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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nn Oct 09. 2024

나보다 잘 나가는 영화과 후배 감독


어처구니가 없었다. 


시계를 보니 약속 시간에서 2시간 반이 훌쩍 지나 있었다. 집에 가 버릴까? 2시간 반 기다려서 강석현 대표를 만나는 게 쪽팔린 건지 아니면 확 집에 가 버리는 게 쪽팔린 건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강 대표가 아무리 나보다 나이는 두 살 어리고 키가 크고 잘 생겼고 유학파고 골프도 잘 치고 집도 부자라 해도 사람이 사람에게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강남 건물주 아들에 영화사는 취미로 한다는 소문이 있는 강 대표가 솔직히 부럽긴 하다. 결혼은 했다고 들었는데 확실히는 모르겠다. 영화 마케팅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석 팀장이 임 감독의 스크립터로 현장 경험을 마친 후 마케팅 회사를 차려 밀리언 필름 강 대표의 건물에 입주한 걸 계기로 엔터 산업에 관심이 많던 강 대표가 석 팀장과 의기투합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알고 보니 강 대표와 석 팀장은 미국 유학 시절 술자리에서 몇 번 마주친 인연이 있어 더 빨리 친해졌다고 했다. 밀리언 필름이란 이름도 석 팀장이 지었다. 영화사가 오래가려면 천만 관객이 드는 영화도 좋지만 백만 관객이 드는 영화를 꾸준히 만들어야 한다는 취지라고 했다.


강 대표가 처음부터 나를 이렇게 찬밥 취급 한 건 아니다. 각색 계약 후 첫 한 달 정도는 기성 감독 대접을 제대로 받았다. 내가 영화과 출신이고 잘 나가는 선후배 감독과 배우 그리고 제작자들이 많은 것도 한 몫 했다. 잘 나가는 누구랑 같이 학교에 다녔고 아무개랑은 친한 형 동생 사이라고 하면 강 대표는 마냥 신기해하며 언제 소개시켜달라고 했다. 하지만 내가 아무도 소개를 안 시켜줘서 아니 못 시켜줘서인지는 몰라도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초반엔 회의도 자주 하고 나도 회의 내용을 충실히 반영해서 열심히 수정해 갔지만 기획팀의 무한 수정 요구를 들어주다 지쳐 슬슬 태업 모드에 들어갔더니 회사에서는 서서히 피드백이 늦어졌다. 물론 태업에 들어간 내 잘못도 있지만 맨날 뭘 고치라고 하고 고치라는 데로 다 고치면 또 고치라고 하고 여길 고치면 저길 고치라고 하고 저길 고치면 이번엔 또 다른 곳을 고치라고 하는 걸 도저히 만족시킬 방법이 없었다.


회사에서는 내가 여기까지라고 생각했는지 석 팀장과 기획팀 피디 전원이 참석했던 회의가 언젠가부턴 석 팀장이 빠지더니 회의 장소도 서서히 회의실에서 회사 근처 카페로 이동했고 막판엔 집에서 줌으로 했다. 보통 이러다 흐지부지 되게 마련인데 나까지 포기하면 작품이 엎어지므로 마지막으로 최선을 다해 각색을 하긴 했다만 석 달 만의 호출에 3시간 가까운 대기라니.. 


큰 기대는 없었지만 그래도 오라고 해서 왔는데 느낌이 좋지 않다. 어떻게든 차기작 개봉까지 10년은 넘기지 않으려 했지만 이번에도 엎어지면 무조건 10년은 넘어간다. 폭망 이후 잠깐씩 몸 담았던 영화사들과는 다들 마지막이 안 좋았고 뒤끝이 안 좋다는 소문이라도 났는지 이제는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 사실 밀리언 필름도 과거 나와 특별한 관계였던 석 팀장이 아니었다면 인연이 없었을 것이다.


영화가 아무리 기다림의 예술이라지만 3시간 가까이 사무실 구석 방에 방치되어 있다보니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내 인생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도대체 뭘 잘 못 한 걸까? 조감독 생활을 너무 오래 했나? 아니 그냥 조감독이나 계속 할 걸 그랬나? 데뷔작을 잘 못 골랐나? 하지만 저예산 19금 영화로 데뷔하지 않았다고 한들 지금보다 더 낫진 않았을 것이다. 동민이와 함께 17년째 감독 데뷔를 준비하며 공모전에 시나리오를 보내고 있었겠지. 역시.. 영화과에 가지 말았어야 했나?


