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랑 영화 하나로 무슨 대단한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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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nn


차기작을 연출하고 싶어하는 내 심정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인지 석 팀장은 슬그머니 내 눈을 피해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밀리언 필름 직원들이 나를 잡상인 취급하는 눈치였는데 이제야 왜 그랬는 지 알 것 같았다.


“현실적으로 그게 제일 베스트야. ‘가족사냥’은 시나리오만 넘겨. 대신 최 감독의 차기작은 우리가 책임지고 메이드 시켜줄게. 원한다면 ‘공소시효’를 다시 작업해도 좋아.”


이게 어디서 약을 쳐! 닥치라고 하고 싶었으나 그런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원하는 금액도 최대한 맞춰줄 수 있어.”

“너무 갑작스럽다 석 팀장. 돈이 문제가 아니잖아?”


돈이 문제다. 감독 복귀는 나가리각이므로 액수만 맞으면 나쁜 제안은 아니다. 애초에 내가 쓴 시나리오도 아니고 구창한 작가에게 들키는 게 문제인데 차민오가 나름 감독이랍시고 시나리오를 자기 스타일로 싹 다 뒤집어 엎고 처음부터 다시 쓰면 구창한 작가의 버전과는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거듭날 것이므로 들킬 가능성은 희박하다. 당연히 제목도 바뀔 것이다. ‘가족사냥’에서 폭망 감독 최경진의 흔적을 싹 다 지우고 싶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얼마를 불러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석 팀장 핸드폰이 부르르 떨리며 태준의 이름이 뜨는 게 보였다. 석 팀장은 화들짝 놀라며 전화를 꺼버렸다. 감이 왔다. 이미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차민오가 내 각본으로 감독 데뷔를 하려고 한다는 건 페이크였고 진짜는 태준일 수 있다.


투자사, 배급사, 제작사, 배우 모두 나보다는 태준을 감독으로 원하는 게 당연하다. 당장 내가 투자자라도 차민오와 폭망 감독의 조합보다는 차민오와 흥행은 고만고만 했지만 가능성은 인정 받은 한 살이라도 어리고 유망한 감독의 조합에 돈을 쏘고 싶을 것이다. 나만 빠져주면 모두가 해피해지는 시츄에이션이다. 사실 이 정도 사이즈의 프로젝트에 폭망 감독이 끼어 있는 게 이상한 것이다.


나를 하차시키고 곧장 태준을 감독 자리에 앉히면 모양새가 좋지 않을 수 있으므로 차민오를 이용한 것일 수도 있지만 뭐가 됐건 나만 빠져주면 영화는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냥 빠지라는 것도 아니므로 내 입장에서도 나쁠 건 없다.


폭망 이후 벌써 10년이 지났다. 이젠 지쳤다. 꼴랑 영화 하나로 무슨 대단한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렇게까지 험한 꼴을 겪어가며 감독을 하려는 건가. ‘가족사냥’이 그렇게 대박날 이야기도 아니다. 천만은 택도 없고 끽해야 300만 정도?


솔직히 ‘살인을 안 하는 호감형 싸이코패스 연쇄살인마 이야기’를 고집한다면 300만은 커녕 제작이 무산될 가능성이 다분하고 우여곡절 끝에 제작에 들어가 개봉까지 간다 해도 100만 이하 또는 손익분기점만 간신히 넘기는 정도로는 인생 역전이 불가능하다. 또 다시 폭망 감독으로 10년을 버틸 자신이 없고 그 때는 내일 모레 환갑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최대한 받아낼 건 받아낸 다음 여기서 물러나는 게 현명하겠다. 최대한 버텨서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내자.



***



석 팀장에게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한 뒤에 먼저 카페에서 나왔다. 더 이상 감독 한 번 시켜달라고 구걸하지 않아도 되고 험한 꼴도 안녕이어서 후련하긴 했지만 기분이 더러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애초에 남의 시나리오를 훔치는 게 아니었다. 석 팀장과 백 이사를 패싱하고 차민오에게 곧장 연락한 것도 에러였다. 딱히 사무실에 들어갈 기분도 아니어서 근처를 배회하며 지난 날을 돌이켜보고 있는데 양서연 피디에게 전화가 왔다. 일전에 부탁드린 시나리오 이야기를 듣고 싶다며 언제 시간 되냐는 것이다. 심심한데 마침 잘 됐다. 지금 당장 나오라고 했다.


