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폭망 감독에서 안목도 없는 폭망 감독으로 전락

083.

by Zinn


퇴근 후 우리 둘 만의 아지트가 되어 버린 카페에서 다시 만난 서연은 오늘따라 유독 기운이 없어 보였다. 석 팀장에게 갈굼이라도 당한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고 원래 계획은 연말까지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한 달 정도 퇴고한 후 구정 연휴 직후에 퇴사였는데 시나리오 진도가 너무너무 안 나가서 퇴사를 미뤄야겠다는 통보였다.


내 그럴 줄 알았다! 퇴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고 진짜로 하는 사람은 말 없이 한다. 서연의 말에 의하면 가장 큰 이유는 내가 감독 자리에서 하차 위기인 걸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노라니 감독 데뷔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졌다고 했다. 시나리오까지는 혼자서 쓸 수 있지만 투자자를 설득하고 주연 배우를 캐스팅 할 생각을 하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해한다. 내가 양서연 피디라도 최경진이라는 폭망 감독 출신 제작자 지망생을 믿고 퇴사까지 하면서 감독 데뷔 준비에 올인하지는 못할 것 같다.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나도 그 때는 제작자 형이 탐탁치 않았다. 부잣집 아들도 아니고 바쁜 척은 하는데 딱히 하는 일이 없는 것 같고 시나리오를 보는 안목도 제작 능력도 부족해 보였고 스타급 배우랑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약속 시간에는 매번 30분씩 늦었고 사무실이 없어서 지하철 역 근처 카페에서 만났으며 커피도 대부분 내가 샀다. 지금 서연에게는 내가 그 형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럴 때 특효약이 있다. 커피를 다 마시고 내일 아침 일찍 회의가 있다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서연에게 말 없이 법카를 건네주었다. 서연은 법카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니 이 카드는.. 감독님 법카 아니에요?”

“맞아. 시나리오 쓰느라 힘들지? 작업하다가 배 고프면 뭐 사 먹고 필요한 거 있으면 진행비로 써.”

“이러셔도 돼요?”

“제작자가 감독 챙겨주는 게 불법은 아니잖아?”


오늘따라 유독 기운이 없어 보였던 서연의 얼굴에 급 화색이 돌았고 전혀 사양하는 기색 없이 냅다 법카를 낚아채갔다.


“그래도 팀장님이 아시면..”

“불법은 아니지만 회사엔 비밀로 해야겠지?”

“당연하죠! 저 입 무거운 거 아시잖아요! 헤헤.”

“자 약속.”


우리는 새끼 손가락을 걸고 비밀 친구가 되었다. 나를 바라보는 서연의 눈빛에서 한 동안 보이지 않던 신뢰와 존경심이 듬뿍 담겨있었는데 역시 남자는 돈이다. 재력이 있어야 한다.


서연과 헤어지고 집으로 가는 도중에 혜나에게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어차피 감독은 나가리각이니 후환 따윈 두렵지 않다. 잃을 게 없다는 게 마냥 나쁜 일은 아닌걸? 앞으로 서연은 법카를 쓸 때마다 내 생각을 하면서 고마워 할 거라고 생각하자 절로 뿌듯해졌다만 행복은 잠시였다.



***



양서연 피디는 참한 인상과는 다르게 씀씀이가 컸다.


일주일 쯤 지나고 월말이 되자 내 책상 위엔 서연의 진행비 영수증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서연의 인스타에 새로운 맛집 사진이 툭하면 업로드 되는 걸 볼 때부터 어째 불안했는데 이렇게 많이 쓸 줄은 몰랐다. 나 혼자 쓸 때는 끽해야 근처 밥집이나 카페가 전부인데 서연의 씀씀이는 나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 정도면 석 팀장이 한 소리 할 법도 하지만 시한부 감독 신세라 법카라도 마음껏 쓰라고 봐주는 건지 아무 말이 없었다. 어차피 법카고 석 팀장도 아무 소리 없으니 얼마를 쓰건 상관없는데 누구랑 쓰는 지가 마음에 걸렸다. 금액만 봐선 혼밥일리는 없다는 게 문제였다. 도대체 누구랑 그렇게 먹으러 다니는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옹졸해보일까봐 꾹 참았다.