그건 아닌듯. 영화과 나오고 잘 된 사람도 많다. 영화과까진 괜찮았다. 임문호 감독의 조감독 생활을 너무 오래 한 게 잘못이다. 감독을 할 거였으면 조감독은 한 편만 하고 조감독 할 열정을 내 시나리오에 쏟아 부었어야 했다. 그 당시 시나리오를 더 열심히 썼다면 ‘꼴리는 영화’가 아닌 다른 작품으로 데뷔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잘못된 선택과 덧없이 흘려 보낸 지난 세월에 대한 후회가 밀려오는 가운데 뜬금없이 동민의 단골 멘트가 떠올랐다. 내가 시나리오 모니터를 부탁할 때마다 입버릇처럼 하는 소리다.


“넌 영화 빼곤 다 잘하는 것 같아.”


아뿔싸.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너였구나! 심동민!!


난니맨은 동민이다. 영화 빼곤 다 잘하는 것 같다는 말은 결국 직업을 바꾸라는 말이다. 그런데 동민은 왜 갑자기 그런 악플을 달았을까? 10점 짜리 관람평도 달아줬으면서.. 이 새끼 설마 나 몰래 10점짜리 관람평을 삭제한 건 아니겠지? 잽싸게 확인해보니 다행히 아직 남아 있다.


‘아무 기대 없이 봤는데 대박이에요. 핵꿀잼. 감독 천재인듯. 10점 만점 줍니다.’ [작성자 : nouv****]


동민의 아이디인 ‘누벨바그1895’가 달아준 10점 짜리 관람평이 ‘꼴리는 영화’ 개봉 후 달린 첫 관람평이다. 그 땐 정말 고마웠다. 이렇게 10점 짜리 평을 남겨줬으면서 왜 갑자기 난니맨이라는 아이디를 만들어서 0.5점 짜리 악평을 달았을까? 나중에 만나면 두 눈 똑바로 쳐다보고 물어봐야겠다.


“넌 영화 빼곤 다 잘하는 것 같애.”라는 말버릇에 이어 추가로 동민이 난니맨이라는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동민의 블로그 ‘혼자 영화 보는 남자’를 꼼꼼히 살펴보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양서연 피디였다.


“감독님! 정말 정말 죄송한데 삼십분만 더 기다려주실 수 있을까요?”

“그럼요. 전 걱정하지 말고 서연씨 일 보세요.”


이미 3시간 가까이 기다렸는데 삼십분 추가 쯤이야 아무 문제 없다. 노래방 주인이 이런 기분일까? 암튼 이런 식이라면 저녁은 니들이 사는 게 마땅하다. 최소 오마카세나 한우 정도는 되어야 하고. 그리고 서연이가 기다려달라는데 당연히 기다려줘야지. 


사실 서연에겐 미안한 일이 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밀리언 필름 계약 이후 시나리오가 안 풀릴 때마다 심심풀이로 연재 중인 영화 감독을 주인공으로 한 웹소설 ‘감독 인생 2회차’에 서연을 허락도 없이 출연시켰기 때문이다. 필명은 왕복동.


데뷔작이 폭망하는 바람에 10년째 차기작을 준비하던 40대 중반의 영화감독이 영화사에서 짤리고 실의에 빠진 채 집으로 가는 길에 트럭에 치이기 직전의 고양이를 구하려다 넘어져 정신을 잃었는데 눈을 떠 보니 20년 전 영화과 졸업 직후로 회귀하며 시작하는 이야기다. 두 번째 인생에선 지난 생에 저질렀던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고 잘 나가는 쪽으로만 줄을 선 덕분에 데뷔작부터 흥행에 성공하고 차기작으로는 천만 감독에 등극하고 세번 째 작품에선 칸느 정복 결국엔 헐리우드 진출에까지 성공해 베벌리힐스에 수영장 딸린 호화 주택을 산다.


현재 22회차 연재 중인데 반응은 나쁘지 않다. 악평보다는 호평이 많고 연재가 늦어질 땐 다음 화는 언제 올라오냐는 댓글도 종종 달린다. 서연에게 미안한 건 ‘감독 인생 2회차’의 주인공이 힘들어 할 때마다 곁에서 물심양면으로 힘이 되어주는 신생 영화사 기획팀 피디 김성연의 롤모델을 양서연 피디로 했다는 점이다. 


