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보다 젊고 잘 생기고 능력 있고 돈도 많은 남자

081.

by Zinn


너 같으면 안녕하겠냐?


이제는 카톡 알림 소리만 들려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폭망 이후 10년 간 아무도 나를 찾지 않던 시절 스팸 카톡 하나에도 설레고 반갑던 때가 조금은 그립다. 혜나가 원하는 건 캐스팅이고 더 이상 말로만 때울 순 없는 상황이어서 뭐라 답할지 고민 중에 또 다시 카톡이 왔다. 이번엔 인증샷과 함께였다.


‘지금 감독님 영화 보고 있어요. 혼자에요.’


어두컴컴한 원룸에서 와인 한 잔 하며 노트북으로 ‘꼴리는 영화’를 보고 있는 혜나의 셀카였다. 얇은 슬립 차림에 환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얼굴에 그늘이 있었다.


‘감독님 영화를 보고 있으니까 감독님과 함께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내 평생 누군가에게 이렇게 뜨겁고 집요한 관심을 받는 건 처음이라 적응이 되질 않았는데 어쩐지 스토킹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있는 듯 해서 위기감이 느껴졌다. 뭐라고 답을 해야 할 지 모르겠어서 그냥 하는 소리를 보냈다.


‘ㅋㅋㅋ 내 생각해줘서 고마워. 난 죽지 못해 산다. 조만간 커피 한 잔 해.’

‘와인 한 잔은 어떠세요?’

‘좋지. 곧 연락할게.’

‘오늘은요? 작품 진행 상황도 궁금하고요.’


대충 넘어가려고 했지만 혜나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진행 상황이 궁금하다고 확실하게 본인의 의사를 전달 했다. 와인을 마시고 있어서 취한 줄 알았는데 맨 정신 같았다.


‘11월 8일이 무슨 날인지 아세요?’

‘글쎄?’

‘내 생일이에요.’

‘아 ㅊㅋㅊㅋ 미리 축하할게!!!’

‘선물은요?’

‘준비해둘게ㅎㅎㅎ’

‘생일 선물로는 캐스팅 소식이 좋을 것 같아요.’


웃자고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마지막에 ㅎ이나 ㅋ또는 그 흔한 이모티콘 하나 붙어 있지 않아서 절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두컴컴한 원룸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스마트폰 화면만 노려보며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혜나를 생각하니 심장 박동이 빨라지며 숨이 막혀왔다.


‘ㅎㅎㅎ’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르는 상태로 호흡만 가빠지고 있는데 혜나는 ‘ㅎㅎㅎ’라는 뜻 모를 톡을 보내왔다. 생일 전까지는 살려두겠다는 의미일까? 최소한 지금 당장 나를 어떻게 하려는 것 같진 않아서 나도 ‘ㅋㅋㅋ’이라고 답톡을 보냈고 더 이상 톡은 오지 않았다.


캐스팅 확정 기사도 아니고 검토 중이라는 기사 하나 났을 뿐인데 파급 효과가 엄청났다. 혜나의 ‘ㅎㅎㅎ’에 대한 답으로 나 역시 ‘ㅋㅋㅋ’로 답했지만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혜나는 연쇄 살인마는 아닐 것이므로 나를 죽이거나 자살 시키진 않겠지만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나를 이 바닥에서 생매장시킬 수 있으므로 어떻게든 처리해야 한다. 생일 전까지 캐스팅 또는 캐스팅에 버금 가는 뭔가를 제공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넘어가진 않을 것이다.


혜나 vs. 창한. 우열을 가리기 어렵지만 더 무서운 건 창한이다. 은조의 주장대로 임 감독을 자살시켰고 심 대표까지 죽인 게 창한의 소행이라면 다음은 내 차례일 것이다. 아직까진 본인의 작가 데뷔에 도움을 주고 있는 줄 알고 살려 두고 있지만 내가 ‘가족사냥’을 훔쳤다는 사실을 알아낸다면 영화사에 항의나 법원에 고소로 끝나면 다행이고 쥐도 새도 모르게 자살이나 뺑소니를 당할 지도 모른다.