더 큰 문제는 법카가 없으니 당장 내가 쪼들린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법카를 같이 쓰자고 할 수도 없고 난감 그 자체였다. 괜한 허세를 부렸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끙끙대고 있는데 석 팀장이 다짜고짜 감독 방으로 쳐들어왔다. 드디어 때가 온 것이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걸 보니 법카 많이 썼다고 한 소리 들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손님이 왔네?”

“누구?”

“여배우래. 혜나라고 말하면 알 거라는데? 내가 분명히 자기 관리 똑바로 하라고 경고했을텐데?”

“아니 그건.. 진짜 어이가 없네.”


내 잘못이 아니라고 억울한 척을 했다.


“왠 남자랑 같이 왔더라. 이상한 소문이라도 돌까봐 회의실에 숨겨뒀으니까 빨리 가서 데리고 나가.”

“남자랑 같이 왔다고? 누군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남자라고? 덜컥 겁이 났다. 차라리 법카 많이 썼다고 혼나는 게 나았다. 내가 자기 연락을 씹고 안 만나주니까 배수의 진을 친 것이다. 도대체 어떤 놈을 데리고 온 건지 몰라서 두근두근 조마조마하며 회의실 문을 살포시 열어 보았더니 안에는 혜나와 내가 모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혜나는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씩씩하게 인사를 했다.


“감독님 안녕하세요!”

“혜나씨 반가워! 여긴 어쩐 일이야?”


인상 더러운 문신 돼지 양아치가 있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3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평범하고 얌전한 인상의 남자였다.


“많이 바쁘시죠? 하도 연락이 안 되셔서 지나가는 길에 잠깐 들렀어요.”

“잘 했어. 별 일은 없고?”

“그렇게 말씀하시면 서운해요. 우리가 꼭 무슨 일이 있어야 보는 사이는 아니잖아요?”

“하하. 그건 그렇지. 그런데 이 분은 누구?”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말 없이 목례를 했다.


“사촌동생이에요. 영화사 구경하고 싶다고 해서요.”

“안녕하세요. 최경진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사촌 동생입니다.”

“사촌동생이에요?”

“네 사촌동생이요.”


남자는 이름은 말하지 않은 채 다시 고개만 까딱거리며 자기를 사촌동생이라고 소개했다. 사촌동생이 꼭 닮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서연과는 닮은 구석이 전혀 없었고 어쩐지 사촌동생은 아닌 듯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행여나 여기서 깽판이라도 칠까봐 얼른 영화사에서 데리고 나와 일부러 멀리 떨어진 카페로 이동했다.


혜나가 이렇게 회사까지 찾아와 사채업자처럼 구는 건 내가 찔리는 구석이 있다고 생각할 거란 계산 때문인 것 같은데 어차피 조만간 감독 자리에서 하차 당할 것이고 혜나도 알게 될 테니 조만간 감독 차리에서 하차 당할 것 같다고 이실직고했다.


혜나는 예상치 못한 이실직고에 당황하는 눈치였다. 아직 확정은 아니지만 이미 감독 후보가 결정되어 있다고 했고 하차 당하면 연락할 테니 술이나 한 잔 사라고 했다.


“에이.. 걱정 마세요. 다 잘 될 거에요 감독님!”


확실히 잃을 게 없다는 건 마냥 나쁜 일만 아니다. 혜나는 잘 될 거란 말과는 달리 똥 씹은 표정으로 자칭 사촌동생과 함께 떠났고 나는 홀로 남아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데 서연과 재웅이 하하호호 웃으며 카페로 들어왔다.


어라? 둘이 원래 저렇게 허물없이 친한 사이였나? 분위기가 묘했다. 두 사람도 내가 카페에 혼자 있는 걸 발견하고는 당황하는 눈치였다. 아니 왜 감독님이 회사에서 이렇게 멀리 떨어진 카페에 혼자 있는 거지?라는 눈빛이 오가는 듯 했다. 순간 서연과 함께 법카를 쓴 범인이 재웅이라는 촉이 왔다.


“어? 감독님! 안녕하세요.. 여긴 어쩐 일로..”


