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인생 2회차

084.

by Zinn


폭망 만으로도 억울한데 안목까지 없는 감독으로 기억되고 싶진 않았다.


“내가 그 때 조 피디 시나리오를 혹평 했었나?”

“혹평까진 아니지만 노답이라는 느낌이었거든요. 가능성이 없다? 일말의 희망이라도 느꼈으면 팀장님에게 보여줬을 것이고 만약 팀장님이 좋다고 하면 밀리언필름에 팔았을 지도 모르죠.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어요.”


마음 같아선 “아이고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폭망 감독 따위가 감히 주제도 모르고 헛소리를..”이라고 석고대죄 하고 싶었지만 옆에 서연이 있어서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조재웅의 시나리오를 두고 한국 현실에서 이런 판타지 시나리오는 메이드 되기 어렵다. 빠른 데뷔를 원하면 저예산 로맨틱 코미디나 쓰라고 되도 않는 오지랖을 떨었던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고 그냥 폭망 감독도 아니고 안목도 없는 폭망 감독 주제에 서연 앞에서 제작자 행세를 하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너무 부끄러웠다.


한편으론 재웅은 난니맨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직장 생활 틈틈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기 시나리오를 써서 메이저 제작사와 작가 계약을 할 정도의 앞 날이 창창한 인재가 익명의 부캐까지 만들어가며 폭망 감독을 괴롭힐 이유가 없다. 메이저 제작사와 작가 계약은 축하한다만 앞으로 안 볼 사이일 게 뻔해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러게. 정말 큰일 날 뻔 했네. 나중에 대박나면 어느 정도는 내 덕분인 셈이지?”

“그런 셈이죠?”

“땡스 투 크레딧에 올려줄 거야? 하하.”


웃자고 한 소린데 진짜로 크레딧에 이름을 올라달라고 하는 줄 알았는지 재웅과 서연 둘 다 아무런 리액션이 없길래 은은한 미소만 유지한 채 남은 커피만 홀짝거리는데 문득 서연이 아니고 재웅의 시나리오를 픽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서연이 아니라 재웅의 시나리오를 들고 다닌다면 제작자 데뷔 가능성은 훨씬 더 높을 것이다.


후회해 봤자 이미 늦었다는 아쉬움과 동시에 내 앞가림도 못해서 한참 어린 후배 감독 지망생에게 빌붙을 생각까지 하고 있는 나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서연도 재웅 옆에 딱 붙어 있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자신이 나 같은 노답 영화인보다는 재웅 같은 메이저 영화인과 가깝다고 어필하고 있는 듯 했다.


그래. 나보단 재웅과 친하게 지내겠다 이거지? 오케이! 나 같은 내일이 없는 폭망 감독 따위가 앞 날이 창창한 메이저 영화인들과는 더 이상 한 공간에 있기가 민망해 두 분이서 편하게 말씀 나누라며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아무도 나를 잡지 않았고 혐오와 씁쓸을 곱씹으며 카페에서 나오자 뒤에서 재웅의 목소리가 들렸다.


“감독님! 잠깐만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자 재웅이 다가오더니 주변을 살피며 조용히 속삭였다.


“‘감독인생 2회차’ 잘 보고 있습니다. 감독님이 왕복동 작가님이시죠?”


응? 내가 ‘감독인생 2회차’의 왕복동 작가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 아니라고 부인해야 하나? 아니지. 부인조차 하지 말고 아예 무슨 얘기를 하는 지조차 모르는 척 해야 한다.


“뭘 잘 보고 있다고?”

“감독님이 ‘감독인생 2회차’ 왕복동 작가님이시잖아요! 웹소설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내가 웹소설을 왜 써? 난 웹소설이란 거 읽지도 않는데? 작가 이름이 왕복운동이야?”

“앗.. 비밀인가요? 아니라면 죄송요. 제가 잘못 봤나봐요. 전 감독님이 왕복동 작가님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글 너무 재밌어서 잘 보고 있고요 퇴사 후에 한숨 돌리고 나면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래. 감독인생 2회차인지 뭔 지는 나도 한 번 찾아서 읽어볼게. 다시 한 번 계약 축하하고.. 응원할게!”


