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Zinn Oct 02. 2024

폭망 감독 10년을 버틸 수 있었던 비결


만약 감독 방이 생긴다면 드디어 집 구석에서 나와 사람들이랑 점심도 같이 먹고 회의 같은 것도 하면서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된다. 방에 생수통과 각종 비품들이 쌓여 있는 건 아직 내가 이 방을 쓸지 안 쓸지 모르기 때문이겠지?


마지막으로 시나리오를 보내고 석 달 간 연락이 없었지만 단지 검토에 시간이 오래 걸렸을 뿐일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시나리오가 마음에 든 것이고 감독까지 맡기고 싶은 것이다. 그게 아니면 창고나 다름 없는 감독 방에서 하염없이 대기하고 있는 지금 이 상황은 설명이 안 된다.


비록 여기 아니면 갈 데가 없는 사람처럼 군소리 없이 기다리고 있는 신세지만 감독 방을 쓰라고 했을 때 뭐라고 대답을 해야 기성 감독으로서의 가오가 살까 고민하며 두근두근 설레고 있는데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양서연 피디가 아이스 커피를 들고 사뿐사뿐 걸어왔다. 


어라? 난 분명 뜨거운 커피를 부탁했던 것 같은데.. 양 피디가 보기보다 맹한 구석이 있구나? 은근 귀엽군. 뭐 뜨거운이면 어떻고 아이스면 어떠냐. 여기 커피 마시러 온 것도 아니고.


“감독님 아이스 아메리카노 맞으시죠?”

“맞아요! 고마워요 양 피디님! 그런데 이 감독님은 어디 가셨나요? 예전에 이 방 쓰셨던 것 같은데..”

“그건.. 이따가 팀장님이 말씀해 주실 거에요. 저는 하던 일이 있어서 이만..”

“아 네. 전 신경 쓰지 마시고 일 보세요.”


내 예상이 맞을 것이다. 감독 방을 쓰라는 얘기를 하라고 부른 것이다. 하지만 감독 방이 생길 지도 모른다는 설렘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두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 내가 이 방에 있는 걸 사람들이 까먹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금방 끝난다는 미팅은 끝나기는 커녕 잊을 만 하면 한 번씩 강 대표의 호탕한 웃음 소리만 들려오는 게 도저히 금방 끝날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인내심 테스트는 아니겠지? 듣보잡 신생 영화사 주제에 신인도 아닌 기성 감독을 불러놓고 두 시간을 기다리게 만들다니.. 나중에 강 대표를 만났을 때 도저히 아무렇지도 않은 척 표정 관리를 할 자신이 없었다.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면 감독이 벨도 없다고 비웃을까봐 일부러라도 화를 내주는 게 맞을 것 같았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뛰쳐 나가야 감독답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기획팀 조재웅 피디가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더니 오래 기다리게 해드려서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내가 석 달 전에 보낸 ‘공소시효’ 각색 고에 대한 A4 한 장 짜리 모니터를 달랑 던져 주고 나갔다. 


기다리기 지루하던 차에 잘 됐다 싶어 모니터를 읽어보니..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냥 더럽게 못 썼으니 영화로 만들지 말자는 얘기였다. 장점과 단점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는데 장점은 “저예산으로 촬영이 가능하다” 달랑 한 줄 뿐이고 단점은 “여성 관객들이 싫어할 것 같다”를 포함해 수두룩 빽빽 끝도 없이 이어졌다. 


조재웅 피디가 툭 던지고 나간 A4 한 장 짜리 모니터를 읽고나자 아찔한 현기증과 함께 뒷목이 땡겨왔다. 감독에 대한 예의와 존중은 커녕 성의조차 없는 모니터였다. 다시 한 번 읽어보니 미리 작성해 둔 건 아니고 대기 시간이 하염없이 길어지자 석 팀장이 모니터라도 한 장 던져 주라는 얘기를 듣고 급하게 작성한 느낌이었다. 


