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소연이랑 잤냐는 추궁에 동민이 아무런 답이 없자 임 감독은 다시 한 번 언성을 높였다.
“쟤랑 잤냐니까?”
“무슨 말씀이세요 감독님. 쟤는 제 스타일 아니고요. 소연이가 눈이 얼마나 높은데요. 저 같은 건 거들떠도 안 봐요.”
“그럼 남자답게 한 번 달라고 하든가.”
“아니 제 스타일이 아니라니까요.”
“스타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너도 꺼져 이 새끼야.”
임 감독은 뭐가 그렇게 못 마땅했는지 석 팀장을 향해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천박한 욕설을 끝도 없이 퍼부어댔다. 왜 이렇게 분노하지? 설마 둘이 감독과 스크립터 관계를 넘어 남자와 여자로서 뭔 일이 있었나? 에이.. 설마 아니겠지.. 하면서도 사람 일 모르는 법이고 동민과 둘이서만 술에 취한 임 감독을 감당할 엄두가 나질 않아 다시 석 팀장에게 카톡을 보내보았다.
‘답이 없네? 남자 만나러 갔니?’
‘뭔 상관?’
‘돌아와. 조금 있으면 우리도 일어날 거니까 잠깐만 더 있다가 같이 일어나자.’
‘미안. 이미 택시 탐.’
‘남자 만나러 가는 길?’
‘누구 소개 받기로 했어.’
‘누구?’
‘영화사 대표’
‘어느 영화사?’
‘신생. 말해도 몰라.’
그렇다면야 붙잡을 수 없지.
‘그 회사 돈 많아? 대표님은 뭐 하시던 분?’
‘돈은 많대. 부잣집 아들. 강남 빌딩 건물주라나?’
‘좋겠다. 혹시 필요하면 나를 이용해도 좋아. 이래봬도 기성 감독이잖아.’
‘고맙ㅋ.’
석 팀장이 그 날 소개 받은 신생 영화사 대표가 지금의 밀리언 필름 강석현 대표이니 결국 나를 이용한 셈이다. 비록 내가 메이저 투자 배급사에서 관심 가질 만한 레벨의 기성 감독은 아니지만 감독은 감독이니까. 내가 석 팀장과 카톡을 주고 받는 사이 동민은 임 감독의 주사가 지긋지긋하다는 벌떡 일어나더니 화장실에 가버렸다. 임 감독은 술자리에 자신과 나만 남은 걸 확인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야.. 최 감독. 돈 좀 빌려줘라.”
“죄송합니다. 감독님. 저도 어렵습니다.”
임 감독이 왠일로 나를 최 감독으로 불러주나 의아했는데 역시 바라는 게 있었다.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정말 힘드셨나보다 생각하고 있는데 동민이 화장실에서 돌아왔다. 임 감독은 이 때부턴 욕설 대신 동민의 칭찬을 늘어놓았다. 어렵고 힘들 때 옆에 있어준 동민이 진짜 의리 있는 놈이고 난 은혜도 모르는 양아치일 뿐이라고. 임 감독의 칭찬에 동민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퍼마시며 폭주하다 뻗어 버렸고 임 감독은 동민이 뻗은 걸 확인 후 다시 돈 좀 빌려달라고 했다.
난 데뷔작도 망했고 차기작도 계속 엎어져서 진짜 어렵다고 정말 죄송하다고 거듭 사과를 했다. 그러자 임 감독은 가오가 상하셨는지 폭언과 악담을 퍼부어댔다.
“미안한데 니 영화 구려. 꼴리는 영화? 그 딴 걸 영화라고 만들었냐? 설마 될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니가 그러니까 안 되는 거야. 고작 그 딴 거나 만들려고 내 조감독 제안을 거절한 거냐? 그딴 거 만들고 폭망하느니 그냥 내 조감독이나 하는 게 니 인생엔 훨씬 도움이 됐을걸?”
난 반박은 하지 않았지만 듣고 있노라니 기분이 점점 나빠졌다. 아니 지가 나 데뷔를 시켜준 것도 아니고 조감독 시절 페이를 후하게 준 것도 아니고 술을 많이 사주거나 좋은 곳에 데리고 다녀준 것도 아니면서 왜 지랄이지?