서연은 말 없이 물러나있었고 재웅이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응. 잠깐 누가 만나자고 해서. 두 사람이야말로 여기까진 어떻게?”


내 물음에 재웅은 서연을 쳐다봤고 뜻모를 눈빛 교환을 한 뒤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잠깐 합석해도 될까요? 어차피 곧 알게 되실테니 미리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요.”

“당연히 괜찮지. 앉아. 뭐 마실래?”


설마 청첩장은 아니겠지? 가뜩이나 쪼들리는데 청첩장을 주면 완전 짜증날 것 같았다.


“아니에요 감독님. 사실은 저.. 퇴사합니다.”


재웅의 얘기를 듣고 서연을 바라보자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원래는 서연과 둘 만의 송별회였는데 감독님에게 들킨 이상 먼저 말씀드리는 거라고 했고 회사에는 아직 말하지 않았으니 비밀을 지켜달라고 했다. 퇴사 이유를 물어보니 자기도 서연처럼 감독 지망생인데 더 이상 영화사 직원 일과 감독 준비를 병행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순간 재웅의 10년 뒤 미래가 보였다. 노트북을 들고 동네 카페를 전전하며 시나리오 공모전 정보를 무한 반복하는.. 아직 정이 덜 들어서인지 말리고 싶진 않았다. 재웅은 꼭 감독님 차기작이 메이드 되는 걸 보고 싶었는데 죄송하게 됐다며 퇴사 이후 펼쳐질 암울할 미래도 모른 채 내 걱정을 해 주었다.


지금 네가 내 걱정할 때가 아니라고 한 소리 해 주려다 말았다. 그나저나 둘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묘했는데 내가 조만간 하차당할 시한부 감독이라는 사실 때문인지 더 이상 깍뜻한 감독 대접은 아니었다. 어차피 퇴사하면 안 볼 사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냥 별 볼 일 없는 동네 아저씨 상대하는 느낌이었다.


“이제야 말씀드리지만 사실 저는 감독님 데뷔작이 더 좋았어요. ‘가족사냥’은 감독님 작품답지 않다고 할까요? 너무 상업적이에요.”


재웅은 지 주제도 모르고 어줍잖게 덕담을 지껄였다. 그래도 덕담을 들었으니 답례 차원에서 준비하고 있는 작품은 있냐고 물으면서 혹시 다른 영화사 소개라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빈말을 던지자 서연이 냅다 끼어들었다.


“어머! 모르셨어요? 조 피디님 이미 계약했어요!”

“계약을 했다고? 무슨 계약?”

“작가 계약이요.”


얼마 전에 재웅이 나에게 모니터를 부탁했던 시나리오를 모 메이저 제작사에 팔았다는 것이다. 어느 제작사냐고 물어보자 아직은 말씀드릴 수 없고 퇴사하고 나서 마음 편히 알려드리겠다고 했다. 차라리 청첩장을 받는 게 나을 뻔 했다.


나는 급이 떨어진다고 미팅조차 안 해주는 메이저 제작사랑 작가 계약을 했다고? 조재웅 따위가? 너무 놀랐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 석 팀장도 이 사실을 아냐고 물어보니 석 팀장에게 얘기했다간 구질구질하게 발목 잡힐까봐 아직 비밀이라고 했다.


비참했다. 조재웅 따위에게도 무시당하는 회사에서조차 짤리는 감독 신세라니.. 현기증이 나려는데 재웅이 결정타를 날렸다.


“고마워요 감독님. 만약 감독님이 그 때 제 시나리오를 잘 봐주셨으면 석 팀장님에게 보여줬을 거에요. 감독님에게 칭찬받으면 팀장님에게 보여드릴 생각이었거든요. 에휴.. 정말 큰일 날 뻔 했죠.”


잠자코 있던 서연이 미묘하게 쓴 웃음을 지었다. 재웅은 자신의 시나리오를 알아보지 못한 나의 안목 없음을 돌려깠고 나는 졸지에 ‘그냥 폭망 감독’에서 메이저 제작사에서도 모셔가는 조재웅 작가님 또는 감독님의 시나리오를 알아보지 못한 ‘안목도 없는 폭망 감독’으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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