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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nn Sep 27. 2024

폭망 감독이지만 차기작은 찍고 싶어


밀리언 필름에는 미련 없다.


밀리언 필름과는 오늘 미팅이 마지막이어도 상관없지만 기획팀 막내 양서연 피디와는 하루라도 더 보고 싶은데 그러려면 ‘공소시효’가 메이드 되어야 한다. 내가 밀리언 필름 소속 감독이 아니라면 나보다 열 다섯 살 어린 양 피디와는 따로 연락하고 지낼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쩐지 오늘이 마지막일 것 같아 벌써부터 서운함이 밀려왔다.


이렇게 갑자기 미팅 시간을 바꾼다는 얘기를 석 팀장이 아니고 기획팀 막내 양 피디가 회사 전화로 한 것도 못 마땅했다. 내가 아무리 폭망 감독이라 해도 이건 예의가 아니다. 미팅 시간이 오후 2시인 것도 불쾌했다. 4시도 애매했는데 2시는 애매할 것도 없다. 밥은 집에서 먹고 오거나 가서 먹으라는 얘기다. 차라리 3시 미팅이라면 끝나고 함께 이른 저녁을 먹을 수도 있는 애매한 시간이지만 2시면 얄짤없다. 


강 대표와의 1:1 미팅을 2시부터 보통 식당들 브레이크 타임이 끝나는 5시까지 할 리는 없으니 밥은 사주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사 표시인 셈이다. 그냥 자기가 하는 말만 얌전히 듣고 믹스 커피 또는 티백 녹차나 한 잔 마시고 꺼지라는 얘기다.


여러모로 석 팀장이 원망스러웠다.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는 건 피차 부담스러울 수 있으니 이해가 되는데 회의 전에 한 시간 정도 일찍 불러서 간단하게 점심 한 끼 사 먹이는 것도 아깝단 말인가? 밀리언 필름 측이 통보한 2시 미팅의 저의를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 한 켠이 먹먹해졌다. 내가 각색한 ‘공소시효’가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확 엎을까? 아니다. 이러면 안 된다. 내가 잘 나가는 감독도 아닌데 연락을 막내가 하면 어떻고 대표가 하면 어떻고 미팅 시간이 오후 2시가 아니라 새벽 2시면 어떠랴. 대표가 나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는 게 중요한 거다. 어차피 밀리언 필름 아니면 나를 찾는 곳도 없지 않나. 언제까지고 방 구석에 처박혀 내 영화 평점 검색이나 하고 익명의 악플러 신상이나 털겠다고 탐정 놀이나 하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다.


강 대표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지에 집중하자. 어쩌면 밀리언 필름 오리지널 아이템 ‘공소시효’ 말고 다른 아이템을 제안할 수도 있다. 물론 그러려면 추가 계약을 해야겠지? 계약금을 더 줄 분위기는 아닌데.. 혹시 감독 계약인가? 


맨 처음 석 팀장으로부터 ‘공소시효’ 각색 의뢰를 받았을 때 내 아이템으로 감독 준비를 하고 있어서 곤란하다고 하니까 일단은 각색 계약을 하고 각색 결과가 나쁘지 않으면 감독 계약을 긍정적으로 검토주겠다고 했었다. 각색 고를 보낸 후 답이 오는데 석 달이나 걸린 건 그 동안 투자사와 배우들에게 시나리오를 보내고 답을 기다리느라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드디어 그린라이트가 켜진 것이다!


에이.. 진짜 이런 거 그만 하자. 헛된 기대는 노화의 지름길이다. 몇 달 전 밀리언 필름의 답을 기다리다 지쳐 내가 직접 주변 지인들에게 ‘공소시효’를 돌려보고 이미 반응을 확인한 바 있지 않았던가. 놀랍게도 재미있다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설상가상 재미가 있고 없고를 떠나 듣지 말았어야 할 말까지 들어 버렸다.


지금까지도 ‘꼴리는 영화’의 제작 실장이던 오남영 피디의 입에서 나온 절대로 듣지 말았어야 할 한마디를 잊을 수가 없다. 


