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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nn Oct 23. 2024

내가 지금 남 걱정할 때는 아니지만


섹스는 금방 끝났다.


혜나는 하도 오랜만이어서 어찌할 바 모르고 헤매던 나를 부드럽고 능숙하게 리드해주었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화려한 퍼포먼스를 선사해주었다. 잠시나마 무아지경에 빠졌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혜나는 샤워를 하고 있었다.


폭망이 마냥 나쁜 건 아니다. 만약 ‘꼴리는 영화’가 대박이 났다면 내가 오늘 밤 이 구역의 위너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고맙긴 한데 왜 이렇게 잘 해주지? 진심으로 나를 좋아해서는 아닐 것이다.


내가 모텔비까지 내 주면서 자고 싶을 정도로 잘 생긴 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아무래도 내가 곧 차기작을 찍을 지도 모르는 감독이어서겠지. 내가 감독이 아니라면 동민처럼 거들떠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남 걱정할 때는 아니지만 폭망 감독의 차기작에까지 매달리는 혜나가 안쓰러웠다. 혜나의 영화 인생도 나 만큼이나 기구하다. 내 영화에서 처음으로 수위 높은 노출과 베드신을 선보인 후 다시는 노출 연기를 하지 않겠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19금 영화에 출연했다. 해외영화제에 단골 초청되는 모 예술영화 감독의 영화였는데 혜나의 노출 투혼에도 불구하고 해외 영화제 진출과 흥행에 실패했고 그 때부터 혜나의 필모그래피도 꼬이기 시작했다.


혜나는 내 영화에서는 베드신이 처음이어서인지 소극적이고 다소 뻣뻣한 느낌이 있었지만 그 영화에서는 실제 정사 논란이 벌어졌을 정도로 아주 혼신의 열연을 펼쳤다. 다 지난 일이 됐지만 내 영화에서도 저런 열연을 펼쳐줬다면 그렇게 폭망하진 않았을 것이고 적어도 ‘꼴리는 영화’ 제작자였던 방 대표에게 감독실격이라고 욕을 먹진 않았을 것 같아 조금 서운했다.


당시 방 대표는 촬영이 끝나고 첫 가편집본을 보고는 내가 여배우들을 제대로 벗기지 못했고 베드신도 시원찮다며 ‘감독실격’이라고 욕을 퍼부었다. 억울했다. 에로영화를 찍자고 한 것도 아니면서 여배우를 못 벗겼다고 감독실격이라니..


“영화는 이제 안 할 거에요?”


샤워를 하고 나온 혜나에게 물었다.


“벗는 역만 들어와서요. 내가 에로 배우는 아니잖아요? 감독님이 책임 지시든가요.”


내가 왜? 내 영화에서만 벗은 것도 아니면서?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넘어 왔으나 꾹 참아 넘겼다. 이제와 그게 뭐가 중요한가. 지금 중요한 건 혜나가 모텔 비까지 보태 주면서 나와 함께 있어주었다는 것이다. 정말 고맙긴 한데 과거 혜나에게 느꼈던 서운함이 떠올라서인지 모텔 비를 보태 준 고마움은 서서히 희미해졌다.


“근데 내가 아무리 잘 생겨도 그렇지 왜 이렇게 잘 해주는 거에요?”


내 차기작 출연을 노리고 있을 게 뻔하지만 모르는 척 물어봐주었다.


“잘 생긴 것도 있지만ㅋㅋ 감독님한테 잘 해준 거 없어요. 제가 하고 싶어서 한 거에요.”

“거짓말. 그리고 이건 변명은 아니고 오늘은 내가 정말 너무 오랜만이어서.. 요즘 스트레스도 많았고.. 아무튼 시원찮아서 미안해요. 이해해주세요.”

“에이.. 진짜 좋았다니까요! 그리고 아까 혼자 남은 감독님이 너무 슬퍼보였어요. 그래서 뭐라도 해 드리고 싶었어요.”

“고마워요 정말.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고 반드시 갚아줄게요.”

“은혜라뇨! 깔깔깔. 감독님 개그맨이에요?”


웃는 여자는 다 예쁘다고 했던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물개 박수까지 쳐 가며 깔깔 웃어주는 혜나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 보였다. 그리고 은혜를 갚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강 대표가 제안한 19금 영화 ‘구멍가게’를 만들 수 있게 될 진 모르겠지만 메이드만 된다면 무조건 출연시켜주고 싶었다. 본인이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고마우면 책임지시라니까요?”

“그래요. 약속할게요. 조만간 캐스팅 고 나오면 연락드릴게요.”

“정말요? 감독님 최고! 그리고요?”

“그리고라니?”

“출연시켜주면 끝이에요?”

“그럼 뭐가 더 필요한데요?”

“그걸 제 입으로 말할 순 없죠.”


설마 사랑? 아니면 결혼? 에이.. 결혼 상대로는 아니겠지? 우리가 몇 번이나 봤다고..


