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
젊고 잘 생기고 능력있고 돈도 많고.. 그렇다면 내가 창한보다 나은 게 뭘까 이 집에서 나의 쓸모는 뭘까 생각하자 절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내 마음이 전해진걸까? 창한은 내 눈치가 보였는지 밥을 먹다 말고 시나리오를 더 손 봐야 한다며 집으로 갔고 나는 질투심에 유정에게 추파를 던졌지만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오늘따라 아름다우시네요.”
“꺼져.”
나를 위한 풀메는 아니었던 것이다. 차마 묻진 못했지만 안방 침대에 누워서도 창한이 이 침대에 누워 있던 것 같은 기분에 영 찝찝했고 나만 빼고 창한과 셋이서만 화기애애했던 풍경이 눈 앞에 아른거려 잠이 오질 않았다.
불면에 시달리다 가까스로 잠이 들었는데 꿈 속에선 창한이 나 대신 유정과 세미에게 아빠 노릇을 하고 있었다. 당장 꺼지라고 외쳤으나 입 밖으로 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밤새도록 잠을 설치다 겨우 잠이 들었지만 아침에 일어나서까지 기분이 더러웠다.
세미는 아침 식탁에서부터 누군가와 킥킥대며 카톡을 했다. 어쩐지 창한인 것 같아 모른 척 하려고 했지만 창한은 혈기왕성한 총각이고 세미는 사춘기 소녀라 걱정되는 바가 있어 참견을 해 버렸다.
“아침부터 누구랑 그렇게 신나게 톡을 하는 거야?”
“작가님.”
“무슨 얘길 그렇게 하는 건데? 꼭두새벽부터.”
“연기 수업 때문에 뭐 물어볼 게 있어서. 아이 씨 왜 참견이야?”
세미가 도끼눈을 뜨고 나를 노려봤고 순간 뒷목이 땡기며 현기증이 났다. 연기수업이라니! 강압적인 베드씬 촬영에 투자 사기까지 당해놓고 아직도 배우의 꿈을 안 버렸냐고 한 소리 하려 했는데 세미는 숟가락을 탁 내려놓고 뛰쳐 나가버렸다.
창한이 글을 더 잘 쓰기 위해 연기 수업도 꽤 오래 들었다고 했던 게 기억났다. 혹시 나도 연기 수업을 들으면 글을 더 잘 쓰게 되려나? 글까지는 몰라도 연출력에는 도움이 될 것이다. 감독이 하는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이 배우의 연기를 봐 주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배우 출신 감독이 꽤 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도 배우 출신이고 마틴 스콜세지도 종종 연기를 한다.
폭망은 했지만 그래도 극장에 영화 한 편 개봉시킨 기성 감독이니까 일반 수강생들과는 차별 대우해주겠지? 게다가 수강생 대부분이 배우 지망생일테니 나에게 잘 보이려고 할 테고? 개꿀!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지금 당장은 아니고 ‘가족사냥’ 감독 자리에서 강제 하차 당하면 기분 전환도 할 겸 집에서 제일 가깝고 이왕이면 물도 좋은 연기 학원 등록을 긍정적으로 검토해봐야겠다.
처음엔 일반 수강생인척 하다가 결정적인 타이밍에 사실은 내가 극장 개봉 영화 감독이고 차기작을 준비 중이라고 커밍아웃하면 아주 난리가 나겠지? 준철과 혜나를 보면 알겠지만 배우 지망생들에겐 내가 무슨 작품을 연출했는지 보다는 현역 감독이고 차기작을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니까.
나의 커밍아웃에 대한 수강생들의 리액션을 생각하자 잠깐 설렜지만 어제 유정과 세미가 창한을 바라보는 눈빛을 생각하자 기분이 다운됐다. 젊고 잘 생겼고 돈도 많고 글도 잘 쓰고 연기도 잘 하고 이제는 가족들도 나보다 창한을 더 좋아하고.. 쓸쓸함이 밀려왔다.
괜찮다! 나에겐 서연이 있으니까! 나를 버린 건 니들이 먼저야. 밀리언 필름에선 서연 하나만 건져도 성공이다. 감독 하차는 시간 문제지만 아직 감독 방을 빼라고는 안 했으니 최대한 오래 버티며 서연의 감독 데뷔 프로젝트에 올인 할 것이다.