밀리언 필름의 답을 기다리다 지쳐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모니터를 돌릴 때 오 피디에게도 시나리오 모니터를 부탁했었다. 오 피디가 ‘꼴리는 영화’ 시절과는 달리 메이저 투자 배급사의 블럭버스터 텐트폴 작품의 프로듀서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건너건너 들었기 때문이다.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밀리언 필름에서 짤리고 갈 데 없어지면 오 피디가 불러줄 지도.


오 피디는 내 전화를 받고는 엄청 바쁜 척 하더니 일주일 뒤 자기가 일하는 사무실 근처의 카페에서 보자고 했다. 이제와 생각하면 자기가 너무 바쁘니 30분 이상 시간을 내 줄 수는 없다고 했을 때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



오 피디가 오후 1시에 보자고 해서 나는 12시 50분에 카페에 도착해 창가 좋은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데 오 피디는 무려 40분이나 늦게 나왔다. 하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커녕 그런 기색도 전혀 없었고 유명 감독의 블럭버스터 텐트폴 작품의 프로듀서로 참여 중이어서인지 ‘꼴리는 영화’ 제작 실장이던 시절과는 달리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옛날엔 오 피디가 나에게 잘 보이려고 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내가 오 피디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는지 오 피디가 내 쪽으로 다가오자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졌다.


“피디님 안녕하세요!”

“감독님 오랜만이네요! 어떻게 지내셨어요?”

“그냥 열심히 다음 작품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와 그런데 피디님! 안 본 사이에 정말 멋있어지셨는데요? 잘 나가셔서 그런가요? 하하.”

“잘 나가긴요. 그냥 열심히 하는 거죠.”


나보다 2살 많은 오 피디는 촌스럽고 볼품없는 개저씨 스타일로 유명했는데 이제 잘 나가는 작품의 프로듀서랍시고 어울리지도 않게 세련된 스타일의 옷을 걸치고 있었다. 안경은 물론이고 운동화조차 제법 비싸보였다. 살짝 우스웠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우리가 안 본지 한 3~4년 됐나요? 무슨 영화 뒷풀이 때 본 것 같은데..”

“그런 것 같아요. 아.. 벌써 그렇게 지났다니! 시간 빠르네요. 저 이러다 올림픽 감독 되겠어요? 월드컵 감독인가? 하하.”

“올림픽 감독이라도 되면 다행이죠. 영화감독이 4년에 한 편씩 만들면 훌륭한 거잖아요. 감독님도 아시겠지만.”

“당연하죠. 빨리 차기작을 찍어야 하는데.. 이러다 10년 넘기겠어요. 하하.”

“그래서 말씀인데.. 제가 이런 말씀 드려도 되는 지 모르겠는데 진짜 오해 하지 말고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네? 걱정 말고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저 시나리오 욕 먹었다고 삐지는 그렇게 옹졸한 사람 아닌거 아시잖아요.”

“흠.. 시나리오 쓰시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고요.”

“별 말씀을요. 다들 그 정도는 하잖아요.”


그 때까지만 해도 오 피디가 내 시나리오 대한 허심탄회한 쓴 소리를 해 주려는 줄 알았다. 이미 마음의 준비도 하고 있었고. 하지만 오 피디는 내 시나리오 모니터를 해 주려고 나온 게 아니었다. 


시나리오 쓰느라 고생했다는 하나 마나 한 말을 던진 이후 본인이 예고한 30분이 다 지나도록 시나리오 얘기는 한 마디도 없이 자기가 지금 준비하는 영화에서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에 대한 자랑과 얼마 전에 대출을 잔뜩 끼긴 했지만 강남 아파트 장만에 성공한 얘기만 줄줄이 늘어놓았다. 


이러다 정작 시나리오 얘기는 한 마디도 못 듣겠다 싶어서 매우 조심스럽게 오 피디의 말을 끊고는 아까 시나리오에 대해 하시려던 말씀이 뭔지 궁금하다고 했더니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흘러 나왔다.


“음.. 감독님 정말 죄송한 말씀인데 감독님 같은 경우는 시나리오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네? 그럼요?”

