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나의 정수리에선 달콤한 향기가 풍겨왔다.
“아 되죠. 당연히 되죠. 자 여기 누추하지만 제 어깨 대령입니다.”
음.. 너무 아재 개그스러웠나? 완전 늙다리 옛날 사람 취급하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혜나는 취해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겠는지 머리의 무게 중심을 완전히 내 어깨로 옮겨왔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꼴랑 생맥주 500cc 한 잔에 이렇게 취한다고? 어쩐지 취한 척 하는 것 같은데? 굳이 내 앞에서 취한 척을 한다는 건..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정신 차려라. 폭망 감독과 삼류 여배우의 조합은 아무리 생각해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무엇보다 나는 이런 허름한 호프집에서 하소연이나 듣고 있을 분이 아니다. 사람 일 모른다고 이번에 밀리언 필름에서 연출 제안을 받은 ‘구멍가게’가 대박 날 수도 있는 것이다.
“감독님은 참 좋은 분 같으세요. 감독님 같은 분이 잘 되면 좋겠는데 왜 이 세상은 양아치 같은 나쁜 놈들만 잘 되는 걸까요? 너무 이상해요.”
“꼭 그렇지도 않아요. 그런 놈들은 잠깐은 잘 될 수 있어도 오래는 못 가더라고.”
사실이다. 메뚜기도 한 철이더라.
“그럼 다행이고요. 꼭 그랬으면 좋겠다.”
그린라이트가 아닌 줄 알았는데 그린라이트인가? 잠깐이나마 두근두근 설레는 와중에도 혜나의 핸드폰은 온갖 알림과 진동이 쉴 틈 없이 뜨고 울려댔다.
“동료들이 애타게 찾는 것 같은데 안 가봐도 돼요?”
“네. 이딴 거 다 필요 없어요. 감독님만 옆에 계셔주면 돼요. 이렇게.”
그린라이트가 확실했다. 내 어깨에 기댄 채 나만 있으면 된다고 속삭이는데 이보다 더 확실한 그린라이트는 있을 수 없다. 내가 이겼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애타게 혜나를 찾는 저 수많은 남자들에게 승리한 것이다.
그린라이트인 건 알겠는데 다음엔 뭘 어떻게 하는 거지? 어디 가서 잠깐 쉬었다 가자고 하면 되나? 아니야.. 너무 식상하고 노골적인 멘트여서 그린라이트가 꺼질 수도 있겠어. 그렇다고 사랑한다고 할 수도 없고.. 아니면 오늘 밤 너와 함께 있고 싶다? 이것도 아닌 것 같아. 아 너무 어렵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구나.
이왕 그린라이트를 켜 주셨으니 다음 단계까지도 리드해주면 좋겠는데.. 아니지. 혜나가 아무리 걸크러시 쎈 캐여도 어디까지나 한 명의 여자일 뿐이야. 여자로서 자존심이 있는데 다음 단계로 넘어가자는 말을 꺼내게 하는 건 남자로서 예의가 아닐 거야. 지금부턴 남자답게 내가 리드하는 게 맞아. 우리는 감독과 배우이기 이전에 남자와 여자니까.
하지만 만약 이 모든 게 날 엿 먹이려는 음모라면? 나에게 억하심정이 있을 수도 있잖아? 음.. 그건 아닌 것 같고.. 혹시 몰래 카메라? 요즘 유튜브에 몰래 카메라 채널 많잖아? 혜나 정도 되는 배우의 인맥이면 충분히 그런 채널 운영자들이 하나 둘쯤 있을 수 있다. 게다가 상대가 폭망 감독이니 몰래 카메라 상대로는 이보다 만만할 수 없을 것이다.
연극 공연장에서부터 카페 그리고 술집까지 이 모든 게 몰래 카메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며 소름이 돋았다. 혹시나 해서 얼른 호프집 구석 구석을 살펴봤지만 카메라 처럼 생긴 건 발견할 수 없었다. 다행히 몰래 카메라는 아닌 것 같았다.
슬슬 이 상황이 부담스러워졌다. 몰래 카메라가 아니라 해도 혜나와 단 둘이 술집에 앉아 있는 모습을 업계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진 않았다. 이 동네엔 업계 사람들이 은근히 많은데 차기작도 못 찍고 10년째 놀고 있는 주제에 3류 여배우와 어울린다는 소문이 날까봐서다. 다행히 우리는 벽 쪽을 향해 앉아 있고 혜나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두툼한 패딩으로 온 몸을 두르고 모자까지 깊숙이 눌러쓰고 있어서 언뜻 봐선 누군지 알아보기 힘들 것이다.
몰래 카메라가 아니라면 그린 라이튼데.. 설령 그린 라이트라 하더라도 혜나를 믿어도 되는 걸까? 자칫 잘못 리드했다간.. 아.. 진짜 모르겠다. 내가 어쩔 줄을 모르고 머뭇거리고만 있자 혜나는 답답했는지 그만 가봐야 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아무래도 가봐야겠어요 감독님.”
