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이 구역에서만큼은 여자가 모텔 비를 보태 준 내가 위너라는 승리감은 오래 가지 않았다.
모텔에서 나오자마자 현자타임과 함께 불안+초조+자괴감이 쓰리 콤보로 밀려왔다. 시나리오를 못 쓰고 연출력이 딸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쳐도 내가 고작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놈이었단 말인가! 원래부터 여배우나 건드리고 다닌 건 아니다. 혈기왕성한 조감독 시절조차 여배우들과는 칼같이 거리를 유지했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밥그릇에 X 담그는 거 아니라는 임 감독의 서슬 퍼런 경고 때문이 아니더라도 나중에 대박 감독이 됐을 때 감당해야 할 리스크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현자타임은 어쩔 수 없어도 불안 초조할 필요까진 없을 것 같았다. 혜나를 믿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냉정히 따져봤을 때 이번 생에 대박 감독이 될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슬픈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밀리언 필름의 ‘구멍가게’로 내 영화 인생이 업그레이드 될 일은 없을 것이고 그게 아니라도 딱히 잃을 건 없을 것 같다는 결론이 나자 자연스레 불안감도 날아가버렸다.
늦은 시간이어서인지 지하철엔 빈자리가 많았다. 맨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핸드폰을 꺼내 보니 새 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림이 떠 있었다. 애널맨 계정으로 온 메일이었다. 열어봤더니 제목은 ‘최경진 감독 직업 바꿔라. 아 짜증난다. 이걸 영화라고 찍었냐?’였고 내용은 없었다. 보낸 이는 ‘naniman’!
난니맨으로부터의 메일이었다. 이로서 ‘nani****’과 ‘naniman’ 그리고 ‘난니맨’은 동일인물임이 확실해졌다. ‘꼴리는 영화’에 달린 ‘nani****’의 관람평인 ‘최경진 감독 직업 바꿔라. 아 짜증난다. 이걸 영화라고 찍었냐?’라는 제목의 메일을 최경진 감독의 이메일이 아니라 애널맨의 이메일로 보냈다는 건 최경진의 부캐가 영화 인플루언서 애널맨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뜻이다.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행여나 들키지 않으려고 나름 신경도 많이 썼는데! 내가 애널맨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간 영화고 뭐고 다 끝장이다. 설마 내가 19금 웹소설 ‘감독 인생 2회차’의 작가 왕복동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으려나? 갑자기 뒷목이 땡기며 눈 앞이 어질어질 현기증이 났다.
난니맨이 왜 이러는 지 원하는 게 뭔지를 모르겠으니 앞으로 무슨 짓을 저지를 지 예측이 되지 않았다. 게임이라면 내가 일방적으로 불리한 게임이었다. 아무런 예고 없이 악플을 남겼듯 아무런 예고 없이 애널맨의 정체가 폭망 감독 최경진이라는 사실을 폭로 할 수도 있는 건데 나에겐 그걸 막을 방법이 없다.
역시 SNS는 인생의 낭비였어. 처음으로 후회가 됐다. 사실 애널맨 활동을 처음부터 열심히 했던 건 아니다. 애널맨 아이디로 임 감독의 흥행 실패작 ‘유언’에 “더 잘 만들었어야죠 감독님. 이러다 유작되겠어요.”라는 관람평을 달고는 한동안 잊고 지냈었다. 하루 빨리 차기작을 만들고픈 마음이 강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 뒤 감독 계약을 조율 중이던 영화사에서 그냥 없었던 일로 하자는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받았다.
당연히 감독 계약이 성사 되는 줄 알고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시나리오를 고치고 또 고치고 있었는데 그저 허탈할 뿐이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영화사에서 뛰쳐 나와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는데 집에 도착할 때까지 장장 4시간이 걸렸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1시간 거리지만 그 날은 그냥 그렇게 걷고 싶었다. 오후 4시에 하차 통보를 받고 집에 도착하니 8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영화를 못 만들면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며 살아야 할까? 영화과에 가지 말라는 부모님 말씀을 들을 걸 그랬나? 아니야. 이건 내 잘못이 아니라 안목이 없는 제작사 잘못이야. 다 망해버려라! 그나저나 감독 계약이 무산됐다는 걸 알면 고소해 할 새끼들이 한 둘이 아닌데.. 다음에 만났을 때 작품 준비는 잘 되어가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둘러대지? 아 짜증나네. 이럴 줄 알았으면 쌍욕이라도 퍼붓고 나올걸.. 어차피 다시 볼 일 없는 사이잖아? 만약 다시 보게 된다면 시사회 정도? 내가 이래서 시사회를 안 간다니까! 아니야. 그래도 너무 안 가면 완전 잊혀질 수 있어. 텐트폴 시사회 정도는 가 줘야 해.. 아니야. 차기작 계약 전엔 가지 말자. 다음 작품 준비 잘 돼가냐고 물어보면 짜증나잖아.
그렇게 부질없고 쓸데없는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는데 아파트 입구에서 걸어 나오던 아기 엄마가 내 눈치를 살피더니 얼른 아이 손을 잡고는 나로부터 멀어져 가는 걸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주절대고 있던 것이다.
하루 아침에 길 바닥에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마음이 아픈 동네 아저씨가 돼버렸다. 아무리 분노와 좌절이 커도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적은 없는데 아무리 자제하려 해도 계속 혼잣말이 튀어 나왔고 이걸 어떡하나 고민 중에 한동안 잊고 지냈던 애널맨이 떠올랐다. 그래 혼잣말을 참을 수 없다면 블로그에 올려버리자!