“사실은 감독님 시나리오 읽지도 않았어요. 제가 요즘에 정말 시간이 없거든요.”

“아 그러셨군요. 어이쿠. 엄청 바쁘신 거 알면서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그래도 뵙자고 한 건 진짜 이런 말씀 드려도 되는 건 지 모르겠는데.. 언제 기회가 되면 꼭 한 번 말씀 드리고 싶었거든요.”

“정말 편하게 말씀 주세요.”

“진짜 진짜 오해는 하지 마시고요.”

“우리 사이에 오해라뇨.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

“감독님 이름을 바꿔보시는 건 어떨까요?” 

“이름을.. 바꿔요?”

“네. 아시다시피 감독님 전작 이미지가 너무 안 좋잖아요. 아무리 시나리오가 좋아도 감독님 이름으로는 투자 캐스팅이 안 될 거에요.” 

“하하.. 그런가요?”

“감독님도 아시잖아요. 제목부터 좀.. ‘꼴리는 영화’라니.. 흥행도 폭망했고요.” 


오 피디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너무 불쾌해서 실소 밖에 안 나왔다.


“데뷔하고 10년째 고생하고 계신 감독님이 더 잘 아시겠지만 아예 경력이 한 편도 없는 신인 감독이라면 아무도 거절할 수 없는 좋은 시나리오를 써서 훌륭한 제작자를 만나면 언젠간 데뷔 기회를 잡을 수도 있겠지만 감독님에겐 치명적인 과거가 있잖아요. 그것도 처절하게 폭망한.. 제목도 한 몫 했죠. ‘꼴리는 영화’가 뭔가요? 하여간 방 대표가 나쁜 놈이에요. 제목 바꿔서 몇 푼이나 더 벌겠다고..”


애써 외면하고 있던 과거를 남의 입을 통해 들으니 더 고통스러웠다. 


나도 안다. 동급이라면 폭망 감독의 시나리오보다는 신인 감독의 시나리오가 메이드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사실은 나도 ‘꼴리는 영화’ 감독이라는 수치스러운 과거를 세탁하기 위해 개명 고민을 안 해 보진 않았다. 하지만 이 좁은 바닥에서 내가 ‘꼴리는 영화’ 감독이라는 사실을 영원히 숨길 순 없을 것이고 언젠가 정체가 밝혀지면 꼴이 더 우스워질 것 같아서 참고 있었을 뿐이다. 


오 피디의 얘기를 더 듣고 있다가는 내가 무슨 짓을 할 지 모르겠어서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은 내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지 오 피디는 주제도 모른 채 계속 헛소리를 늘어 놓았다.


“정말 죄송한데 저는 ‘꼴리는 영화’ 제작 실장 경력은 필모에서 뺐습니다. 저만 이런 게 아니라는 거 감독님도 아시지 않나요?”


이미 알고 있다. 영진위 싸이트에서 검색해보면 바로 나온다. 스태프들 뿐 아니라 배우 중에서도 필모에서 ‘꼴리는 영화’를 삭제한 이가 몇 명 있다. 후반 작업 때 어떻게든 배우들을 예쁘고 멋있게 나오게 하려고 애를 썼건만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스태프들은 몰라도 배우들이 그러는 건 이해해주셔야 해요. 감독님이 배우라면 ‘꼴리는 영화’ 출연 경력이 자랑스럽겠어요? 그리고 그 감독의 차기작에 출연하고 싶으실까요? 19금 에로 떡영화 감독의 차기작에?”


19금 영화로 데뷔하겠다고 할 때 주변에서 이런 우려가 없었던 건 아닌데 어쩐지 우려가 현실이 된 것 같다.


오 피디의 이름을 바꾸라는 조언은 한 마디로 너 따위는 영화감독 때려 치우란 말이다. 감독은 가오가 생명이다. ‘꼴리는 영화’의 감독이라는 과거를 세탁하기 위해 이름을 바꾼다면 잠깐은 통할 지 모르나 결국 모두의 비웃음 또는 동정만 살 것이다. 


폭망 감독이 얼마나 차기작을 찍고 싶었으면 이름까지 바꿨겠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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