 감독이 만만한 건 아니지? 이 바닥에서 감독이 되려면 이 정도로는 안 돼. 양 감독은 머리가 좋으니까 무슨 말인지 알 거야.”


1차 융단폭격이 끝났으니 슬슬 서연의 눈시울이 붉어질 때가 됐는데 예상과는 전혀 다른 전개가 이어졌다. 서연이 눈시울을 붉히면 따뜻한 말로 위로해줄 생각이었는데 눈시울이 붉어지기는 커녕 서연의 얼굴 위로 처음 보는 싸늘함이 튀어나왔다. 내가 할 말을 잃자 서연은 눈을 내리깔고 한기를 내 뿜더니 할 말 다 끝났으면 먼저 가보겠다며 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곧장 카페에서 나가버렸다. 물론 법카도 돌려주지 않았다.


아무리 우리가 안 보면 그만인 생판 남이라 해도 이런 마무리는 아닌 것 같아 전화를 했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다. 너무 갈군 걸까? 모욕감을 준 걸까? 에라 모르겠다. 비록 출연 계약서에 도장을 찍진 않았지만 아직까지 나는 탑스타 차민오의 차기작 감독 예정인 몸이시다. 조카뻘 여자애랑 뭐 하는 짓이란 말인가. 당분간은 법카는 잊고 근신하면서 백연희 이사의 근황이 업데이트되길 기다리자.


하지만 창한이 백연희 이사를 처리해준다 해도 ‘가족사냥’을 도둑질 했다는 사실을 들키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아무리 가족 같은 사이니까로 넘어가려 해도 창한 정도로 미친 놈은 무슨 짓을 할 지 모른다. 한시라도 빨리 창한의 약점을 확보해야 하는데 임 감독의 노트북 아니면 최소한 ‘아빠들’ 시나리오라도 찾아서 들고 있어야 한다. 문제는 ‘아빠들’은 실종됐고 창한의 비밀의 방 도어락 비번도 알 길이 없다.


지금으로선 믿을 건 동민 뿐이지만 ‘아빠들’의 작가 또는 작가의 지인이라도 만나게 해 주겠다더니 아직까지 무소식이다. 역시 심동민. 뭐 하나 제대로 하는 일이 없다. 아마 동민을 통해 ‘아빠들’ 작가를 만나게 될 일은 없을 것 같다.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해졌다. 남의 작품을 도둑질까지 해서 영화를 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 무슨 대단한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남의 작품을 도둑질 할 게 아니라면 새로 시나리오를 써야 하는데 엄두가 나질 않아 내 컴퓨터 폴더 안에서 고이 잠들어 있던 ‘버진 어게인’을 꺼내 읽어 보았다. 나쁘지 않은데? ’꼴리는 영화’ 최경진 감독의 ‘버진 어게인’으로는 미팅 한 번 제대로 못 했지만 탑스타 차민오의 차기작 ‘가족사냥’의 최경진 감독의 ‘버진 어게인’이라면 다를 수도 있다. 시나리오를 돌리면 어쩐지 그리 머지 않은 미래에 계약하자는 곳이 나타날 것만 같았다.


내 예상대로 석 팀장 몰래 시나리오를 돌렸더니 금방 여기저기서 관심을 보였다. 아직 영화는 찍지도 않았지만 ‘가족사냥’이 잘 된다면 ‘버진 어게인’이 탑스타 차민오 주연의 ‘가족사냥’ 감독의 차기작이 될 수도 있으니 일단 얼굴 도장이라도 찍어두려는 듯 했다.


나를 찾는 연락을 몇 번 받고 나니 이미 영화를 다 찍고 흥행에도 성공한 기분이 들었는데 행복은 잠시였고 석 팀장에게 호출을 당했다. 내가 ‘가족사냥’ 다음 작품으로 ‘버진 어게인’을 돌리는 걸 들킨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난 그거 별로야.”

“사람을 불렀으면 인사도 하고 왜 불렀는지 설명도 해야지 다짜고짜 뭐가 별로야?”

“버진 어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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