***
서연을 볼 생각에 설레며 회사에 나갔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어색 뻘쭘 그 자체였다. 이제는 노골적으로 나를 피하는 느낌이었다. 석 팀장에게 시나리오 얼마나 쳐 줄 거냐고 물어본 게 소문이 난 듯 했다. 감독답지 않다고 실망한 걸까? 다들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투명인간 취급이었다.
다행히 서연은 예외였다. 내가 감독 자리에서 하차하면 자신의 데뷔작 제작에 전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지 실망은 커녕 더 반기는 눈치였다. 고마웠다. 사무실에선 ‘가족사냥’과 관련해선 더 이상 할 일이 없어 서연의 시나리오만 반복해서 읽었다. 폭망감독 최경진의 인터뷰에서부터 출발한 이야기여서 그런지 내 시나리오를 쓸 때보다 더 몰입이 잘 됐다. 내 작품을 이렇게 열심히 했으면 벌써 차기작을 개봉시키고도 남았을 것이다.
서연과의 인생 2막에 대한 가능성도 동기부여가 됐다. 서연에게는 ‘꼴리는 영화’에서 조단연으로 출연했지만 지금은 주연급 배우로 성장한 B급 탑스타 현규에게 시나리오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고 약을 팔았.. 아니 희망을 심어줬다. 현규는 나를 만날 때마다 내 덕분에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며 항상 감사해하고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카톡을 주고 받는 사이라고 뻥도 쳤다.
진실은 마지막으로 만난 지 9년쯤 됐고 전화 번호도 바뀌어서 이제는 연락처 조차 모르는 사이지만 극중 찐따 감독 역할로 현규가 출연해준다고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했다. 실제로 현규 정도만 캐스팅되면 투자는 얼마든지 가능하고 나는 제작자 데뷔 성공이다.
서연에게서 캐스팅고가 나오는 대로 현규를 찾아가 한 번만 살려달라고 무릎 꿇고 빌어야지. 현규의 전화 번호는 모르지만 소속사에 찾아가서 애걸복걸하면 설마 전달 정도는 해 줄 것이다. 현규도 최근 몇 년간 출연한 작품들이 하나 같이 시원찮았고 그래도 내가 현규랑 같이 작품을 한 감독인데 미팅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문제는 서연이 점점 나를 피하는 눈치라는 것이다. 자격지심인지는 모르겠는데 현규 약빨이 부족한 걸까? 현규 정도면 A급 탑스타는 아니어도 중급 영화 투자는 되는데 서연이 아직 이 바닥 경험이 부족해 그 정도도 모르는 걸 수 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서연은 더 이상 나의 지도편달 대로 시나리오를 고치지 않았고 어떻게 되어 가는 지 물어봐도 두리뭉실 둘러대기만 했다. 설마 밀리언 필름에 이어 까마득한 업계 후배인 20대 기획 피디에게도 까이는 건 아니겠지? 말이 안 되는 시나리오는 아니다. 서연은 영악한 아이여서 내가 이용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면 가차없이 손절하고도 남을 것이다.
당근이 필요하다. 석 팀장에게 면담 요청을 했고 만나자마자 시나리오 값으로 얼마나 줄 거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았다. 석 팀장은 한 장 이상은 어렵다고 했다. 나는 한 장 먹고 떨어질 순 없다고 했고 석 팀장은 돈을 더 달라는 게 아니면 내가 먼저 원하는 걸 제안 해 보라 하고 자리를 떴다. 이제 됐다. 운을 띄워 놨으니 ‘가족사냥’ 값으로 한 장 플러스 서연의 작품을 개발 시켰으니 제작자 또는 프로듀서로 데뷔시켜달라고 던져봐야겠다.
창한은 자기 시나리오로 일이 진행되고 있는 걸 알고 있으면서 혜나와는 다르게 계약은 언제 하는 거냐 등의 질문은 일절 하지 않았다. 계약해달라고 조르면 ‘아빠들’의 존재를 알리려 했는데 아직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창한은 시한 폭탄이나 다름 없었고 특히나 ‘아빠들’의 시나리오를 내가 갖고 있다는 사실은 최후의 순간을 위해서라도 숨겨둬야했다.