혜나는 쉴 틈 없이 떨고 있는 핸드폰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는지 핸드폰을 두 손으로 들고 분주히 손가락을 놀리고 있었다. 내가 옆에 있는데도 편히 누워 핸드폰에 몰입해 있는 걸 보니 결혼 상대로는 아니고 사랑일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뭘까? 추리 중에 문득 동민이 혜나에게 선사한 꽃다발을 카페에 두고 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불쌍한 동민이.. 잔뜩 용기내서 꽃다발을 선물한 여배우가 나랑 침대에서 뒹굴고 있을 줄은 상상조차 못하겠지.


“아유 이 똥파리들.. 안 간다고 하는데도 계속 오라고 난리네요.”

“뒷풀이?”

“네. 다들 나 올때까지 집에 안 가고 기다린다고 하네요.”

“그런데 동민이랑은 무슨 사이에요?”


혜나와 동민은 내 데뷔작 ‘꼴리는 영화’의 쫑 파티 때 처음 알게 된 사이고 당시 독립영화 연출을 준비 중이던 동민이 혜나에게 여자 주인공으로 출연해달라고 부탁하며 친해진 걸로 알고 있다. 이후 동민의 주장에 의하면 준비 중이던 독립영화가 엎어지기 전까지 반 년 정도 썸을 타다가 동민이 약속했던 독립영화 주인공도 안 시켜주고 자신 있다던 시나리오 공모전에도 계속 떨어지자 사이가 소원해졌다고 했다.


“아무 사이 아니죠. 그래도 동민 오빠에겐 오늘 일 비밀로 해 주세요. 상처 주고 싶진 않으니까.”


이제야 내가 혜나의 공연을 보러 오겠다고 했을때 동민이 반기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동민은 아직 혜나에게 미련이 있는 것이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눈치 없이 끼어 든 셈이고 설상가상 혜나가 나만 바라보고 동민을 투명 인간 취급하자 영혼의 상처를 입고 먼저 집에 가버린 것이다.


문득 혜나와 동민은 어디까지 간 사이인지 궁금해졌다.


“동민이랑은 가볍게 썸만 탄 거죠?”

“썸이요? 누가 그래요? 동민 오빠가?”


아이고야.. 썸도 아니었구나. 손도 못 잡아본 듯한 분위기다. 정확히 어디까지 갔는지 더 노골적으로 물어볼까 고민하는 와중에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동민에게 전화가 왔다.


“동민이한테 전화 왔는데 받을까요?”

“감독님 마음대로 하세요. 저랑 있다는 말은 하지 마시고요.”


나는 자다가 깬 척 졸린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디야?”

“집.”

“…”


동민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아마도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내 주변의 소리와 분위기를 살피는 듯 했다. 설마 내가 혜나와 함께 있는 걸 눈치 챈 건 아니겠지?


“왜 말이 없어? 자고 있는 사람 깨워 놓고.”


분명 내가 혜나와 함께 있는지 궁금해서 전화를 건 것 같은데 자기가 생각해도 쪽 팔렸는지 대놓고 물어보진 않았다. 다행히 수화기 너머로 별 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내가 집에서 자고 있었다고 생각한 듯 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을 수도 있고.


“내일 임 감독님 장례식장 몇시에 갈 건지 물어보려고? 시간 맞으면 같이 가자.”

“자고 일어나면 전화할게. 오후에 갈 예정. 넌?”

“아침부터 계속 있을 거야. 오면 전화해.”

“오늘도 갔다며 내일 또 가?”

“응.”


의리 있는 놈일세?


“아 맞다. 감독님은 왜 돌아가셨어?”

“자살이래.”

“아.. 아니.. 왜.. 알았다. 내일 얘기하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임 감독님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니..


영화가 망하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익히 알고 있는 입장에선 어쩐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데뷔와 동시에 폭망한 나 보다는 잘 나가가다 추락한 임 감독이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혜나는 내가 동민과 통화하고 있는 사이에 먼저 일어나 옷을 챙겨 입고는 내가 전화를 끊자마자 아무래도 뒷풀이 자리에 가봐야 할 것 같다며 나가려고 했다. 감독님 미팅 있다고 나왔는데 계속 연락이 안 되면 이상한 생각을 할 게 분명하고 캐스팅을 목적으로 감독에게 몸 로비를 한다는 등의 안 좋은 소문이 날 수 있다는 거다.


갑자기 귀가 간지러웠다. 아까 나에게 명함을 주고 간 캐스팅 디렉터는 내가 ‘꼴리는 영화’의 감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 자칫 잘못하다간 내가 혜나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 날 수도 있다.


“먼저 나가볼게요. 감독님.”

“그래요.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요.”

“우리 앞으론 자주 보는 거죠?”

“당연하죠. 멀리 안 나갈테니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그나저나 혜나는 남자 친구가 없나? 없을 리가. 남자 친구까진 모르겠지만 혜나를 쫓아다니는 남자는 한 둘이 아닐 것이다. 저런 마스크와 몸매를 주변 남자들이 놔둘리가 없다. 연극이 돈이 될 리는 없고 딱히 돈 나올 구석이 없는데도 럭셔리하게 꾸미고 다니는 걸 보면 부자집 딸이거나 부자 남자 친구가 있는 게 분명하다.


확실한 건 나는 원래 돈이 많은 감독은 아니라는 사실. 차기작이 대박나기 전에는 혜나를 책임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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