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5.
그 날 동민에게 ‘아빠들’ 시나리오를 받아서 사무실에 온 것까진 기억이 난다. 하지만 바로 조재웅이 내 뒷담화 까는 걸 듣고 시나리오를 어디다 두긴 했는데 거기서부턴 기억이 안 난다. 감독 방 어딘가엔 있겠지 싶어 뒤져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여기엔 없으니 집으로 가지고 간 것 같다.
만약 창한이 ‘아빠들’을 표절했는데 우리 집에 왔다가 ‘아빠들’ 시나리오가 있는 걸 보면 시나리오를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연쇄 살인마라는 증거인지는 모르겠지만 창한이 나에게 처음 보내 준 ‘가족사냥’ 시나리오와 ‘아빠들’을 비교해서 표절이라는 판정이 나면 창한에게 불리하기 때문이다.
우리 집 어딘가에 있을‘아빠들’을 금고라도 사서 잘 숨겨둬야겠다 싶어서 집에 갔는데 집 어디에서도 ‘아빠들’ 시나리오가 보이지 않았다. 실종된 것이다. 혹시나 해서 유정에게 우리 집 어딘가에 있을 시나리오를 치운 적 있냐고 물어봤는데 당연히 아는 바가 없었다.
‘아빠들’을 밀리언 필름에 두고 오진 않았고 그렇다면 우리 집 어딘가에 있을 텐데 아무리 뒤져도 보이질 않았다. 설마.. 창한이 훔쳐갔나? 세미의 매니저 일과 연기 연습을 도와 준다며 우리 집에 자주 들락 날락거렸으니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그렇다면.. 창한이 내가 자신의 표절 사실을 눈치 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얘기다. 어쩌면 ‘아빠들’ 시나리오도 임 감독의 노트북처럼 창한의 집 안에 도어락으로 잠긴 방 안에 있을 지 모른다.
창한이 세미의 연기 연습을 도와주느라 연습실에 가 있는 동안 얼른 창한의 집으로 가서 집 안 구석구석을 뒤져봤지만 그 어디에서도 ‘아빠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내가 뒤지지 못한 곳은 딱 하나. 항상 도어락으로 잠겨 있는 드레스룸이다. 비번은 짐작조차 되지 않았고 혹시나 해서 아무 번호나 입력해봤지만 역시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어쩐지 ‘아빠들’ 시나리오와 임 감독의 노트북이 저 방 안에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도어락 비번을 알 길이 없고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고 이 사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하나 심란한 가운데 뜬금없이 지선에게서 카톡이 왔다.
‘시나리오 읽어 봤어? 어떨 것 같아?’
어떠냐고가 아니라 어떨 것 같냐고 묻는 걸 보니 폭망 감독 따위의 반응은 안 궁금하니까 내가 시나리오를 읽든 말든 관심없고 빨리 제작사나 연결시켜달라는 듯 했다. 처음엔 좋은 말로 둘러대려고 했지만 따끔하게 한 마디 하지 않으면 안 그래도 심난한데 계속 귀찮게 굴 것 같아 이 정도 시나리오로는 제작사 소개는 곤란하다고 딱 잘라서 거절 멘트를 보냈다.
이쯤 했으면 알아 듣고 다신 귀찮게 굴지 않을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한 번 줄까?’ 라고 답이 왔다. 내 촉이 맞았다. 조지선은 제 정신이 아니었다. 아픈 사람이었다. 뭘 주겠다는 건지 짐작은 됐지만 진짜로 줄 것 같진 않았고 받고 싶지도 않았고 내가 조지선의 뜻을 오해했을 수도 있으니 확인 사살이 필요했다.
‘뭘 줘?’
‘나 처녀야.’
그랬구나.. 지선의 상태를 봐선 처녀라는 사실이 그리 놀랍진 않았고 그래서 어쩌라는 건지가 궁금했는데 지금부터는 발언 하나 하나를 조심해야 하므로 어떻게 물어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중 연이어 카톡이 왔다. 한 마디로 자긴 경험이 없는 처녀라서 제작사를 소개시켜 줄 수 있을 정도의 가치는 차고도 넘친다는 것이다.