‘가족사냥’을 훔쳤다는 사실을 들킬 때 들키더라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아빠들’의 원작자를 확보해두어야 했다. 그래야 너도 ‘아빠들’을 표절한 거 아니냐고 시비를 걸어 합의를 시도할 수 있고 임 감독의 수상한 자살에 대해 뭔가 알아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아빠들’의 원작자를 찾으면 연락을 주기로 했던 동민에게 전화해 어떻게 되어 가냐고 물었더니 대뜸 캐스팅 기사 봤다며 영혼 없는 축하 멘트를 날려주었다.


“사람 일 모른다더니 별 일이 다 있다? 내가 최경진 감독의 차기작 캐스팅 기사를 보는 날이 올 줄이야. 암튼 축하해.”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혹시 연락 됐어? ‘아빠들’ 시나리오 원작자?”

“되긴 했는데..”

“어디야? 얼굴 보고 얘기하자.”

“지금 좀 바쁜데.”

“바쁜 게 문제냐. 알았어. 내가 갈게.”


나는 곧장 동민의 집 앞으로 달려갔다.



***



구관이 명관이라고 이럴 땐 역시 오랜 친구가 제일 편했다. 간만의 만남이라 차민오의 갑질에서부터 밀리언 필름의 양아치 짓 그리고 감독하차 위기까지 미주알 고주알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나의 불행은 동민의 행복인 경향이 있어서 처음엔 고소해하는 것 같긴 했지만 내가 감독 자리에서 하차 당할 위기라는 말엔 자기 일처럼 분노해주는 척 했다. 그리고 내가 하소연을 늘어놓는 내내 잠자코 듣고만 있다가 나의 폭풍 하소연이 한 템포 쉬는 사이에 훅 치고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물어볼 테니 솔직히 말해 봐. ‘가족사냥’ 니가 쓴 거 맞아?”

“응. 내가 썼어.”


이제와 내가 쓴 게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질문해서 미안하다. 임 감독님이 준비하던 작품이랑 너무 비슷해서.. 내가 조감독 할 뻔 했으니까 잘 알거든. 너도 ‘아빠들’ 읽어봤으면 알 거 아냐?”

“너는 나랑 임 감독님 관계 잘 알잖아? 조감독 안 한다고 삐져서 몇 년 간 연락도 뜸했는데 어떻게 작품을 읽고 표절을 하겠냐?”

“그렇긴 하지만.. 나 모르게 임 감독님과 만나서 작업하고 그런 건 아니지?”

“그걸 왜 너 모르게 해? 그리고 너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내가 지금 얼마나 중요한 순간인지 알잖아? ‘아빠들’의 존재가 회사 쪽에 들어가는 순간 난 끝장이야.”

“걱정 마. 내가 이런 얘길 누구한테 하겠냐. 이젠 영화판에 아는 사람도 없어. 너 말곤.”

“그래서.. ‘아빠들’ 작가랑은 어떻게 된 거야?”

“작가랑 연락은 아직인데 그 작가랑 같은 작가 교육원에서 수업 들었던 동료랑은 연락이 됐어. ‘아빠들’ 작가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고 하니까 조만간 다시 연락주기로 했어.”

“그래? 작가 이름이 뭐래? 구창한은 아니지?”

“응. 안 그래도 그거부터 물어봤는데 구창한은 아니래. 전화로 얘기하긴 곤란하고 만나서 이야기 하자면서 다시 연락준다더라.”

“언제?”

“조만간?”

“나도 불러. 같이 보자.”

“알았어. 연락 오면 알려줄게.”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가족사냥’이 표절 했을 가능성이 높은 ‘아빠들’이란 시나리오의 작가 이름이 구창한이 아니라는 게 사실이라면 내가 ‘가족사냥’이란 작품을 창한에게서 뺏은 게 아닌 셈이니 창한에게 미안해 할 필요도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허락을 구할 필요도 없다.


구창한 이 새끼.. 생각하면 할 수록 괘씸한데? 자기도 남의 작품을 표절한 주제에 작가 행세를 하다니! 하지만 나를 믿고 ‘가족사냥’을 보내주었고 지금까지 말도 안 되는 요구 사항들을 군소리 없이 수정해 준 노고가 있으니 소정의 각색료 정도는 챙겨줄 생각이다. 물론 각본 크레딧은 택도 없다.


