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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nn Oct 11. 2024

너는 떡 영화로 데뷔했으니 떡 영화나 만들어라


까마득한 학교 후배지만 나보다 잘 나가는 신인 감독인 태준은 폭망 감독인 나를 보자마자 “선배님 안녕하세요!”라며 깍듯하게 폴더 인사를 해주었다. 태준에겐 학교 다닐 때 딱히 잘 해 준 것도 없는데 영화만 잘 만드는 게 아니라 인성도 제대로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얘 때문에 기다린 거였어? 


아무리 잘 나가는 신인 감독이라지만 학교 후배 때문에 3시간 넘게 기다렸다니.. 역대급 흑역사 추가에 괴로우면서도 잘 나가는 신인 감독이 폭망 감독인 나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해 준 점은 고마웠다. 괴로움과 고마움이란 복합적인 감정에 떨떠름하게 사로잡혀 있는데 강 대표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태준에게 물었다.


“아! 두 분 아는 사이죠?”

“네. 학교 선배님이세요.”

“아 그러셨구나.” 


강 대표의 영혼 없는 리액션에 이어 태준이 다시 나를 보고 말했다.


“그럼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선배님.”

“그래. 또 보자.”

“네! 연락드릴게요.”


강 대표와 기획팀 직원들이 잘 나가는 신인 감독 태준을 엘리베이터 앞까지 따라 나가서 배웅하는 사이 나는 석 팀장의 안내를 받아 강 대표 방으로 들어갔다. 지난 일은 다 잊고 차분히 마음을 가라 앉히려는데 “감독님 조심해서 들어가세요!”라고 인사성 없는 줄 알았던 조재웅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오는 바람에 속이 뒤틀렸다. 새파란 어린 놈에게까지 폭망 감독이라고 차별 대우 당한 것이다. 두고 보자.



***



오랜만의 방문이라 뭐가 달라졌나 둘러보니 창가에 철 지난 마블 피규어들이 늘어서 있었다. 엔터 대표 사무실에 가면 꼭 마블 피규어들이 한 두개 이상 있는데 강 대표도 나름 엔터 대표랍시고 남들 하는 건 다 해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설상가상 벽면에는 흥행에 실패한 SNS 스릴러 영화 ‘구독해주세요’의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안목 구린 신생 대표와 폭망 감독의 조합이라.. 암울하다. 뭘 해도 안 될 것 같다.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석 팀장은 학교 후배 때문에 3시간 넘게 기다리게 만든 게 미안했는지 내 시선을 피했고 나도 따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으나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는데 잠시 후 강 대표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들어왔다.


“감독님!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죠?”

“네 안녕하세요. 대표님.”

“장 감독님은 엄청 유쾌하신 것 같아요? 학교 다니실 때도 그러셨나요?”

“예.. 그런 편이었죠.”


학교는 고작 한 학기 같이 다녔고 얘기를 나눠 본 적도 거의 없어서 태준에 대해선 잘 모른다.


“제가 장 감독님 영화 진짜 좋아하거든요. 극장에서 두 번 봤습니다. 하하. 가끔 케이블에서 해 줄 때 별 생각 없이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끝까지 보게 되더라거요. 괜히 대박난 게 아닌 것 같아요.”


왜 나한테 남 영화 칭찬을 하는 거지? 


내 영화는 보고 하는 소린가? 생각해 보니 강 대표와는 나의 데뷔작 ‘꼴리는 영화’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다. 됐고.. 사람을 4시간 가까이 기다리게 했으면 미안하다는 말이 먼저여야 할 텐데 태준의 학창시절에 대해서만 이것 저것 물어보더니 내가 딴청을 피우자 슬슬 본론으로 들어갔다. 


“감독님! ‘공소시효’는.. 그만 하는 걸로 하시죠!”

“그럼.. 제 시나리오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게 왜 감독님 시나리오죠? 저희 오리지널 기획 아닌가요?”

“그렇긴 한데 마지막에 보내드린 버전은 거의 재창조나 다름 없는 것 같아서요. 제 오리지널 아이디어도 많이 들어갔고..”