그래 차라리 잘 됐다. 이대로 혜나와 헤어지는 건 너무나 아쉬웠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혜나는 취기가 올랐는지 얼굴이 벌게져 있었다.
“오늘은 진짜 진짜 반가웠어요. 공연 보러 와 주신 것도 정말 감사하고요.”
“저도 그래요.”
“감독님 안녕!”
취했는 줄 알았는데 호프집을 나서는 씩씩한 뒷모습을 보니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어째 취한 척 하면서 내 마음을 떠 본 것 같았다. 내가 그리 간절해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지. 혜나는 가게에서 나가는 문 앞에서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며 찡긋 윙크를 날려주었고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오늘 따라 맥주가 썼다. 설상가상 옆 테이블에 앉아 있는 남자들의 시선도 거슬렸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라며 비웃는 것 같았다. 혜나의 빈자리를 감당할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 내 옆자리에 혜나가 앉아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냥 초저녁부터 나 혼자 공연보고 커피마시고 혼술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내가 뭘 기대했던 거지? 이 무슨 허망한 설레임이란 말인가. 폭망 감독에게 그런 판타지 같은 일이 벌어질 리 없다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지 않았던가! 빨리 집에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처 자야지. 역시 이불 속이 최고다.
김 빠진 맥주를 마지막 한 방울 까지 털어 마시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운터에서 계산을 마치고 바로 가게에서 나가려다 그래도 미련이 남았는지 혹시 두고 간 게 없나 다시 자리를 확인 후 가게 문을 나섰는데 멀리서 혜나가 가게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왜요? 뭐 두고 갔어요?”
“네 감독님. 헉헉.”
혜나는 가쁜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래요? 나올 때 보니까 혜나씨 자리엔 아무 것도 없던데? 화장실에 떨어뜨린 거 아냐?”
“아니에요.”
“알았어요. 내가 들어가서 다시 한 번 확인해볼게요. 잠깐만요.”
“안 그러셔도 돼요.”
뭐래는 거야? 왜 횡설수설하지?
“뭐 두고 갔다면서요?”
“감독님요.”
“네?”
“감독님을 두고 갔다고요.”
혜나는 베시시 웃으며 내 품에 쏙 안겨왔다.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여서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역대급 반전이었다.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었다. 19금 웹소설도 이렇게 쓰면 개연성 없다고 욕을 먹을 것 같은데 ‘감독인생 2회차’ 다음 화에서 시험해 봐야겠다. 신입 여자 피디를 사랑하지만 삼류 여배우의 육탄 돌격에 속수무책 허물어지는.. 그런데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나 어디 안 가니까 살살 안아줘도 돼요. 그리고 내가 가면 어딜 간다고 이렇게 달려와요. 넘어지면 어쩌려고..”
“우리.. 갈래요?”
“어.. 어디를?”
“에이~ 왜 이러세요? 감독님 나 못 믿어요?”
“미.. 믿지. 믿어요. 안 믿을 이유가 없잖아요.”
“그럼 가요 우리.”
“어딜 가요?”
“감독님 못됐다 진짜! 아시면서..”
혜나가 예쁘게 눈을 흘기며 내 볼을 꼬집었고 그제야 꿈이 아니라 생시라는 실감이 났다. 오늘은 10년 전 ‘꼴리는 영화’의 폭망 이후 최고로 운수 좋은 날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호프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모텔로 직행했다. 누가 볼까 주변을 둘러봤지만 불경기 탓인지 거리에선 개미 한 마리 찾아 볼 수 없었다.
모텔 안으로 들어간 후 모텔비를 내려고 지갑 속 카드를 꺼내려다 현금 결제가 카드보다 만 원 더 저렴하다고 적혀 있어서 현금으로 계산하려 했는데 요즘 누가 현금을 갖고 다니나. 당황스럽게도 만 원 모자랐다. 아깝지만 다시 카드를 꺼내려는데 혜나가 슬그머니 만원짜리 한 장을 건넸다.
“한 푼이라도 아끼셔야죠.”
“이렇게 고마울 수가.. 아니 내가 그렇게 좋아요?”
“네. 감독님 잘 생겼잖아요!”
“얼만큼 잘 생겼는데요? 배우 해도 될 정도?”
“푸훗.. 감독님 재밌는 분이셨네요?”
혜나가 깔깔대며 웃어주었고 덕분에 밀리언 필름에서 바닥 뚫고 지하실까지 추락했던 자존감이 하늘 끝까지 치솟았다. 적어도 오늘 밤 이 구역에서만큼은 여자가 모텔 비를 보태 준 내가 위너다.
내가 이겼다 이 새끼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