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9.
같이 시나리오 작업하다 빈정 상할 일이 생기면 때리기라도 할 생각인가? 문득 차민오가 현장에서 뭔가 마음에 안 들면 감독을 때린다는 소문이 떠올랐다. 여긴 우리 둘 뿐이다. 갑자기 차민오가 나를 때리는 상상을 해 보았다.
맞짱 뜨면 이길 수 있나? 못 이긴다. 반격할 수 있나? 자신 없다. 사람들한테 맞았다고 말할 수 있나? 못 한다. 내 말을 믿어주지도 않을 것이고 배우한테 맞았다고 하면 감독으로서 가오가 살지 않을 것이다.
어쩐지 공동 작업 전에 서열 정리 차원에서 한 대 때리고 시작할 생각으로 고립된 공간에서 1:1 상황을 연출한 것 같았다. 차민오가 나보다 힘이 쎄고 무술도 배웠으므로 어설프게 반격했다간 더 쎄게 맞는 수가 있다. 일단은 곱게 맞아야 한 대라도 덜 맞을 것이다.
“그런데 왜요?”
“별 건 아니고요 사람을 때려본 적이 있지 않다면 이렇게 리얼한 심리 묘사가 불가능할 것 같아서요.”
“하하. 꼭 살인을 해 봐야 살인범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죠. 그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물어볼게요. 이거 정말 감독님이 쓴 거 맞아요?”
감독합격인줄 알았는데 아직인가보다. 설마 구창한 작가의 존재에 대해 알고 물어보는 건 아니리라 믿고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비장하고 진지하게.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못 믿으실 수 밖에요. 사실은 저도 믿어지지 않거든요. 아니 내가 어떻게 이런 걸 썼지?”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믿음이 가네요. 그런데 정말 안 어울려요. ‘꼴리는 영화’ 만든 분이 이런 시나리오를 쓰셨다니.. 말이 안 되는데?”
눈치가 귀신 같은 놈이었다. 과연 탑스타의 자리까지 그냥 올라온 게 아니었다. 그리고 대충 눈치를 보아하니 나를 부른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감독 욕심 때문이었다. 그것도 단순 감독만이 아니라 각본 감독에 대한 욕심.
“존경스럽네요. 쉽지 않으셨을텐데.. 사실은 저도 오래 전부터 쓰고 있는 게 있어서 창작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조금은 알거든요.”
“우와.. 정말 대단하십니다. 배우 일만으로도 바쁘실텐데..”
차민오는 지난 몇 년간 자기한테 들어오는 시나리오들이 하나 같이 성에 차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혼자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는데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오지 않아 마음 고생을 하던 중 드디어 데뷔작으로 욕심나는 작품을 찾았는데 그 작품이 바로 나 최경진 감독이 쓴 ‘가족사냥’이라고 했다.
차민오가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바로 ‘가족사냥’을 자신의 감독 데뷔작로 만들고 싶은 것이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나 역시 차민오와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독님! 이건 시나리오 얘긴 아닌데요..”
“네. 말씀하시죠.”
“만약 현장에서 감독님을 무시하는 스태프가 있으면 어떡하실 거에요?”
“무시라뇨?”
“아 정정할게요. 무시가 아니라 감독으로 인정을 못하겠다고 하면요?”
안 그래도 우려하던 사태였다. 아무래도 차민오와 함께 일하는 스태프들은 A급이라 ‘꼴리는 영화’로 데뷔하고 10년 간 놀고 있는 최경진 감독을 감독으로 인정하긴 쉽진 않을 것이다.
“최선을 다해 인정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노력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다른 단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차민오는 노력이라는 단어를 못 마땅해 하는 눈치였다.
“노력만으로는 안 될 텐데요..”
“최선도 다 해야죠.”
“애매하네요.”
아주 잠깐 차민오의 얼굴 위로 슈퍼 갑의 민낯이 스쳐지나갔다. 차민오의 꿈이 감독이라는 건 업계에서 유명해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다. 현장에서도 배우보다는 감독 포지션에 가까웠고 특히 신인 감독을 만나면 아주 쥐 잡듯 괴롭히기로 악명이 높았는데 나는 괴롭힘이 문제가 아니라 아예 작품을 빼앗기게 생겼다. 차라리 현장에서 몇 대 맞는 편이 낫다.
‘가족사냥’을 데뷔작으로 욕심내는 눈치인데 아직은 작품을 넘기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으니 애써 눈치채지 못한 척 했다. 출연 계약서에 도장만 찍어주면 현장에서야 어떻게든 구워 삶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차민오는 끝까지 출연 하겠다는 말은 안 했다. 대신 앞으로 자기와 함께 천천히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며 한 번만 더 시나리오를 수정해보자고 했다.
당연한 말씀이라고 원하시는 바를 알려주면 성실히 고쳐오겠다고 했더니 아니란다. 자기가 보는 앞에서 함께 작업하자고 했다. 아직 내가 ‘가족사냥’을 썼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글을 쓰는 걸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하겠다는 얘기다.
“그럼 감독님! 바로 작업 시작해 보시죠.”
“지금 바로요? 좀 전엔 천천히 하시자고..”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요. 다음 주엔 해외 일정이 있고요. 왜 안 돼요?”
“되죠. 바로 시작할게요. 그런데 메모지라도 있으시면.. 노트북을 안 가지고 와서..”