“에이 걱정마세요. 설마 저희가 감독님의 오리지널 아이디어를 갖다 쓸까봐 그러시는 거에요? 표절에 대한 우려? 그럴 생각은 전혀 없고요 필요하시면 다 감독님 다음 작품에 가져다 쓰세요. 저는 진심으로 감독님이 잘 됐으면 좋겠거든요.”


폭망 감독의 오리지널 아이디어 따위는 표절할 가치도 없다는 뜻인지 아니면 내가 정말 잘 되길 바란다는 뜻인지 모르겠어서 긴가민가하고 있는데 강 대표는 내 눈치를 살피더니 진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나저나 감독님 혹시 19금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19금이요?”

“네. 19금 영화요. 야한 거.. 성인.. 에이 감독님이 저보다 더 잘 아시잖아요!”


강 대표의 말이 끝날 때쯤 석 팀장은 급히 처리할 일이 있다며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나더니 방에서 나가버렸다. 강 대표는 석 팀장이 나가고 나서야 다시 말을 이었다.


“제목은 ‘구멍가게’입니다. 19금으로 생각하고 있고요.”


구멍가게? 19금 구멍가게라면.. 설마 그 ‘구멍’ 가게?


강 대표가 왜 불렀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말이 좋아 19금이지 넌 떡 영화로 데뷔했으니 떡 영화나 만들라는 얘기였다. 몇 달 만에 만나서 기껏 한다는 얘기가 떡 영화 연출 제안이라니.. 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강대표는 실실 거리며 아이템 소개를 했다.


“‘구멍가게’ 어때요? 제목 죽이지 않아요?”

“구멍.. 가게가요?”


처음엔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구멍가게라니.. 부자집 아들이라고 해서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인 줄 알았는데 돈만 많은 미친 놈이었나?


“제목 죽이죠? 이야기도 괜찮아요. 과거의 상처를 간직한 채 일상을 버텨내는.. 그러니까 서울 변두리에서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섹시한 30대 중반 여 사장이 미스터리한 분위기의 남자 손님을 만나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감독님이 잘만 풀어주시면 시리즈로 발전할 수 있고 IP는 저희 소유니까 드라마나 웹툰으로도 가능할 것 같고요.”


우습지도 않았다. IP같은 소리 하고 있네..


“정말 죄송한데 ‘공소시효’가 그렇게 아니었나요?” 


내가 쓴 ‘공소시효’가 19금 ‘구멍가게’보다 못하다는 건가?


“아 그거요? 음..”


강 대표는 잠깐의 침묵 후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가스라이팅을 시전했다.


“감독님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요. 백번 양보해서 저는 나쁘지 않았는데 모니터를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기획팀 반응이 별로였고요. 무엇보다 영화에서 중요한 건 캐스팅이랑 투자잖아요? 아는 배우들이랑 매니저 몇 명에게 보여줬는데 다들 반응이 시큰둥하더라고요. 투자사에서는 거절했고요.”


나한테는 말도 없이 벌써 캐스팅이랑 투자를 돌렸다고? 믿어지지 않았다.


“감독님 스타일도 스타일이지만 애초에 저희 기획이 감독님에게는 안 맞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19금이라면 다르죠. 감독님 데뷔작도 19금이고 여기에 여배우만 확실한 애로 캐스팅하면 투자는 문제 없을 거잖아요? 감독님이 19금 전문이니 더 잘 아시겠지만요.”


자꾸 나를 19금이랑 엮으려고 해서 뚜껑 열릴랑 말랑했다. 석 팀장에 이어 강 대표에게까지 떡 영화 감독이란 소리를 들어야 한단 말인가? 무엇보다 석 팀장은 내가 떡 영화 감독이라고 불리는 걸 싫어하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아는데 왜 강 대표에게 아무 얘기도 안 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얘기를 했는데도 이러는 거면 나를 폭망 감독이라고 무시하는 거고. 둘 다 불쾌했지만 참아야 한다.