전화를 끊고 눈 앞에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서연을 기다리는데 앞으로는 서연과 이렇게 카페에서 단 둘이 만나 이야기 할 일이 없겠다고 생각하자 벌써부터 서연이 그리워지려고 했다. 나를 롤모델로 만든 캐릭터가 찌질한 폭망 감독이라는 사실이 불쾌했지만 그건 픽션과 논픽션을 혼동한 내가 잘못이다.


“정말 죄송해요 감독님. 많이 불쾌하셨죠?”


서연은 카페로 들어오자마자 대뜸 사과부터 했다. 감독님의 사적인 이야기를 허락도 없이 쓴 것 같아 미안하다는 것이다. 집필 당시엔 몰랐는데 다 써 놓고 보니 무례를 범한 것 같다고 했다. 서연의 진심으로 미안해 하는 얼굴을 보자 꽁하고 얼어 붙었던 마음이 스르륵 녹아내렸다.


“불쾌? 에이.. 전혀 아니야. 나를 뭘로 보고! 내가 그래도 이쪽 일 하는 사람인데 픽션과 논픽션도 구분 못하는 줄 안 거야?”


괜찮으니까 신경쓰지 말라고 했다. 이어서 자기도 알겠지만 ‘가족사냥’ 프로젝트에서 하차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 정신이 없으니 일전에 보내준 시나리오 모니터는 지금 상황이 정리되고 제대로 해 주겠다고 했다. 어떻게든 다시 만날 여지를 남겨 두고 싶은 것이다.


“감독님이 하차라니요. 그게 말이 돼요?”

“말이 되더라고.”

“나쁜 놈들이네요. 저는 감독님 나가면 바로 퇴사할 거에요.”

“그러지 마. 요즘 같은 불경기에.. 그래도 여기는 월급은 주잖아?”

“빈 말 아니에요.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감독님과 함께 할 거에요. 그리고 감독님은 저 데뷔 시켜주셔야죠. 책임지세요!”


울 뻔 했다.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다더니 차기작을 잃었지만 서연을 얻은 것일까? 비록 감독으로 재기는 실패지만 서연을 감독으로 데뷔 시키는데 성공한다면 나는 제작자로 거듭남과 동시에 작품이 흥행에 성공하면 돈방석에까지 앉을 수도 있다.


갑자기 머리 회전이 빨라졌다. 감독 자리에서 순순히 물러나주는 조건으로 차기작 계약 대신 서연의 데뷔작에 제작으로 올라가고 제작 지분까지 달라고 하는 건 어떨까? 서연의 시나리오가 나쁘지만 않다면 밀리언 필름으로서도 밑지는 장사는 아닐 것이고 나와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므로 지분을 요구할 자격은 충분하다. 불쌍한 폭망 감독의 작품을 뺏어가는 횡포를 저질렀는데 깽값으로 그 정도는 해 줘야지.


내 나이 45세. ‘가족사냥’이 흥행에 성공한다 해도 끽해야 한 두 편 더 만들 수 있으면 다행이고 그마저도 작품들이 연이어 흥행에 성공해야 가능하다. 그렇다면 되도 않는 감독 한 편 더 해보겠다고 구질구질하게 굴지 말고 제작 포지션으로 전업을 시도하는 게 정답이다.