창한을 처리하고 동민의 입 단속만 시키면 ‘가족사냥’은 완벽하게 내 작품이다. ‘아빠들’의 작가가 나타나는 건 빨라야 ‘가족사냥’ 개봉 이후일 것이고 그 때는 적당히 협상해서 위로금을 챙겨주면 별 일 없을 것이다. 개봉까지 끝난 마당에 자기가 ‘가족사냥’의 원작자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녀봤자 얻는 게 없으니 대충 먹고 떨어져 주겠지.


그리고 이제는 각색이 많이 돼서 ‘아빠들’과는 다른 작품이라고 봐도 될 정도다. ‘아빠들’을 읽어본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가족사냥’을 보고는 표절이라기보단 역시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다고 생각하고 넘어갈 것이다.


유일한 변수는 창한이 연쇄 살인마일 경우다. 은조의 주장대로 창한이 싸이코패스 연쇄살인범이고 임 감독을 자살 시켰고 심 대표까지 뺑소니로 위장해 죽여버렸다면 다음 타겟은 바로 내가 될 것이다. 너도 ‘아빠들’을 표절했으니 ‘가족사냥’은 니 작품이 아니지 않냐는 공격은 씨도 안 먹힐 것이다.


나의 최후는 목매달일까? 뺑소니일까? 아무래도 나 역시 임 감독처럼 자신의 시나리오를 훔쳤으니 처벌 역시 임 감독처럼 자살로 위장한 목매달일 듯 했다. 그래도 형님 동생 하고 있으니 선처가 가능할 수도 있다.


처벌일까? 선처일까? 창한의 선택을 궁금해하다보니 창한과는 더 이상 단 둘이 있고 싶지가 않아졌다. 감독님이라고 대접은 해 주지만 묘하게 서늘하고 불편했다. 세미가 껄끄럽긴 했지만 창한과 단 둘이 있는 것보단 나으므로 오랜만에 집에 갔더니 창한이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내가 먼저 창한에게 가족 같이 지내자고 하긴 했지만 연쇄 살인마일 지도 모르는 창한이 내 허락도 없이 우리 집에서 나의 가족들과 밥을 먹고 있다는 사실이 찝찝했고 하하 호호 깔깔 셋이 워낙에 화기애애해 보여 소외감이 느껴졌다.


세미의 바지가 너무 짧아서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는 것도 거슬렸다. 얼른 바지를 갈아입으라고 세미에게 한 소리 하려는데 창한이 양아치 독립영화 제작진들로부터 세미의 베드씬 출연 분량이 담긴 외장하드를 수거해 왔다고 했다. 아니 무슨 국정원 요원이야? 민간인이 어떻게 그런 일을? 설마 자작극은 아니겠지?


만약 자작극이라면 설명은 된다. 애초에 창한이 제작진과 짜고 친 고스톱이었던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아무리 독립영화라도 세미의 주연 캐스팅은 말이 되지 않는다.


“너무 고마운데 도대체 어떻게 받아 온 거야?”

“그냥 정중하게 부탁했어요.”

“말로만? 돈을 준 것도 아니고?”

“당연히 아니죠. 돈을 왜 줘요? 그냥 말만 했죠. 정중하게. 그리고 투자금도 최대한 빨리 돌려주겠다고 했어요.”


이상하다.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다. 하지만 창한은 어떻게 일을 해결했는지에 대해선 알려줄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세미의 캐스팅부터 시작해서 베드씬 강요 등등 이 모든 게 지금의 화기애애함을 위한 창한의 자작극이라는 의심을 넘어 확신이 들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나만 미친 놈이라는 소리를 들을 테니까.


확실한 건 이번 사건을 계기로 가족 내 창한의 인기가 급상승할 것이란 사실이다. 내가 감독이랍시고 밖으로 나도는 사이에 창한이 슬그머니 내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유정에겐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세미에게는 나보다 창한이 훨씬 더 믿음직스럽고 의지하고 싶은 대상일 것이다.


거실과 주방까지는 모르겠지만 안방까지 내주고 싶은 생각은 절대로 없는데.. 오늘따라 유정이 아름다워보였다. 가만 보니 화장이 제대로다. 거의 스드메 풀메 수준이고 아까 저녁 식사 자리의 반찬도 소고기였다. 남편보다 젊고 잘 생기고 능력있고 돈도 많은 남자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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