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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nn Oct 14. 2024

영화 리뷰를 꾸준히 올린다고 여자들이 좋아해줄까?


내가 흔쾌히 19금 영화 ‘구멍가게’의 연출 제안을 수락하지 않고 밍기적거리자 강 대표는 다시 한 번 실실 쪼개면서 말을 이었다. 


“감독님은 별로 간절하지가 않으신 것 같아요. 다음 작품 안 하실 거에요?” 

“그게 아니고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19금으로 데뷔했다가 폭망하고 10년째 놀고 있다 보니 또 19금을 만들 엄두가 안 나네요.”


강 대표가 영화 경력은 전무하지만 그래도 영화사 대표다. 행여나 계약금을 환불하라는 얘기가 나올까봐 최대한 예의를 갖춰서 거절했다.


“에이.. 소심하시긴! 그런 이유라면 크레딧에는 예명을 올리면 되잖아요? 그리고 이건 지금 할 얘기는 아니지만 ‘구멍가게’는 감독님이 해 주신다고만 하면 전적으로 감독님에게 맡길게요. 시나리오가 마음에 안 들면 감독님 원하는 대로 고치시고요 캐스팅도 유리아가 마음에 안 들면 감독님 마음에 드는 배우를 데려오세요. 무명도 괜찮고 솔직히 몸매만 되면 오케이니까요. 얼굴까지 예쁘면 최고고요. 연기까진 바라지도 않아요.” 


대놓고 떡 영화 감독 취급이라 듣고 있기가 불편했다. 연기가 안 되는 배우도 몸매만 되면 오케이라는 말부터는 도저히 못 들어주겠어서 대충 마무리 짓고 집에 가려는데 강 대표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감독 방도 쓰세요. 진행비로 쓰실 법카도 드릴 거고요.”

“감독 방이라면 이현철 감독이 쓰던 방 말씀이신가요?” 

“네. 이 감독님 작품은 당분간 홀딩하기로 했어요. 영화 한 편 만들기 쉽지 않네요. 허허.” 

“법카도요?”

“네. 당연하죠. 감독님이신데.”


감독 방에 법카까지 제공하겠다고?


떡 영화로 데뷔와 동시에 폭망 후 10년만의 차기작도 떡 영화라는 전개는 너무 식상하지만 감독 방과 법카라면 얘기가 다르다. 보통 저예산 떡 영화 감독에게 진행비 법카를 챙겨주진 않는다. 감독 방도 마찬가지고. 무엇보다 출근을 하게 되면 양서연 피디도 더 자주 볼 수 있게 된다. 자주 보면 정들고 그러다 보면 썸이라는 걸 타게 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면 생각해 보시고 말씀해주세요 감독님. 저는 저녁 약속이 있어서..”

“대표님 잠깐만요!”

“네?”

“제목이 꼭 ‘구멍가게’여야 하나요?”

“아 제목요? 더 좋은 제목 있으면 알려주세요. 저는 얼마든지 열려있습니다. 하하. 그럼 이만!”


제목이 ‘구멍가게’가 아니고 감독 크레딧에 내 본명을 올리지 않아도 되고 감독 방에 법카까지 준다고 한다. 나쁘지 않은데? 4시간 가까이 기다렸는데 저녁도 안 사주고 집에 보낸다는 게 불쾌했지만 감독방과 법카 때문에 용서해주기로 했다. 저녁이야 내 절박한 심정을 아는 석 팀장이 사주겠지.


강 대표를 먼저 보내고 천천히 밖으로 나와보니 석 팀장은 퇴근했는지 자리가 비어 있었다. 기획팀 피디들은 내가 대표 방에서 나오든 말든 다들 컴퓨터 모니터에 시선 고정이었다. 너무 바빠 보여 말 걸기도 애매했고 누구에게 인사를 해야 할 지도 모르겠어서 대충 인사를 하는둥 마는둥하고 밀리언 필름에서 나왔다. 영화과 5년 후배 감독 장태준은 강 대표 포함 전 직원이 엘리베이터 앞까지 나와서 배웅을 해줬던 게 떠올랐다. 


