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Zinn Oct 18. 2024

그린 라이트 일지도 모른다는 나 혼자만의 착각


혜나와 내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투명인간처럼 소외되어 있던 동민은 혜나가 내 옆자리에 앉고 나서야 수줍은 듯 꽃다발을 전달했다. 혜나는 꽃다발을 받고는 그제야 동민에게 아는 척을 했다. 


“어머 동민 감독님도 계셨네요! 와주셔서 감사해요!” 


혜나는 참 착하다. 예전부터 감독 지망생에 불과한 동민을 꼬박 꼬박 감독님이라고 불러주었다. 하지만 17년차 감독 호소인 동민에 대한 관심은 거기까지. 


기성 감독인 나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시냐고 묻길래 별 거 아니라는듯 차기작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하자 아예 내 쪽으로 몸을 돌려 앉고는 제작사는 어디인지 캐스팅은 어떤지 투자는 어디까지 진행됐는 지 등등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동민은 순식간에 쩌리짱이 되어 버렸다. 동민에게 미안해서 화제를 돌리려 애를 썼지만 잠깐 뿐이었다.


“두 사람은 자주 보는 사이에요?” 

“아니요! 전혀요. 따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나 말고 동민에게도 말을 걸어줬으면 하는 마음이었으나 혜나는 강한 부정으로 화답했고 동민은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묵묵히 커피 잔만 기울였다. 동민은 얼굴에 감정이 다 드러나는 스타일이다. 어느 새 상처받은 어린 양이 되어 있었다. 이런 심약한 놈이 난니맨 같은 음흉한 짓을 저지를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혜나는 이 자리에서 아예 출연 약속을 받아내려는 듯 계속해서 차기작 관련 질문을 퍼부어댔고 동민은 줄곧 침묵을 지켰다. 비록 19금 저예산 영화지만 그래도 차기작이 예정되어 있다는 게 이렇게 큰 힘이 될 줄은 몰랐다. 강 대표와 석 팀장이 조금은 고마웠다. 4시간 가까이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난 먼저 일어나볼게. 두 분은 마저 이야기 나누시고..”


동민은 더 이상 소외감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급한 일이 생겼다며 일어나려 했고 혜나는 기다렸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빨리 가 보시라고 했다. 붙잡는 시늉조차 없었다. 동민이 쓸쓸히 홀로 떠나고 둘만 남자 혜나는 내 커피 잔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어머! 감독님 벌써 다 드셨네.. 더 드실래요? 시간이 늦었지만 에스프레소?”


기억하고 있었구나. 


난 ‘꼴리는 영화’ 촬영 시절 꼴에 감독이랍시고 언제나 에스프레소만 고집했다. 카메라 뒤의 감독 의자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있으면 진짜 감독이 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걸 아직까지 기억해 준 혜나가 고마웠다. 내가 마실 에스프레소이니 내가 사려고 했는데 혜나는 굳이 자기가 사겠다며 카운터로 가서 냉큼 주문을 하고 왔다. 기특했다.


“인사가 늦었네요. 공연 정말 잘 봤어요. 진작에 봤어야 하는 건데..”

“에이.. 감독님은 작품 준비하느라 바쁘셨잖아요.”

“영화보다 연극이 더 잘 맞으세요?”

“그건 아니고요. 영화는 더 이상 불러주는 데도 없고요.. 집에서 놀면 뭐하나.. 감 잃지 않으려고 하는 거에요.”

“그러셨구나. 그런데 혜나씨가 그렇게 의식 있는 배우인줄 몰랐어요. 언제부터 이런 사회 문제에 관심을..”

“아니에요. 전 그런 거 잘 몰라요. 투표도 한 번도 안 해봤고요. 이건 그냥 주연 시켜준다고 해서 하는 거에요.”


그럼 그렇지. 역시나 였다. 그런데 투표를 어떻게 한 번도 안 해볼 수가 있지?


“솔직히 감독님한테 서운했어요. 저한테는 시나리오도 안 주시고..”


5년 전 얘기 같았다. 당시 캐스팅을 진행 중이었고 투자사에서 오케이 할 만 한 배우들에게 모조리 까인 뒤 우울해 하고 있었는데 ‘감독님이 캐스팅고를 돌리고 있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인가요?’라고 혜나에게 카톡이 왔다. 캐스팅이 안 돼서 환장하겠는데 이런 징징거림까지 상대해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고 뭐라 답해야 할 지도 모르겠어서 그냥 읽고 씹어버렸는데 그 얘기를 하는 듯 했다.