“그래도 제 영화도 봐 주시고.. 감사합니다 감독님! 역시..”
“안 봤는데?”
순간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 나올 뻔 했다. 폭언과 막말을 들어서 기분은 나빴지만 그래도 내 영화를 보느라 소중한 시간을 투자했으려니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 영화를 보지도 않고 욕만 하고 있었다면 얘기가 다르다. 아무리 한 때 믿고 따랐던 감독님이라 해도 이건 선을 넘은 거 아닌가?
임 감독은 내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한참을 혼자 폭언을 퍼부은 후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그러니까 이건 최 감독이 사라.”라는 말만 남기고 가게에서 나가버렸다. 동민이도 돈이 없을텐데 졸지에 내가 사야 하는 분위기가 돼서 도대체 얼마나 나왔는지 확인이나 하려고 카운터에 물어봤더니 아까 여자 분이 이미 계산하고 나가셨다고 해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석 팀장이 예전부터 센스 하나는 기가 막혔다.
예전 같았으면 임 감독을 따라 나가 집에 들어가시는 것까진 챙겨 드렸겠지만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럴 필요를 못 느꼈다. 임 감독이나 나나 같이 늙어가는 폭망 감독 처지에 누가 누굴 챙겨준단 말인가. 확실한 건 앞으로는 따로 시간 내서 볼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사실이다.
***
임문호 감독에게 들었던 폭언과 욕설이 몇 날 며칠이 지나도록 귓가에 아른거렸다.
평소엔 그러려니 하다가도 이불 속에 드러눕기만 하면 참았던 분노가 터져 나왔다. 이러다 홧병 날 것 같았다. ’꼴리는 영화’가 역대급 걸작까지는 아닐 수 있어도 이렇게 욕을 먹을만한 영화는 아니다. 특히나 이젠 같은 폭망 감독 아닌가.
순간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나도 임 감독의 영화를 욕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차마 면전에 대고 욕을 퍼부을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임 감독의 영화에 0.5점과 악평을 남기면 되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속이 후련했다. 아니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벌떡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핸드폰을 켜고 임 감독의 유작인 ‘유언’에 0.5점과 악평을 남기려고 로그인을 했지만 아이디가 걸렸다. 임 감독과 이메일을 주고 받을 때 주로 써 온 아이디이기 때문이다. 임 감독이 이 아이디의 주인이 나라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다.
이 아이디로 0.5점과 악평을 남기는 건 면전에 대 놓고 욕을 하는 것과 다름 없다. 아무리 임 감독이 앞으로 따로 시간 내서 볼 일 없는 폭망 감독이라 해도 차마 그럴 엄두까지는 나지 않았다. 그래서 얼른 새로 아이디를 만들었다. 애널맨.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고 아부하고 굽실거릴 때 빨아준다는 특정 신체 부위를 뜻하는 단어지만 그와는 전혀 상반되는 행동을 한다는 역설적인 의미가 마음에 들었다.
애널맨이라는 아이디로 임 감독의 영화 ‘유언’에 “더 잘 만들었어야죠 감독님. 이러다 유작되겠어요.”라는 관람평과 함께 평점 0.5점을 주고 나니 분노가 좀 가라앉았다. 임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 달린 관람평을 모조리 찾아 읽는 스타일이다. 애널맨 아이디로 올린 관람평을 읽고 분노할 임 감독을 생각하니 속이 다 후련했다. 나라고 니 영화를 씹을 줄 몰라서 가만 있는 줄 알았냐?
그런데 이렇게 임 감독의 부고 문자를 접하고 나니 그 때 술자리에서 돈을 안 빌려준 것도 말이 씨 된다고 정말로 임 감독의 유작이 되어 버린 ‘유언’에 “더 잘 만들었어야죠 감독님. 이러다 유작되겠어요.”라는 관람평을 남긴 것도 죄송스러워졌다. 그래도 관람평을 삭제하진 않았다. 나는 애널맨이 아니니까.