쪼잔하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내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래도 소득이 없진 않았다. 눈 딱 감고 감독 제안을 수락하면 감독 방과 법카가 생긴다! 엘리베이터가 올 때까지 ‘구멍가게’보다 더 좋은 제목을 고민하고 있는데 사무실 문이 스르륵 열리더니 서연이 따라 나왔다. 


“감독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네 피디님. 오늘 커피 고마웠어요. 그럼 또 뵙겠습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해서 타고 내려 가려는데 서연은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열림버튼을 누른 채 물었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잖아요 감독님.. 아까 감독님이 받으신 ‘공소시효’ 모니터는 제가 쓴 게 아니고요. 우리 팀장님이 쓴 거에요. 혹시나 제가 쓴 건 줄로 오해하실까봐요.”

“아니에요. 오해는 무슨. 다 맞는 말씀이던데요. 저 그렇게 쪼잔한 사람 아닙니다.”

“전 감독님 시나리오 재밌었어요.”

“재밌긴요. 많이 부족하죠.”

“감독님!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너무 자기를 낮추시면 자존감이 떨어져서 안 좋아요.”


어라? 내 걱정을 해 주는 거야? 


스물일곱살 양서연 피디가 내 걱정을 해 주다니.. 살짝 설렜다. 이런 기분 처음이야.


“그리고 전 감독님 데뷔작도 좋았어요. 다음 작품은 분명 대박나실 거에요.”

“제 데뷔작을 보셨다고요?”

“네. ‘꼴리는 영화’요.”

“어.. 고마워요.”


서연은 수줍은듯 고개를 까딱하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스물일곱살 여자 피디가 어떻게 ‘꼴리는 영화’를 좋게 봤다는 거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저러는 거야? 혹시 나 좋아해? 나에게 마음을 주려는 거야?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양서연 피디가 미쳤어? 


입장을 바꿔서 내가 양서연 피디라도 열다섯살 많은 폭망 감독에게 마음을 주진 않을 것 같다. 김치국 마시지 말자. 이건 설렐 일이 아니라 조심해야 할 일이다. 말도 안 되는 선심성 멘트를 날린 걸 보면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 내내 엘리베이터 앞까지 따라나와 한껏 미안한 표정을 짓던 서연의 얼굴이 잊히질 않았다. 곧 퇴근 시간일 텐데 회사 근처에서 커피나 한 잔 마시자고 할 걸 그랬나?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다시 보고 싶어졌다.


그래. 결심했다! 


이왕 19금 떡 영화 감독으로 낙인 찍힌 몸. 까짓거 한 편 더 만들어주자! 정 민망하면 감독 크레딧엔 예명을 올리면 된다. 일단은 ‘구멍가게’를 만들겠다고 하고 감독 방에 출근하고 법카도 받자! 그러면 서연을 매일 볼 수 있다. 19금 떡 영화 따위야 만들어도 그만 안 만들어도 그만이지만 ‘구멍가게’가 아니라면 양서연 피디와 친해질 수 있는 기회는 내 평생 다시는 없을 것이다. 


당장 내일부터 출근하고 싶었지만 너무 빨리 감독 제안을 수락하면 없어 보이니까 며칠 기다렸다가 연락하자! 어쩌면 ‘구멍가게’라는 제목만 좀 괜찮게 바꾸면 그렇게까지 쪽팔리지 않을 수도 있다. 시나리오는 안 봤지만 잘만 각색하면 남 부끄럽지 않은 작품이 될 수도 있다. 19금이든 떡 영화든 차기작이 정해지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이제 난니맨의 정체만 밝히면 된다. 심동민을 만나자.



***



심동민 생각하면 할 수록 실망이다. 


폭망 감독보단 감독 지망생이 낫다고 했으면서 악플 테러나 하고.. 역시 나를 질투하고 있었어. 그런데 내가 애널맨인 건 어떻게 알았지? 어느 새 나의 머릿속은 내가 애널맨인걸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한 추리로 가득해졌다. 


동민과 함께 했던 지난 날을 찬찬히 복기해보았다. 아마도 동민의 집에서 술을 먹다가 잠들었을 때 녀석이 내 핸드폰을 훔쳐 봤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애널맨이라는 사실을 알 방법이 없다. 게다가 동민이라면 나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으니 내가 애널맨이라는 사실 역시 알고 있는 게 자연스럽다. 빨리 만나자. 만나서 물어보자.