창한이라는 시한 폭탄을 해체하려면 일단은 원작자 또는 원작자의 지인이라도 만나서 증거를 확보해야 한다. 창한에게는 잊을 만 하면 한 번씩 임 감독과의 관계를 물어보았으나 ‘악녀사냥’ 작업 중간에 잠수 탄 이후엔 다시 연락한 적도 연락이 온 적도 만난 적도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따지고 보면 창한은 나에게 둘도 없는 귀인인데 뒤탈 없이 내칠 궁리를 하고 있는 나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가족사냥’을 물어다주고 양아치 제작사에서 잔금 받아주고 세미의 베드씬 촬영 분량이 담긴 외장하드까지 받아내주었다. 내 인생에서 이렇게 초지일관 도움만 주는 인연이 있었던가? 어라? 그렇다면 이왕 이렇게 된 거 감독 하차 건도 해결해 달라고 해 볼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창한을 불러내 소주 한 잔 하면서 후배 감독 태준에 대한 앙심을 격정 토로했다. 그 새끼는 상도가 없어! 아무리 감독이 하고 싶어도 선배를 짓밟으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창한은 묵묵히 듣고는 태준에 대해 궁금해했고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태준이 어떤 캐릭터인지부터 시작해서 어디 사는지와 평소 자주 들르는 헬스클럽 등에 대해 차분하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술을 퍼 마시며 그 새끼 땜에 감독 자리에서 하차 당하게 생겼다고 하소연과 저주를 퍼붓다 필름이 끊겨버렸다. 이러면 안 되지만 혹시나 이번에도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가 됐다.
***
정신 차려보니 해가 중천에 떠 있었고 집에는 나 혼자였다. 창한이 데려다 준 모양이다.
잘 해줘서 고마운데 ‘가족사냥’을 훔친 걸 알아도 이렇게 잘 해 줄까? 아닐 것이다. ‘가족사냥’을 훔친 걸 영원히 비밀로 할 수는 없다. 들켰다간 업계에서 매장 또는 임 감독처럼 자살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고 안 들킨다 해도 이대로라면 태준에게 감독 자리에서 밀려날 게 뻔하다.
만약에 태준이 임 감독이나 심 대표처럼 변고를 당하면 어떡하지? 그렇게 된다면 은조의 주장대로 창한은 연쇄 살인마가 맞고 다음 차례는 나라는 얘기다. 감독을 하느냐 마느냐는 더 이상 중요치 않아진다. 이래저래 답이 없다. 새 시나리오를 쓸 엄두는 안 나고 이 나이 먹고 다른 일을 할 수도 없다.
‘가족사냥’을 훔친 걸 창한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밀리언 필름에 창한을 ‘가족사냥’의 원작자라고 소개시켜 준다면 어떻게 될까? 당장은 시끄럽겠지만 잘만 수습되면 자살이나 뺑소니를 당하진 않을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내가 ‘가족사냥’을 훔쳤다는 사실도 잊힐 것이다. 내가 유명 감독이면 모르겠지만 데뷔하자마자 폭망하고 10년 째 빌빌대고 있는 감독의 파렴치한 절도 행각을 누가 기억하겠는가.
지금으로선 제일 좋은 시나리오는 차민오가 출연 의사를 번복하고 ‘가족사냥’은 지난 10년 간 늘 그랬듯 흐지부지 무산되는 것이다. 그 사이에 부업으로 시작한 양서연 피디의 감독 데뷔 프로젝트가 성공해서 제작자로 거듭날 수 있다면 나로선 남는 장사다. 물론 서연이 그 전에 배신만 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데뷔작 제작을 맡아달라고 부탁은 했지만 조금만 일이 잘 풀리면 바로 안면 몰수 할 스타일이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느낌이 온다. 내가 서연이라도 굳이 미래가 없는 중년의 폭망 감독과의 의리에는 연연하지 않을 것이다.
감독 방에 틀어박혀 연출 준비는 커녕 서연이 배신을 못하게 하는 방법은 뭘까 고민하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내 생각을 아는 지 모르는지 서연에게서 면담 요청이 왔다. 문득 ‘남자는 인정 여자는 애정’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배신을 못하게 하는 답이 될 수도 있겠다.
지금부터는 감독과 피디가 아닌 남자와 여자로 승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