그런데 석 팀장이 난니맨일 필요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석 팀장은 굳이 정체를 숨기고 악플 테러를 할 이유가 없다. 석 팀장은 평소 대놓고도 하고 싶은 말 다 퍼붓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심동민이라면?
동민은 석 팀장과는 다르다. 17년째 감독 준비 중인 동민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폭망 감독으로 간신히 버티는 와중에도 동민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그래도 영화감독으로 데뷔는 했기 때문이다. 비록 어디 가서 감독 대접을 받기는 커녕 폭망 감독이라는 푸대접과 놀림만 받는 처지지만 그래도 영화과를 졸업하고 17년째 데뷔도 못하고 늙어 가고 있는 동민이보다는 내가 낫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동민은 폭망 감독보다는 감독 지망생이 낫다는 주의다. 감독 지망생에겐 미래가 있지만 폭망 감독에겐 미래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더럽고 치사해서 못 해먹겠다고 하소연 할 때마다 차기작은 대박 날 거니까 힘 내라는 덕담은 종종 해 주지만 내가 차기작을 못 만들 거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동민 역시 내가 자신의 감독 데뷔가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우정 비스무리한 관계를 지속 중이다. 동병상련, 유유상종이라고 각자가 서로에게 갖고 있는 미묘한 우월감 덕분에 관계가 이어지고 있다. 아마 동민이 감독 데뷔에 성공하고 흥행까지 잘 됐다면 우리는 지금같은 관계는 아닐 것이다. 실제로 나는 잘 나가는 애들과는 상종하지 않는다.
그러고보니 동민이 한 때 블로그를 열심히 운영했던 사실이 떠올랐다. 충분히 정체를 숨기고 온라인 테러 행각을 저지르고도 남을 스타일인 것이다.
‘혼자 영화 보는 남자’였던가? 영화과 졸업 이후 10년 넘게 시나리오 공모전에 떨어지고 감독 데뷔에도 실패하자 감독은 안 되겠다고 판단했는지 제2의 빨간 안경 이동진이라도 되려는 듯 네이버 블로그를 만들고는 한동안 열심히 영화 리뷰를 올렸었다. 비록 이동진은 커녕 그 흔한 파워블로거조차 되지 못하고 수년 째 방치된 버려진 블로그가 되어 버렸지만..
추리 미스터리 장르에선 언제나 주인공의 가장 가까운 지인이 범인으로 밝혀진다. 석 팀장은 한 때는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였지만 이제는 그렇다고 보기 힘들다. 현재 나에겐 동민 만큼 가까운 지인은 없다. 무엇보다 동민만큼 나에 대해 잘 아는 놈도 없을 것이다. 내가 내 영화에 달린 관람평 하나하나에 일희일비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게 동민이다.
동민에겐 범행 동기도 있다. 내가 자신이 이루지 못한 감독 데뷔의 꿈을 이뤘으니 그에 대한 질투와 열등감을 느낀 것이다. 내가 임 감독에게 욕을 처먹고 부캐 애널맨을 탄생시켰듯 동민은 감독 데뷔에 실패한 분노와 억울함 그리고 나에 대한 질투와 열등감을 대놓고 드러낼 순 없어서 난니맨이라는 부캐를 탄생시킨 것이다.
심증은 확실했다. 동민이 이 새끼가 난니맨이라는 물증만 찾으면 된다. 술을 처 먹인 후 동민의 지문으로 핸드폰을 열어봐야 하나? 일단은 만나서 두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고 물어보자. 니가 난니맨이냐고 대놓고 물어보는 식은 아니다. 그래봤자 순순히 내가 난니맨이 맞다고 자수할 리 없다. 그냥 지나가는 말로 슬그머니 떠 보는 거다.
동민이 나에 대해 잘 아는 만큼 나도 동민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우리는 피차 서로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사이다. 몇 마디 나눠보면 바로 감이 올 것이다. 강 대표 미팅 끝나고 바로 연락해 봐야지. 너무 하네 진짜. 아무리 내가 감독 데뷔한 게 부러워도 그렇지..
근데 강 대표 미팅은 아직도 안 끝났나? 도대체 지금이 몇 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