“19금 전문이라뇨. 전혀 아니에요 대표님. 죄송한데 저도 19금은 한 편 밖에 안해서 잘 몰라요.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19금을 또 하기는 좀 그렇고요.”

“감독님! 얘를 보시면 생각이 달라지실 거에요. 혹시 유리아라고 들어 보셨나요?”

“유리아? 사람 이름인가요?”

“한 번 검색해보세요. 요즘 뜨는 애라 얼굴 보면 아실 걸요? 아 그럴 게 아니라 제가 유리아 인스타를 보여드릴게요.”


강 대표가 핸드폰을 꺼내더니 한참을 조물딱 거리고는 내 면상으로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뭐야? 이건.. 강 대표가 말한 유리아라는 사람의 인스타 피드는 온통 살색으로 가득했고 얼굴을 자세히 살펴 봐도 개성이 없어 누군지 전혀 인식이 되지 않았다.


“얘가 유리아에요. 어때요? 괜찮죠? 미드가 예술이고 이미지도 깨끗하고요! 잘 나가는 모델이에요.”

“아 그렇군요.”

“내가 얼마 전에 친한 동생 같은 매니저에게 소개를 받았는데요. 몸매만 괜찮은 줄 알았더니 연기도 가능하다고 하더라고요. 어때요? 정말 괜찮지 않아요? 만나보시면 아시겠지만 애가 아주 재밌어요.”


유리아에게는 아무런 불만이 없다. 길거리에서 마주 쳤으면 한 번쯤 뒤를 돌아봤을 수도 있다. 얼굴은 모르겠지만 몸매에선 범상치 않은 포텐이 느껴졌다. 에로 배우로는 괜찮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괜찮지 않다. 19금 영화로 데뷔했다가 폭망하고 10년째 개고생 중인데 차기작으로 또 19금 영화를 만들었다간 흥행과 상관없이 떡 영화 감독으로 영화 인생이 끝날 것이다. 


차기작으로 그것도 유리아가 주인공인 19금 영화를 만들었다간 투자 유치가 가능한 레벨의 배우들은 나를 상대조차 안 해줄 것이다. 배우는 커녕 듣보잡 지망생들에게조차 무시당할 것이고 만에 하나 시나리오가 좋다면 투자사에선 감독 교체부터 요구할 것이다.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 대표는 일단은 ‘구멍가게’ 기획안을 읽어봐달라고 했다. 기어이 나를 끝장 낼 생각인 건가?


“‘공소시효’에 미련이 남으시면 19금 영화 한 편 하신 다음에 하면 되잖아요. 설마 19금에 편견이 있으신 건 아니죠? 19금이면 어떤가요? 흥행 성적만 좋으면 다들 차기작 하자고 달려들 걸요?”


반 년 전까지만 해도 영화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던 주제에 언제부터 전문가 행세지? 영화는 이게 문제다. 개나 소나 자기가 제일 잘 안다고 생각한다. 기운이 빠져 잠자코 있는데 강 대표는 지치지도 않고 계속 나불거렸다.


“이런 말씀까진 드리고 싶지 않았는데 솔직히 감독님 이름으로는 투자랑 캐스팅 쉽지 않아요. 이유는 모르겠는데 다들 감독님 작품을 별로 안 좋아하더라고요. ‘꼴리는 영화’가 그렇게 별로였나요? 제목 때문인가? 아 죄송해요. 제가 아직 감독님 영화를 못 봐서요.”

“네..?”


내 영화를 아직 안 봤다고? 우리가 만난 지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어이가 없었다. 내 영화도 아직 안 본 주제에 장태준 영화는 극장에서 두 번 봤고 케이블에서 해 줄 때마다 반복 관람한다고 극찬을 늘어놓은 거야? 이제야 확실히 알 것 같았다. 강 대표에게 나는 애초에 한 번 쓰고 버리는 각색 작가 또는 심심풀이 떡 영화 감독 후보에 불과했던 것이다. 어떻게든 강 대표와 기획팀 피디들에게 잘 보여서 차기작을 만들려고 전전긍긍 노심초사 했던 지난 날들이 그저 허망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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