집에 오자마자 곧장 애널맨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두었던 블로그에 로그인 한 뒤 나를 감독 자리에서 하차시킨 제작사에서 야심차게 개봉한 영화의 악평을 올린 게 진정한 애널맨의 탄생이었다. 임 감독의 유작 ‘유언’에 대한 혹평은 애들 장난 수준이었다. 그렇게 진정성이 담긴 악평을 주기적으로 올리다 보니 슬슬 세상으로부터 반응이 왔다.
팬이 생긴 것이다. 팬 만큼 안티도 많았지만 몇몇 팬들이 잘한다 잘한다 우쭈쭈 해 주니까 그 때부턴 더 신이 나서 시나리오 집필은 접고 남이 만든 영화에 대한 혹평에 전념하다보니 본캐는 폭망 감독이지만 부캐는 영화 인플루언서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애널맨이라는 이름은 누군가 나에게 차기작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똥꼬 주름이라도 핥아줄 수 있다는 간절함에서 나왔고 그 때까지만 해도 애널맨 활동을 이렇게 오래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차기작 개봉과 동시에 애널맨 활동은 접을 생각이었는데 어쩐지 평생 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는 씁쓸한 예감이 들었다.
그나저나 정체가 탄로나지 않게 신중에 신중을 기했는데 난니맨은 어떻게 애널맨의 정체를 알아낸 걸까? 아직 애널맨의 본캐를 폭로하지 않은 걸 보면 자기가 누군지 알아 맞춰 보라는 것 같은데.. 그래! 니가 원하는 게 그거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아내주려고 했지만 단서가 ‘naniman’이라는 아이디 하나 뿐이어서 더 이상의 추적은 불가능했다.
다만 난니맨의 성별은 남자로 추정되었다. 멀쩡한 여자가 난니맨이라는 아이디를 만들 리는 없다. 그렇다면 영화과 동기 조지선과 밀리언 필름 석소연 팀장은 용의자 후보에서 제외다. 남은 건 심동민인데.. 이 변태 같은 새끼.. 아무리 내가 먼저 입봉한 게 배가 아파도 그렇지.. 그래도 심동민이 난니맨이라는 확신은 들지 않았다. 그 정도로 음흉한 놈은 아니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집에 도착할 때쯤 되자 또 다른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싸구려 모텔 방 냄새와 혜나의 여자 냄새가 몸에 배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집 앞 편의점에 가서 소주 한 병을 산 후 온 몸에다 흩뿌렸다. 술 냄새가 금방 확 올라왔다. 오케이. 이 정도면 완전범죄 가능이다.
아내 유정에겐 미안하지만 오늘 밤에 있었던 일은 나 혼자만의 잘못은 아니다. 우리는 섹스리스 10년차다. 공교롭게도 10년 전의 데뷔작 폭망과 동시에 섹스리스가 시작됐지만 꼭 폭망 때문에 이렇게 된 건 아니다. 그냥 언젠가부터 유정과는 하고픈 마음이 들지 않았다. 다행인 건 유정의 마음도 나와 같은 듯 섹스를 요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마지막 섹스가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다.
엄밀히 따지자면 외도가 맞지만 묘하게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외도니 불륜이니 하는 단어들의 무시무시하고 불법적으로 느껴지는 어감에 비해선 자고 일어나면 기억에도 남지 않을 정도로 별 일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나만 조용히 있으면 아무도 모를 일 일테니까.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더니 복도 전체에 아내 유정과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 세미의 고함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편두통을 견디며 도어락 비번을 누르고 조용히 들어갔는데 집 안은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세미는 내가 들어오는 걸 보더니 고개를 홱 돌리고는 인사도 없이 발을 쿵쿵 구르며 자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넌 아빠 왔는데 인사도 안 하니? 그리고 아래 층에서 올라오니까 그렇게 쿵쿵거리지 말랬지!”
유정이 표독스럽게 쏴댔지만 방에 들어간 세미로부턴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세미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아빠 밖에 모르던 딸이었지만 이젠 무서워서 말도 못 붙이겠다. 툭하면 버럭하고 신경질을 내고 차분하게 대화를 시도하면 귀찮다고 짜증을 냈다.
“아무래도 당신네 집 안 유전자가 안 좋은 것 같아. 어머니도 그렇고.. 어두워. 너무 다크해.”
유정이 나직이 읊조렸다.
“어머니 얘기는 하지 말고. 오늘은 왜 저래?”
“학원을 안 다니겠다잖아.”
“중간고사는 잘 봤고?”
“아니.”
“그럼 다녀야지.”
“공부 안 할 거래.”
“공부 안 하면 뭐 할 건데?”
내 질문에 유정이 어이가 없다는 듯 썩소를 지으며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배우.”
“웃기지 말고.”
“웃기는 거 아니고 당신 딸이 배우 하고 싶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감독님?”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아빠가 영화감독이니 행여나 나중에 커서 배우가 되고 싶다고 하면 어떡하나 막연한 우려가 있었는데 현실이 된 것이다. 그나마 감독이 아니어서 다행인가?
“배우라니.. 절대 안 되지.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한국에서 여배우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혹독한 일인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데 다른 사람 딸도 아니고 내 딸이 그 길을 걷는 걸 곱게 놔둘 수는 없다. 그리고 여배우로 성공하려면 신들린 연기력의 소유자거나 적어도 반경 1km안에선 제일 예쁘다는 소문이 나야 하는데 아빠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사랑하는 내 딸 세미는 이도 저도 아니었다.
백번 양보해서 연기력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얼굴은 아빠를 닮은 편이라 예쁘다고 보긴 힘들었다. 만약 세미가 여배우의 길을 걷는 걸 말리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그 누구보다 아빠를 제일 많이 원망하고 증오할 것이다. 이 바닥 뻔히 알면서 왜 그 때 자기를 말리지 않았느냐며.. 안 봐도 비디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