다행히 양서연 피디는 보기와는 다르게 의리가 있고 이번 일로 서로에 대한 신뢰가 돈독해 졌으니 데뷔 이후의 미래도 기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유정과는 섹스리스 10년차에 세미는 날 싫어한다. 하지만 서연은 다르다. 나에 대한 존경심이 있고 어리고 예쁘고 부자집 외동딸이라고 한다. 책임지고 싶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조건인데 딱 하나 걸리는 건 서연의 부모님이다. 십중팔구 내가 폭망 감독이고 나이까지 많다는 이유로 반대할 것이다. 하긴 나라도 세미가 자기보다 스무살 가까이 나이가 많고 가진 거라곤 쥐뿔도 없는 남자를 결혼하겠다고 데려오면 반대할 것이다. 다행히 세미는 야무져서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천만 감독이라면? 폭망 감독이 아니라 전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재력도 빠방한 천만 감독이라면 못 이기는 척 허락해 줄 지도 모른다. 양서연이라는 신인 감독을 데뷔시킨 제작자라는 타이틀만으로는 약하다. ‘천만 감독 + 제작자’가 좋겠다. 그렇다면 역시나 ‘가족사냥’은 무조건 내가 감독해서 대박이 나야 한다.



***



더 이상 감독한다고 스트레스 받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졌다가 양서연 피디와의 인생 2막을 생각하자 다시 머리가 복잡해졌다.


서연은 다음 회의가 있다며 먼저 사무실로 돌아갔고 나는 홀로 카페에 남아 어떻게 해야 감독 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동민에게 카톡이 왔다. 열어보니 차민오가 차기작으로 ‘가족사냥’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검토 중이라는 기사 링크였다.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캐스팅 기사가 뜰 거란 언질을 받은 적이 없어 당황스러웠고 어떤 후폭풍이 닥쳐올지 예상이 안 돼 불안 초조했다. 구창한 작가가 이 기사를 보는 건 시간 문제였다. 기사를 보고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 지 감이 오질 않았다. 모르는 척 시치미 뗄 수도 없었다. 기사에 밀리언 필름이라는 제작사 이름도 같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가족사냥’의 감독과 작가에 대한 정보는 전혀 노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단 석 팀장에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봤는데 본인도 아는 바가 없고 아무래도 차민오 측에서 아는 기자들에게 흘린 것 같다고 했다. 보통 배우들이 몸값을 높이기 위해 이런 식으로 언론플레이를 하는데 딱 그 케이스였다.


하지만 내가 ‘가족사냥’이라는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지인들로부터는 축하한다는 전화와 문자가 쇄도했고 마침내 창한에게도 카톡이 왔다.


‘감독님이 얘기 중이라는 배우가 차민오였어요?’


아직은 내가 ‘가족사냥’의 각본, 감독이라는 사실까지는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생각해보니 만약 그렇게 기사가 나갔어도 오보라고 하면 될 일이었다. 나는 차분히 이번 사태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 아무래도 차민오 측에서 몸값을 높이기 위해 캐스팅 제안을 하지도 않은 작품으로 언론 플레이를 하는 것 같다고. ‘가족사냥’을 검토하고 있다는 기사가 나면 차민오를 캐스팅하려는 다른 제작사들은 출연료를 더 높이 부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왜 기사에 작가 이름은 없어요?”


눈 앞이 컴컴해지며 위가 쪼그라들었다.


“기자도 거기까진 모를 거야. 취재를 대충 한 거지. 기사를 다시 보면 알겠지만 감독 이름도 없잖아? 사실 지금 단계에선 작가나 감독이 중요한 게 아니거든.”


창한이 나에게 ‘가족사냥’을 도둑 맞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나오려나? 밀리언 필름에 시나리오만 넘기고 조용히 물러날 수는 없는 상황이 되었다. 창한은 하루 빨리 작가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싶어할 테지만 회사에서 창한의 존재를 알았다간 나는 사기죄로 고소를 당해도 마땅한 상황이다. 철저히 숨겨야 한다.


창한에게는 더 좋은 조건으로 계약시켜주려고 협상 중이니 글이나 열심히 쓰고 있으라고 했고 창한은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하는 눈치였으나 평소 꼬치꼬치 캐 묻는 걸 얹잖아하는 내 심기를 거스를까 조심스러웠는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창한을 수습하고 나니 다음은 혜나였다.


‘감독님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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