순간 지선과의 지난 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25년 전에는 어설프지만 풋풋한 로맨틱 코미디였는데 10여년 전 부턴 블랙 코미디로 바뀌더니 급기야 싸이코패스 스릴러로 돌변하기 직전이었다. 내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자 지선도 카톡을 보내지 않았다. 더 이상은 한 마디도 섞고 싶지 않아 차단해 버리려다 그냥 읽씹으로 대응하기로 했다. 언젠가 싸이코패스 스릴러 시나리오 소재가 될 수도 있으니까.
***
‘아빠들’을 찾지 못해 찝찝한 상태로 사무실에 나왔더니 석 팀장은 긴급 회의를 하자며 회의실로 불렀다. 다짜고짜 오라고 하면 내가 가야 되냐? 이유를 말해줘야지! 발끈하려다 좋은 얘기일 수도 있으니 차분하게 이유를 물어보았다. 깽값으로 한 장을 맞춰주겠다고 할 수도 있으니까. 만약 맞춰주겠다고 하면 두 장으로 올릴 생각이다. 아직은 더 버텨야 한다.
‘왜? 벌써 준비됐어?’
‘일단 들어와 봐.’
회의실에 갔더니 석 팀장 혼자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었고 내가 맞은 편에 앉자 정중하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감독님!”
“갑자기 왜 이래? 이런다고 내가 깎아줄 것 같아?”
“지난 번 제안은 없었던 걸로 하고 다시 잘 해 보자.”
“한 장도 아깝다는 거야? 1억이면 요즘 시나리오 시세보다 저렴할텐데?”
“아니. 한 장이든 몇 장이든 없었던 얘기로 하고 그냥 계속 감독 해 달라고.”
“폭망 감독이라 신뢰가 안 간다며? 그리고 이 바닥에 널리고 깔린 게 노는 감독인데..”
“난 폭망 감독이라 신뢰가 안 간다는 말은 한 적이 없고 우리 관계를 생각해서라도 이 정도는 용서해줄 수 있잖아? 나한텐 까방권이 있을텐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래저래 석 팀장에겐 까방권이 있었다. 다만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이유나 알자고 하자 태준이 뺑소니 사고를 당했는데 대안은 없고 대안을 찾지도 않을 것이고 무엇보다 차민오 측에서 최경진 감독을 강력히 원하므로 원래대로 감독 준비를 해 달라는 것이다. 나는 감독 준비를 그만 둔 적이 없으므로 원래대로가 아니라 하던대로 하겠다고 했다.
***
영화판에서 일희일비하는 거 아니다.
태준의 뺑소니 사고 이후 회사에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감독님으로 대접해 주었고 처우도 이전보다 더 극진해졌다. 강 대표도 공손했고 석 팀장은 우리 같은 신생 듣보잡 제작사가 무슨 힘이 있냐며 감독 교체 의견은 차민오 측의 갑질이었다며 이해해달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이해해줄 테니 차민오 측이 정확히 누구를 말하는 거냐고 묻자 날 마음에 안 들어했던 건 차민오가 아니라 백연희 이사라고 했다. 처음부터 차민오의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꼴리는 영화’ 감독의 차기작에 비호감 싸이코패스 연쇄살인마 역으로 출연시킬 수 없다고 했고 자존심이 강한데 자기를 패싱하고 차민오와 직거래를 시도해서 앙심을 품었다는 것이다.
“그럼 우리끼리 백날 얘기해봤자 소용 없는 거잖아. 연희가 또 다른 감독 알아보라고 하면 어쩔건데?”
“걱정 마. 이번에 최경진 감독을 고집한 건 민오니까. 꼭 최경진 너여야만 한대.”
“그래? 못 믿겠는데? 그럴 이유가 없잖아? 나보다 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이 한 둘도 아니고.”
“사주 때문인 것 같아.”
“사주가 뭐 어때서?”
“사주를 중요시하나봐.”
“아.. 그런 거 믿는 스타일인가? 그렇다면야 뭐..”
“민오는 일할 때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면 꼭 사주를 본다고 하더라고.”