내가 ‘감독인생 2회차’의 왕복동 작가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너무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더 궁금한 건 혼자만 알고 있는지 서연이나 석 팀장에게도 공유했는지였지만 이거야말로 물어봤다간 내가 ‘감독인생 2회차’의 왕복동 작가라고 자수하는 격이나 다름없다.


추측 컨데 아마도 기획팀 업무 중에 원작IP 발굴이 있으니 영화로 만들 만한 원작 웹소설을 찾던 중 발견한 듯 했다. 아직까진 괜찮다. 비록 ‘감독인생 2회차’의 극중 에피소드들이 밀리언 필름에서 내가 겪고 있는 상황과 등장인물의 이름조차 비슷하지만 최경진 감독이 왕복동 작가라는 물증까지는 없을 것이다.


‘감독인생 2회차’에 나오는 에피소드들은 영화판 어디에나 흔히 있을 법한 일들이고 내가 왕복동이라는 건 조 피디의 심증에 불과하니 끝까지 부인하면 우연의 일치로 끝나는 것이다. 무엇보다 ‘감독인생 2회차’는 앞으로도 영원히 나와 무관해야 한다.


요즘 같은 민감한 시대에 배우 부터 제작사 대표 그리고 신입 피디 등등 업계에서 만난 여자들이 모조리 감독에게 반해 버리고 만들라는 영화는 안 만들고 자신 만의 하렘을 만드는 이야기를 19금 웹소설로 쓰고 있다는 사실을 들켰다간 감독 하차는 물론이고 두고 두고 개망신을 당할 게 뻔하다. 그렇게 되면 감독인생 2회차를 노리고 결단을 내려야 한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을 진정시킨 후 밀리언 필름에 돌아왔는데 석 팀장은 나를 보자마자 대뜸 감독 방으로 따라 들어오더니 생각하고 있는 시나리오 가격과 조건을 빨리 얘기해달라고 했다. 며칠만 더 기다려달라고 했더니 이번에는 이 방은 언제 뺄 거냐고 물어보았다.


“왜? 벌써 들어올 감독님이 정해지기라도 했어?”

“그건 아닌데 희망 고문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니까 그렇지.”


얼마든 줄 테니 빨리 먹고 떨어지라는 얘기였다. 감독도 아니면서 감독 방을 차지하고 있으면 회사 물만 흐릴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나도 이제는 지쳤고 감독 자리엔 미련 없으니까. 한 편 해 봤자 대박이 나지 않는 이상 내 인생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저 비굴한 감독 행세가 몇 년 더 연장될 뿐.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지금 나에게 최선은 최대한 버티면서 시간을 끄는 것이다. 그렇게 영원한 평행선을 그리면 차민오 정도의 스타는 다른 작품에 먼저 출연할 것이고 ‘가족사냥’은 자연스럽게 흐지부지 무산될 것이고 창한은 내가 ‘가족사냥’을 훔쳤다는 사실을 영영 모르고 지나갈 지도 모른다. 그럼 난 깽값만 챙기고 빠지는 거지.


“한 장 가능할까?”

“에이 왜 이래 최 감독~ 이 바닥 사정 뻔히 알면서.. 혹시 한 장부터 시작하자는 얘기일까?”


석 팀장이 좋다고 받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그럼 난 삼천!”


아무리 흥정이라도 삼천부터 시작은 그래도 극장에 걸리는 영화 한 편을 개봉시킨 기성 감독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냐고 한 소리 하려는데 석 팀장의 전화벨이 울렸다. 대화 중이었지만 나 따위는 중요치 않다는 듯 아무런 양해도 구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뭐? 진짜?”


수화기 너머에선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태준이 데리고 다니는 조감독 같은데 태준의 학교 후배니까 내 후배이기도 하다. 기수 차이가 꽤 나서 학교에서 본 적은 없고 나와 마주칠 때마다 인사는 하지만 대충 대충이고 딱히 선배 대접을 해 주는 느낌은 아니었다. 내가 폭망 감독이기 때문이다. 흥행 성공 감독이었으면 폴더 인사에 대접이 극진했을 것이다.