캐릭터가 평면적이고 톤앤매너는 불쾌하고 전개는 작위적이고 구성은 허술하다고? 빌런이 방 구석에서 혼자 그 짓 하는 장면은 더럽고 작품 전체에 깔려 있는 여혐 정서가 위험하고.. 그래서 개발 가치가 없다고? 에라이.. 반박의 가치조차 없는 모니터였다. 내가 김치국을 마셨구나. 감독 방을 줄 지도 모른다고 잠깐이나마 설렜던 나 자신이 한심했다. 


이건 백프로 계약금 환불이다. 시나리오가 재미없으니 계약금을 돌려달라는 얘기를 굳이 얼굴 보고 직접 들어야 할 이유는 없을 것 같고 듣고 싶지도 않았다. 내용증명이나 보내라지. 더 이상 황금 같은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자리를 박차고 일어 나려는데 문득 모니터 작성자가 궁금해졌다. 


도대체 누가 이딴 걸 모니터라고 쓴 건지 안다 해도 딱히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지만 이름이라도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복수할 수 있으면 하려고 모니터 용지를 앞 뒤로 샅샅이 훑었지만 그 어디에도 작성자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어이가 없었다. 장점은 한 줄인데 단점은 수두룩 빽빽한 것도 모욕적이지만 작성자 이름도 없다니 익명의 테러를 당한 기분이었다. 니들이 이런 식으로 나올 수록 내가 니들에게 계약금을 돌려줄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누군지 알아내고야 말겠다.


모니터에 작성자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지만 대충 짐작은 됐다. 보통 영화사에서 이런 모니터를 작성하는 건 기획팀 막내나 인턴이다. 양서연 아니면 조재웅인데.. 양 피디는 아닐 것이고 높은 확률로 조 피디일 것이다. 언젠가 꼭 감독이 되고 싶다고 했으니 데뷔 하자마자 폭망 후 10년째 놀고 있는 내가 우습고도 한심했겠지. 지는 다를 줄 알 게 분명하고. 


괘씸한 건 석 팀장이다. 양서연이든 조재웅이든 모니터를 누가 작성했든 이걸 감독에게 건네주라고 한 건 석 팀장일 것이므로 석 팀장의 책임인 것이다. 석 팀장은 이 따위 모니터를 감독에게 다이렉트로 보여주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당장이라도 감독 방을 뛰쳐 나가 시나리오 모니터랍시고 던져 준 A4를 찢어 발겨서 면전에 뿌려주고 싶었으나 일단은 꾹 참기로 했다. 지난 10년 간 이보다 험한 꼴도 많이 겪었다. 사실 이 정도는 별 거 아니다. 참을 만 하다. 고작 이런 걸로 뚜껑이 열린다면 그거야말로 감독실격이지. 무엇보다 폭망 후 여기가 4번째 영화사다. 더 이상은 불러주는 곳도 갈 곳도 없다. 


그냥 다 때려치우고 시나리오 공모전에나 올인 할까? 


만약 대상을 받는다면 그나마 폭망 감독이라는 불가촉 천민 신분에서 업그레이드가 가능할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폭망 감독으로 차기작을 준비하는 건 난이도가 너무 높다. 바로 그 때 두 달 전쯤 개최된 시나리오 공모전에 오래 묵혀뒀던 시나리오 몇 편을 응모 했던 사실이 떠올랐다. 공모전 공고가 뜬 걸 보자마자 로또 사는 심정으로 응모했는데 응모했다는 사실조차 까먹고 있었다. 슬슬 수상자들에게 연락을 돌릴 때가 된 것 같은데 아직까지 나에게 연락이 없는 걸 보니 심사 중인게 분명하다.


오늘 밀리언 필름에서 나가리 통보를 받고 다음 주 쯤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으면 얼마나 통쾌할까? 생각만 해도 행복해지려는데 부르르 핸드폰 알림이 왔다. 확인해보니 내가 아무도 모르게 비밀리에 운영하는 블로그에 새로운 댓글이 달렸다는 알림이었다. 