“미안해요. 변명이 아니고 그 땐 캐스팅이 안 돼서 엎어지기 직전이었거든요. 저야 당연히 혜나씨와 함께 하고 싶었죠.”

“그러셨구나.. 그러실 것 같았어요. 저는 감독님을 믿으니까요. 우리는 한 편 같이 한 사이잖아요? 그리고 그 동안 저도 여기저기서 감독님 얘기 많이 들었어요.”


좋은 얘기를 들었을 리가 없어 무슨 얘기를 들었냐고 묻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잠자코 있자 혜나는 다시 내 차기작 얘기로 돌아왔다.


“캐스팅은 다 확정인가요?”

“당연히 아니죠. 시나리오도 아직 수정 중이에요. 저야 할 수만 있다면 당연히 혜나씨와 하고 싶고요.”


나도 모르게 거짓말이 술술 흘러 나와서 놀랐다.


“말씀 만이라도 정말 감사해요! 그런데 영화사 이름이 뭐라고 하셨죠?”

“밀리언 필름이라고.. 잘 모르실 거에요. 신생이라서. 돈은 많다는데..”

“그러면 이번엔 꼭 불러주시는 걸로 알고 있어도 되는 건가요?”


혹시나 밀리언 필름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나중에라도 내가 뻥친 게 들통 나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혜나는 내가 어느 회사에서 뭘 하고 있는 지엔 별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본인이 출연할 만한 배역이 있는지 내가 캐스팅 시켜줄 지 여부에만 관심이 있었다. 


캐스팅 이외의 것들엔 관심을 가질 만한 여유가 전혀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게 혜나의 핸드폰에선 끊임없이 카톡과 전화벨이 울려댔기 때문이다. 혜나의 시선은 핸드폰에 고정되어 있었고 나와의 대화 와중에도 답톡을 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게 다 내가 폭망 감독이어서다. 유명 감독과 미팅 중이었다면 핸드폰이 테이블 위로 올라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니다. 감독님 말씀 중에 방해 될까 봐 아예 꺼놨겠지. 이럴 거면 뭐하러 카페로 온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냥 동민과 둘이서 폭망 감독이 낫네 감독 지망생이 낫네를 화두로 서로 디스하며 농담 따먹기나 하는 편이 훨씬 즐거웠을 것이다. 


소외감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집에 가 버린 동민이 슬슬 그리워졌고 미안해졌다. 친구를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밀리언 필름에서의 3시간 넘는 기다림에 이어 3류 배우 혜나에게까지 듣보잡 취급을 당하고 나자 빨리 집에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처 자고 싶어졌다.


“공연 뒷풀이는 안 가보셔도 되겠어요? 제가 시간을 너무 많이 뺏은 것 같은데.”


다시 볼 사이 같지는 않지만 어색하게 자리를 마무리 짓고 싶진 않아서 대충 마무리 하자고 알아듣게 얘기했지만 혜나는 알아들은 것 같지 않았다.


“아니에요 감독님. 전 진짜 뒷풀이 싫어하는데 자꾸 오라고 귀찮게 굴어서요. 지금 거절 톡 보내는 중이에요.”


그들 마음은 내가 누구보다 잘 안다. 혜나가 술자리에 빠지면 흥이 나질 않을 것이다. 말 그대로 희망 없는 술자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다 지하철 끊길 시간이 임박했을 때 헤어지면 혜나에게 택시 비를 챙겨줘야 하는 불상사가 벌어질 수 있다. 최대한 빨리 일어나야 한다.


“같이 공연한 배우들이 제가 감독님이랑 있다고 하니까 모시고 오라고 난리도 아니네요.”

“제가 오늘은 몸이 좀 안 좋아서요. 낮에 회사에서 마라톤 회의를 했더니..”


우려 했던 사태가 벌어지려 했다. 내가 이래서 지인 공연은 최대한 꺼리는 편이다. 괜히 그런 자리에 따라갔다간 감독이랍시고 지갑이나 털릴 게 뻔하다. 감독 가오가 있지 얻어 마실 수도 없고.


“그러면요 감독님.. 저 그 자리엔 너무 가기 싫은데 오늘 따라 술은 마시고 싶거든요? 요즘 속상한 일이 있어서 상의 드리고 싶기도 하고요.. 저 술 마실 때 그냥 옆에 계셔 주시면 안 될까요?”

“되죠!”