차민오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노트북을 쓰라고 했다. 새 노트북이었다. 자기가 보는 앞에서 자기 노트북으로만 작업을 하라니.. 빠져나갈 구석이 없었다. 그렇다고 거부할 순 없으니 키보드를 두드리는 시늉이라도 내야 했다. 노트북을 펴고 한글창을 열고 키보드에 공손히 손가락을 올렸다. 차민오는 흥미롭다는 듯 내가 키보드 위에 두 손을 올리고 멍하니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는 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관찰 당하는 기분이었다.
“감독님은 학교 다닐 때 어느 쪽이셨을까요?”
“어느 쪽이라면?”
“일진? 찐따? 일진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둘 다 아니었습니다.”
“어느 쪽에 가까웠어요?”
“정확히 중간요. 평범했죠.”
“그렇다면 친구들은 주로 어느 쪽?”
“친구들도 저랑 비슷해요. 평범했어요.”
“에이.. 재미없다. 솔직히 찐따 쪽이었을 것 같아요. ‘꼴리는 영화’는 딱 찐따가 쓴 것 같았거든. 일진은 절대로 아니지. 내가 딱 알아요.”
일진? 찐따? 기성 감독으로서 배우와 고작 이 정도 수준의 대화를 나누게 될 줄은 몰랐다. 나 스스로가 너무 한심해서 눈 앞이 컴컴하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저는 어땠을 것 같아요?”
“글쎄요.”
학폭 이슈에 워낙에 민감한 시기여서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전 손부터 나가는 스타일이에요. 약간 분노 조절 장애가 있는 것 같기도?”
수 틀리면 나를 때릴 수도 있다는 협박인가? 차민오가 현장에서 감독을 때렸다는 소문이 점점 사실로 느껴졌다. 차민오는 나 정도는 충분히 이길 수 있고 때려도 소문 내지 않을 거란 계산을 끝낸 것 같았다. 때린다면 어디를 때릴까? 갑자기 뒤통수? 아니면 막장 드라마에서처럼 따귀? 그것도 아니면 일으켜 세워놓고 로우킥? 뭐가 됐건 반격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틈틈이 권투라도 배워 둘 걸 그랬다.
“감독님은 분노조절장애 같은 거 없어요?”
“저는 잘 조절하며 살아왔습니다.”
“네네. 그러실 것 같아요. 사람도 안 죽여 봤죠?”
“네? 네. 당연하죠. 하하.”
“정말 신기해요. 어떻게 쥐 새끼 한 마리 못 잡을 것 같이 생기신 분이 이런 시나리오를 쓰셨을까?”
차민오가 왜 자꾸 나를 도발하려는 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내가 진짜 ‘가족사냥’을 쓴 작가가 맞는지 테스트 중이었던 것이다. 위선의 탈을 벗었을 때 모습이 궁금한 것이다. 화 내는 연기라도 해야 넘어가줄 것 같은데 차마 화를 낼 엄두는 나지 않았다.
“창작자와 작품은 별개니까요. 하하.”
차민오는 실 없이 웃는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는 지은 죄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차민오의 기세에 눌려 얼른 눈을 내리깔고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노트북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시죠.”
오늘은 여기까지라는 말이 감독실격이란 얘기로 들렸다. 두시간 가까이 운전해서 왔는데 미팅은 30분 만에 끝나버렸다. 다음 미팅은 기약이 없었고 개인 전화 번호도 알려주지 않았다.
***
차민오와의 1:1 미팅 이후 회사에 돌아왔더니 나를 둘러싼 공기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석 팀장은 물론이고 다른 직원들도 내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갑자기 잡상인 또는 불청객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좌불안석 하고 있는데 석 팀장은 잠깐 얘기 좀 하자며 회사 근처 카페로 불러냈다.
“민오랑은 어땠어? 나랑 연희 패싱하니까 좋았어?”
“석 팀장 뒤끝 있구나?”
“어때? 둘이 얘기하니까 대화가 잘 통하디?”
어쩐지 뭔가 알고 빈정대는 것 같았지만 모르는 척 하고 차민오와 있었던 일을 그대로 전달했다.
“공동 작업하자고 했고 첫날이라 별 이야긴 없었어.”
일진이니 찐따니 하는 이야기는 차마 전달할 수 없었다.
“어제 연희에게 연락이 왔어.”
그럴 줄 알았다. 뭔가 들은 것이다. 두 번이나 미팅을 하고 잠깐이지만 공동 작업까지 했는데 내 전화번호도 알 수 있었으면서 다른 사람을 통해서 연락을 했다는 건 그리 유쾌한 소식은 아닐 듯 했다.
“차민오 말로는 글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두 번이나 만나보고 대화도 나눠봤지만.. 역시 감독으로는 잘 모르겠다네?”
감독실격이다. 앞으로 같이 잘 해 보자고 했으면서 이렇게 통수를 친다. 역시 얼굴에 분칠하는 것들은 믿으면 안 된다.
“이유는?”
“자기 말을 못 알아먹는 것 같다네? 작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쓴 작품인데!”
“자기가 연기할 캐릭터는 자기가 제일 잘 아는데 최 감독은 잘 모르는 것 같다고 했어.”
“허 참.. 당황스럽네.”
“오해하지 말고 들어. 내가 최 감독 편인 건 알지?”
또 나왔다. 그 놈의 오해하지 말고 들어.
“알았으니까 빨리 얘기 해.”
“우리 사이에 돌려 말해봤자 시간만 아깝고..”
석 팀장은 입술이 마르는 지 남은 커피를 원샷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차민오가 자기 각본으로 감독 데뷔하고 싶어하는 건 알지?”
“나는 모르지. 지가 말해준 것도 아니고.”
“시나리오만 넘기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