“어디야?”


동민에게 전화해서 어디냐고 물어보니 대학로에 아는 배우 공연을 보러 왔다고 했다.


“아는 배우? 니가 아는 배우가 누구?”

“아 있어. 몰라도 돼.”

“니가 아는 배우가 어딨어? 니가 아는 배우면 나도 좀 알자.”

“혜나씨.”

“혜나? 내 영화에 나왔던 그 혜나씨?”

“응.”

“잘 됐다. 나도 갈게. 예전부터 혜나씨가 공연 보러 오라고 종종 초대해줬는데 한 번도 안 갔거든. 마침 너에게 물어볼 것도 있고.”

“물어볼 거? 나한테?”


동민은 딱히 내가 공연장에 방문하는 걸 내켜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 때문이라면 굳이 여기까지 올 필요 있어? 어차피 내일 장례식장에서 볼 건데 뭐하러 공연장까지 와? 그나저나 언제 갈 거냐니까?”

“만나서 얘기하자.”


나와의 독대를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역시 수상하다. 하지만 임 감독 장례식장에서 동민을 붙들고 니가 난니맨이냐? 내가 애널맨인 건 어떻게 알았냐? 따위의 얘긴 못할 테니 반드시 지금 만나야 했다. 보통 공연은 8시쯤 시작하니 지금 대학로로 출발하면 아슬아슬하게 공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혜나는 ‘꼴리는 영화’가 망한 후에도 연락을 주고 받은 몇 안 되는 배우 중 하나였다. 내 영화 출연 이후엔 영화보다는 주로 대학로 연극 무대에서 활동했는데 고맙게도 매번 새 연극을 올릴 때마다 초대해주었다. 사실 얼마 전에도 공연 보러 오라고 했는데 안 가고 있었다. 공연을 보러 가면 끝나고 술이라도 한 잔 해야 하는데 분명 같이 출연한 배우들을 우르르 데리고 나올 테고 감독 체면에 더치 페이를 할 순 없으니 혼자 다 내야 하는데 술값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혜나의 공연을 보러 갔다간 십중팔구 그런 술자리가 이어질 텐데 다행히 동민이가 있으니 술자리가 커질 조짐이 보이면 동민에게 떠넘기고 먼저 탈출하면 된다. 동민이 애널맨인지 아닌지만 떠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공연장 주소 찍어. 바로 갈게. 근데 너 혹시 아직도 블로그 하냐?”


동민이 전화를 끊으려고 해서 가볍게 툭 던져보았다.


“블로그? 갑자기 블로그는 왜?”


블로그 얘기를 꺼내자 전화기 너머로 동요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찔린 것이다.


“유튜브 돌아다니다 봤는데 요즘 블로그가 한 물 간 것 같아도 잘만 운영하면 월 천은 번다더라고. 너 예전에 블로그 하지 않았냐? 무슨 ‘혼자 영화 보는 남자’ 어쩌구 했던 것 같은데.. 맞나? 혼영남? 혼남?” 

“하긴 했지. 근데 그게 언제적 얘기냐. 기억도 안 난다. 공연장 주소 보낼게. 8시까지 안 오면 먼저 들어간다.”


말 나온 김에 들어가 본 동민의 블로그 ‘혼자 영화 보는 남자’는 폐허나 다름 없었다. 마지막 글이 4년 전이었다. 극장도 잘 안 가는 주제에 영화 리뷰를 꾸준히 올린 건 ‘혼자 영화 보는 남자’ 블로그 운영자로 유명해지면 같이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 여자가 나타날 거란 계산에서였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끝내 벌어지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


거의 매일 영화 리뷰를 올렸지만 블로그 방문자 수는 언제나 한 자리였다. 그도 그럴 게 ‘맨날 진지 빠는 말투로 아무도 모르는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남자’를 어느 여자가 궁금해 하겠는가? 애초에 영화 리뷰를 꾸준히 올리면 여자들에게 인기를 얻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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