통화는 생각보다 길어졌고 석 팀장의 얼굴은 점점 심각해지더니 아예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리고 한참 후에 카톡이 왔다.


‘시나리오 얘긴 나중에 다시 하자.’

‘왜? 지금 해! 기다릴게.’

‘지금은 아니야.’

‘그럼 언제?’

‘태준이가 교통 사고를 당해서 지금 혼수상태래.’

‘아니ㅠㅠ 어쩌다?’

‘뺑소니’


또 뺑소니? 임 감독은 자살, 심 대표는 뺑소니 그리고 또 뺑소니. 문득 얼마 전에 창한을 만났을 때 태준의 뒷담화를 까며 은연 중에 테러를 청부했던 게 떠올랐다. 만약 창한이 범인이라면 다음 타자는 십중팔구 내가 될 것이고 본의 아니게 감독인생 2회차가 시작 될 지도 몰라 소름이 끼쳤지만 태준이 저렇게 됐으니 당분간은 감독 자리를 지킬 수 있게 돼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려 했으나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후배가 다쳤으니 애써 표정 관리를 했다. 비록 지켜보는 사람은 없지만 그러면 벌 받는다.


석 팀장은 태준이가 입원해있는 병원으로 간다고 했고 나는 창한의 동태를 살피려고 전화를 걸었다. 급하게 어디를 가야 하는데 지금 당장 차로 데리러 오라고 부탁하기 위해서다. 만약 이번에도 차가 수리 센터에 들어가 있다면 백프로다. 하지만 통화가 되질 않았다. 왜지? 뺑소니 증거 인멸 중이라 바쁜가?


잠시 후 창한에게 전화가 왔는데 세미가 연기 연습을 도와달래서 함께 연습실로 이동 중이라고 했다. 그럼 뺑소니가 아닌가 싶었으나 차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뺑소니용으로 차를 따로 구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설마 세미에게까지 그러진 않겠지만 내 딸이 연쇄 살인마일지도 모르는 남자와 함께 다녀도 괜찮은 걸까?


나만 생각하면 창한이 살인범이든 뭐든 글만 잘 쓰면 되지만 내 딸이 그런 놈과 어울리게 둘 수는 없다. 하지만 떨어뜨려 놨다간 지난 번처럼 합의되지 않은 베드씬 촬영 같은 봉변을 당할까봐 걱정이 됐다. 무엇보다 세미에게 창한과 어울리지 말라고 해봤자 듣지도 않을 것이다. 중요한 건 증거다. 창한이 연쇄 살인마라는 확실한 물증.


은조가 왜 창한이 임 감독을 자살 시켰다고 생각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만약에 증거라도 있다면 나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은조에게 전화해서 다짜고짜 창한이 아빠를 자살 시킨 증거가 있냐고 물어보자 은조는 창한이 훔쳐 간 아빠의 노트북이 증거라고 했다. 그 노트북 안에 창한에게 가스라이팅 당하다 자살에 까지 이른 증거가 있을 거라고 했다. 어떻게 아냐고 물어보니 아빠가 펜션에서 자살당하고 나자 집에 있던 노트북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창한이 증거 인멸을 위해 훔쳐간 게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아빠 노트북만 찾으면 그 놈을 잡을 수 있어요.”


솔깃했다. 그 노트북만 있으면 모든 고민이 해결 될 것이다. 은조에게 노트북을 어디서 찾을 수 있냐고 물어보니 창한의 집을 뒤져보는 수 밖에 없다고 하나마나한 얘기를 했다. 내가 자기 말을 믿는 듯 하자 약간 신이 난 듯 했다. 나는 창한의 집에서 임 감독의 노트북을 찾아보고 연락주겠다고 했다.


노트북을 찾기 전까지 내가 갖고 있는 유일한 무기는 동민에게 받은 ‘아빠들’ 시나리오 뿐이다. 문득 임 감독의 노트북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것처럼 내가 갖고 있는 ‘아빠들’ 시나리오 역시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한이 우리 집을 들락날락 거리고 있으므로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그나저나 내가 그 날 동민에게 시나리오를 받아서 어디다 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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