얘기를 들어보니 차민오는 사주와 관상 같은 무속 매니아라고 했다. 최경진이 감독이어야 하는 이유는 최경진 감독을 태준으로 교체하려다 태준이 뺑소니라는 벌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짐작컨데 본인이 곧장 ‘가족사냥’의 각본/감독으로 나서면 힘없는 폭망 감독의 작품을 강탈했다는 얘기가 돌 수 있으니 먼저 태준을 내세워서 ‘가족사냥’을 나로부터 강탈한 다음에 자기가 태준으로부터 순조롭게 넘겨 받을 계획이었던 것 같다. 지금이라도 태준이 아니라 다른 감독을 내세워서 넘겨 받으면 되지만 기어이 감독을 교체하려 했다간 다음 차례는 차민오 본인이 될 지도 모른다며 겁을 먹은 것이다.
“그럼 이름은? 그냥 최경진으로 가도 돼?”
“그건 연희에게 물어볼게..”
“됐다. 넌 생각이 없냐?”
“미안하다.”
석 팀장답지 않은 흔쾌히 사과를 하는 걸 보니 다시 감독으로 복귀했다는 실감이 났다. 예상치 못한 이유로 감독 하차 위기에서 벗어났으니 이제 잘 찍는 일만 남은 줄 알았는데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무한수정 지옥이었다.
차민오에게 감독으로 인정 받았으니 시나리오도 내가 원하는 버전으로 진행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전혀 아니었다. 백연희 이사도 달라졌다. 한 번 패싱을 당해서인지 예의도 차리지 않았다. 대놓고 독설을 날렸고 원하는 바를 거리낌 없이 얘기했다. 가장 못 견디겠는 건 주인공은 자살이든 최면이든 뭐든 절대로 살인을 하면 안 된다고 또 다시 수정 요구를 한 것이다. 살인 안 하는 호감형 싸이코패스 연쇄살인마.. 돌고 돌아 다시 원점이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면 백연희라는 걸림돌을 제거하는 수 밖에 없다. 석 팀장에게는 솔직히 얘기했다. 몇 번 해봐서 알겠지만 연희의 요구는 미션 임파서블이다. 석 팀장은 차민오에게 지금 큰 광고 계약이 들어와 있고 한창 조율 단계이므로 연쇄 살인범 이미지가 부담스러울 거라며 군소리 말고 수정해 주라고 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는데 조금만 더 고생하라는 것이다.
차라리 잘 됐다. 창한에게 자살이나 뺑소니를 당하지 않으려면 차민오 캐스팅은 질질 끌다가 무기한 연기되고 ‘가족사냥’이라는 프로젝트는 흐지부지 좌초되어야 한다. ‘살인 안 하는 호감형 싸이코패스 연쇄 살인마’ 수정 이슈를 핑계로 질질 끌어야겠다. 나는 순순히 수정해주겠다고 하지 않고 차민오와 직접 이야기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석 팀장은 이번에도 연희를 패싱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 자기가 연희와 다시 한 번 이야기 해겠다며 기다리라고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석 팀장으로부터 전혀 예상치 못한 통보를 받았다. 그동안 각색하느라 너무 고생이 많았고 당분간 머리를 식히는 게 좋겠다며 이번 ‘살인 안 하는 호감형 싸이코패스 연쇄 살인마’ 각색은 차민오 측에서 진행해보라고 공을 넘겼다는 것이다. 감독 허락도 없이 이런 경우가 어딨냐고 발끈하자 뭐가 됐건 각본/감독 크레딧은 지켜줄테니 걱정말라고 했다.
크레딧이 문제가 아니라 지긋지긋한 각색 작업을 안 해도 되는 건 좋지만 만약 이번 각색 안이 차민오의 마음에 들었다간 바로 작품이 메이드 될 것 같아 덜컥 겁이 났다. 줄곧 뒤에서 훈수만 두다가 처음으로 자기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직접 시나리오에 손을 대는 거니까 완성도가 떨어져도 오케이 할 가능성이 크고 그랬다간 바로 언론에도 차민오의 캐스팅 확정 기사가 날 것이다. 창한에게 시나리오 도둑질을 들키는 건 시간문제다.
역시 영화판에서 일희일비하는 거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