당연히 된다. 아무리 택시 비가 아까워도 힘들어하는 동료를 모른 척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동시에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졌다. 술 마실 때 옆에 있어만 달라는 게 그린 라이트인지 아니면 단순히 혼자 술 마시기 싫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차기작 캐스팅 확답을 받아내려는 건지 도무지 짐작이 되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린 라이트 일지도 모른다는 촉이 왔다.



***



혜나가 안내한 술집은 대학로 구석에 위치한 조그만 호프집이었다. 


여배우와의 1:1 술자리는 오랜만이라 긴장이 됐다. 혜나는 속상한 일이 있다더니 시시껄렁한 연예계 가십만 떠들어댔다. 내 머리 속은 여전히 혜나의 진심을 파악하기 위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혜나의 대사 한 마디 몸짓 하나하나마다 유심히 관찰하며 언제 켜질 지 모르는 그린 라이트를 캐치하려 했으나 켜진 건지 아닌지 여전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냥 솔직히 까놓고 서로 원하는 걸 이야기 해 보자고 할까?


못한다. 나는 그런 캐릭터가 아니다. 지금까지 줄곧 착한 감독 코스프레를 해 왔는데 갑자기 양아치처럼 굴면 캐릭터 붕괴다. 처음부터 양아치 감독 컨셉이었다면 솔직히 까놓고 이야기 하자는 얘기가 한결 쉬웠을텐데 후회막심이었다. 그런데 굳이 캐릭터 붕괴를 걱정할 필요가 있나? 폭망 감독 주제에 잃을 것도 없잖아? 


그리고 어쩌면 혜나는 내가 감독답게 디렉션을 주길 기다리고 있는 걸 수도 있다. 그래 원하는 게 그거라면 감독답게 확실한 디렉션을 주도록 하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혜나의 하소연이 한 템포 쉬어갈 때쯤 오늘 밤 연기에 대한 디렉션을 주려고 했는데 뜬금없이 어느 양아치 같은 매니저 지망생에게 험한 꼴을 당한 에피소드가 튀어 나오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아는 언니가 매니저라고 소개시켜줘서 만났는데 술자리에서 은근 슬쩍 허벅지를 쓰다듬어서 사과를 요구했더니 자긴 그런 기억이 없는데 왜 생사람 잡냐고 되려 화를 냈다는 것이다.


“양아치네. 경찰에 신고하셨어요?”

“아니요. 그냥 똥 밟은 셈 쳤어요. 진짜 똥파리 같은 것들.. 귀찮아 죽겠어요. 저한텐 왜 파리만 꼬일까요?”

“일 얘기를 핑계로 불러내서 허튼 수작을 부린 거잖아요? 진짜 쓰레기네. 그런 것들은 콩밥을 먹어야 하는데.”

“맞아요 감독님. 어이가 없는게 똥파리들 걸러 줄 사람이 필요해서 만난 사람이 똥파리였다니까요? 미쳐버리겠어요 진짜. 제가 이 바닥이랑 안 맞는 걸까요?” 


타이밍을 놓쳐서 다행이었다. 괜히 본전도 못 찾고 똥파리들과 같은 부류로 묶일 뻔 했다. 나에게 마음이 있는 건지 아닌지 알 수가 없어서 우유부단하길 잘 했다. 진짜 천만 다행이다. 하마터면 두고 두고 양아치 감독으로 뒷담화를 까일 뻔 했다. 비록 지금은 폭망 감독이지만 다다음 작품에선 대박 감독으로 거듭날 수도 있는데 괜한 오점을 남기지 말자.


그냥 폭망 감독으로도 충분하다. 양아치 폭망 감독으로 누군가의 기억에 남고 싶진 않다. 술 마실 때 옆에 있어 달라는 의미를 확대 해석하지 말자. 공연에 초대해준 건 말 그대로 공연을 보러 오라는 초대 일 뿐이다. 폭망 감독에게 공연 초대를 핑계로 한 그린라이트 같은 건 켜지지 않는다.


“잠깐 화장실 좀요.”


빨리 집에 가고 싶은데 마침 혜나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혜나가 자리로 돌아오면 바로 나가려고 카운터에 가서 계산까지 마치고 왔는데 잠시 후 생각보다 빨리 화장실에서 돌아온 혜나는 비틀거리며 내 옆 자리로 옮겨 앉더니 어깨에 천천히 머리를 기대었다.


“감독님! 저 잠깐 여기 있어도 되죠? 좀 기대고 싶어서요.”


이전 12화 여전히 근사한 자본 친화적인 몸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