부자집 외동딸, 명문대 영화과 졸업, 신생 영화사 기획팀 근무, 호감형 외모, 키 165cm의 늘씬한 몸매와 볼륨감, 남다른 패션 센스 등등. 여기까지만 봐선 소설 속 여주인공의 롤모델이 누군지 긴가민가 하겠지만 만약 양서연 피디 본인이 ‘감독 인생 2회차’에 등장하는 감독과 신입 피디 성연의 대화를 읽어보면 본인이 여주인공의 롤모델이라는 확신이 들 것이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서연과 성연 이름도 비슷하다.


비록 서연과는 회사 밖에서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고 업무 이외의 사적 통화 역시 한 적이 없지만 인스타그램이 캐릭터 연구에 큰 도움이 됐다. 서연의 인스타그램을 알게 된 건 서연이 알려준 건 아니고 계약 초반 아직 분위기 좋을 때 일식 집에서 회식을 한 적이 있는데 서연이 참치 회 사진을 찍어서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걸 본의 아니게 옆에서 힐끔 훔쳐본 덕분이다. 감히 팔로우를 안 했으니 스토킹은 아니다. 남들 다 보라고 올리는 인스타를 틈틈이 챙겨본 걸 스토킹이라고 하진 않는다.


서연은 인스타그램에 주로 자랑거리를 올리는 스타일이고 가끔은 비공개로 돌리기도 한다. 은근 감정 기복이 심한 스타일 같다. 강남 전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오피스텔, 회사에는 끌고 오지 않는 구형 벤츠 C클라스, 누가 선물을 해 준 건지 잊을 만 하면 한 번씩 올라오는 명품 백과 구두 등등. 다행인 건 적어도 인스타에선 남자 친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라이프스타일로 봐선 절대 없진 않을 것이다.


서연의 단골 카페도 몇 군데 알고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우연을 가장하고 마주칠 수 있고 대화가 잘 통한다면 서연의 오피스텔에서 강남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시원한 캔 맥주를 나눠 마시고 싶은 소망이 있는데 이는 ‘감독 인생 2회차’에 충실히 반영해두었다. 아직 주인공 감독과 성연의 관계는 진도가 많이 나가지 않은 상태인데 독자들이 빨리 진행시키라고 성화여서 27회차 쯤엔 진도를 빼 볼까 생각 중이다.


‘감독 인생 2회차’는 시나리오가 안 풀려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심심풀이로 연재하는 것까진 좋았는데 문제는 야심차게 유료로 전환했지만 수익이 저조하다는 사실이다. 석 달 누적 수익이 고작 5,730원 밖에 안 된다. 두근두근 설레며 수익금을 확인할 때마다 조롱당하는 기분이다. 길바닥에서 구걸을 해도 5,730원보다는 많이 벌 것 같다.


그나저나 도대체 강 대표는 누구와 미팅 중인걸까? 얼마나 대단한 VIP와 미팅 중이시길래 기성 감독을 3시간도 훌쩍 넘게 기다리게 만드는 걸까? 그래도 설마 저녁 시간은 넘기지 않을테니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차분히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있는데 또 다시 동민에게 전화가 왔다. 동민과 통화할 기분이 아니어서 ‘회의 중’이라고 문자를 보냈다. 그러자 금방 톡이 왔다.


‘임 감독님 장례식 몇 시에 갈 거야? 만나서 같이 갈까?’

‘이따 톡할게’


니가 난니맨이냐고 대놓고 물어보고 싶은 걸 꾹 참고 답톡을 보냈는데 문득 임 감독의 사인이 궁금해졌다. 지병이 있진 않았던 것 같은데 왜 돌아가셨지? 사고일까? 이런 저런 추리를 하고 있는데 밖에서 왁자지껄 웃음 소리와 강 대표의 호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미팅이 끝난 것이다! 잠시 후 노크 소리와 함께 석 팀장이 감독 방 문을 살짝 열고는 나와 보라고 손짓을 했다. 그래도 오랜만의 만남이니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표정 관리를 하면서 나갔는데 낯익은 얼굴이 활짝 웃으며 강 대표와 악수를 하고 있었다.


영화과 5년 후배이자 나보다 잘 나가는 신인 감독 허태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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