이 블로그는 내가 폭망 감독 10년을 버틸 수 있었던 비결이다. 


나는 폭망 감독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폭망 감독으로서의 비참한 현실을 부정하고 싶을 때마다 슬그머니 튀어나오는 내 안의 부캐가 존재한다. 애널맨. 세상이 알고 있는 나의 본캐는 폭망 감독이지만 부캐는 파워 인플루언서 영화 리뷰어 애널맨인 것이다. 내가 애널맨이라는 사실은 당연히 아무도 모른다. 알리지도 않았고 알려져서도 안 된다. 


특기는 영화 혹평. 남이 애써 만든 영화를 잘근잘근 조목조목 혹평하고 있노라면 내가 저 영화 감독보다는 낫다는 우월감과 함께 폭망 감독이라는 사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고 가끔씩 ‘하트’를 눌러주는 팬도 생긴다. 세상 모든 영화의 평점을 ‘꼴리는 영화’ 수준으로 하향 평준화 시키는 게 인생의 목표라도 되는 듯 작정하고 악평을 올려서 평점을 낮춘다. 포털 영화 싸이트에 짧게 올리는 관람평은 단검, 애널맨이라는 이름으로 비밀리에 운영하는 블로그에 올리는 리뷰는 장검이고 영화에 따라 둘을 번갈아 가며 사용한다.


나의 부캐 애널맨 블로그에 무슨 비밀 댓글이 달렸는지 나중에 확인해도 되지만 강 대표 미팅이 금방 끝날 분위기가 아니어서 주변에 나를 보는 시선이 없는 걸 살핀 후 애널맨 블로그 계정에 조심스레 들어가보았다. 새로운 비밀 댓글은 밀리언 필름이 야심차게 수입해서 개봉한 SNS 스릴러 영화 ‘구독해주세요’를 “노잼이라서 구독 해지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잘근잘근 혹평한 포스팅에 달려 있었다.


‘ㅂㅅ 니 영화나 잘 만들어’ [작성자 : 난니맨]


작성자가 난니맨? 어째 아이디가 익숙한 느낌인데 작성 시간을 보니 방금 전이다. 그리고 난니맨이라는 아이디를 어디서 봤는지 생각하다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최경진 감독 직업 바꿔라. 아 짜증난다. 이걸 영화라고 찍었냐?’ [작성자 : nani****]


애널맨 블로그에 비밀 댓글을 단 ‘난니맨’과 포털 사이트 ‘꼴리는 영화’ 관람평에 악평을 올린 ‘nani****’이라는 아이디가 유사했다. ‘nani****’과 ‘난니맨’이 동일인물이란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이 놈은 ‘꼴리는 영화’ 최경진 감독이 애널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알았지? 어떤 놈이지? 난 지금까지 내가 애널맨이라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 하지 않았고 들킨 적도 없다.


난니맨 이 놈은 단순 악플러가 아니다. 나의 데뷔작 ‘꼴리는 영화’ 관람평에 내 이름 석자를 언급하며 악평을 단 것도 모자라 지난 수 년간 아무도 모르게 비밀리에 운영 중인 블로그에까지 와서 비밀 댓글을 달았다. 그것도 내가 지금 일하고 있는 영화사에서 야심하게 수입해서 개봉했다가 흥행에 실패한 SNS 스릴러 영화 ‘구독해주세요’를 처참하게 혹평한 포스팅에;;


뭔가 노림수가 있는 건 분명한데 내가 애널맨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와 이렇게 정체를 숨겨가면서까지 나를 괴롭히는 이유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어쩐지 악플 테러 정도로 끝나진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도 들었다.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러는 거지? 


이전 05화 내가 잘 나가는 감독이면 이렇게 후딱 헤어지진 않겠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