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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nn Sep 27. 2024

나죽는꼴 보 기싫음빨 리사과해


지금으로선 유일한 단서는 관람평을 작성한 ‘nani****’란 아이디 뿐이다. 


무슨 뜻일까? 


나니? 남자로 추정되지만 설마 오나니맨의 나니는 아닐테고.. 혹시 나니맨이 아니고 난니맨인가? 그렇다면 난니는 무슨 뜻이지? 난 니가 지난 여름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다의 난니? 혹시나 해서 나니맨으로 검색을 해 봤으나 아무런 단서도 나오지 않았다. 난니맨 역시 마찬가지. 


보통은 아무리 심한 악플이라도 금방 잊어버리는 편이지만 관람평에 내 이름 석자까지 거론해서인지 잊힐 것 같지 않았다. 어쩐지 나를 잘 아는 놈의 짓일 것 같다는 심증이 굳어졌다. 그리고 놈은 아니지만 이런 짓을 벌일 만한 유력한 용의자가 딱 한 명 떠올랐다.


영화과 동기 조지선.


지선은 나의 10년 전 데뷔작 ‘꼴리는 영화’가 자신의 영화과 졸업 작품 시나리오를 표절한 거라며 공개 사과를 요구했다. 나는 지선의 졸업 작품을 표절하기는 커녕 읽어본 적도 없어서 그냥 무시해버렸더니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며 잊을 만 하면 한 번씩 협박 문자를 보내왔다.


‘넌나 를자 살시킬생 각이냐? 나죽는꼴 보 기싫음빨 리사과해.사과하라고!!!!’


3년 전에 지선이 마지막으로 보낸 문자다. 느낌표가 4개나 붙은 걸 보니 죽어버리란 뜻인가보다. 아님 죽어버리겠다는? 이 문자를 마지막으로 연락이 없어 정말 자살해버린 건가 걱정하기도 했지만 결혼식이나 장례식에서 만난 동문들로부터 종종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걸 보면 아직은 잘 살고 있는 듯 했다. 


‘최경진 감독 직업 바꿔라. 아 짜증난다. 이걸 영화라고 찍었냐?’ [작성자 : nani****]


지선이 보낸 문자와 내 영화에 달린 관람평은 문체가 비슷한 느낌이다. 그리고 어쩐지 지선이라면 충분히 이런 악플을 남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절은 도둑질이고 도둑질을 그냥 넘어갈 수 없으니 공개 사과하라며 수년 간 문자와 이메일을 보냈는데 내가 끝끝내 답을 안 주니 공개적으로 악플을 달아 버린 것이다. 


굳이 내 이름 석자를 언급한 건 자기에게 직접 연락을 하라는 얘기겠지. 그런데 지선이 보내온 문자와 이메일들을 다시 한 번 꼼꼼히 살펴 보니 악플러 nani****와 동일 인물인 것 같진 않다. 지선의 문자와 이메일들은 띄어쓰기가 프리스타일인데 nani****의 관람평은 띄어쓰기가 정확하다. 아무래도 지선은 nani****이 아닌 것 같다. 


표절에 대해서는 결백하지만 마냥 지선을 무시하기엔 우리 사이가 아무 것도 아닌 건 아니다. 새내기 시절 지선과 썸을 타려다 말았기 때문이다. 대쉬는 내가 먼저 했다. 왜 그랬는지 생각해보면 지선의 얼굴보다는 개성과 재능에 혹한 것 같다. 정확히는 지선이 1학년 1학기 시나리오 수업 때 쓴 단편 시나리오에 홀렸다. 재개발을 앞둔 아파트 단지에서 벌어지는 정체불명의 존재와 주민들 간의 사랑 이야기였는데 너무 재밌었고 지선의 차기작이 궁금해서 접근했다가 호기심을 사랑으로 착각한 것이다. 


지선도 내가 싫진 않았는지 가볍게 데이트를 했고 뽀뽀까지 할 뻔 했는데 그 이상 관계가 발전되지 않은 이유는 성격이 안 맞아서다. 지선의 기복이 심하고 괴팍한 성격을 도저히 맞출 수가 없었고 결정적으로 지선의 다음 시나리오들이 첫 단편만큼 흥미롭지가 않았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가 없고 그냥 이상하기만 했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도 비슷했지만 지선은 그래도 꿋꿋이 시나리오를 썼고 졸업 작품으로도 장편 시나리오를 썼는데 내가 그 장편 시나리오를 표절했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난 지선의 졸업 작품 시나리오를 제대로 읽지도 않았다. 졸업하고 나서도 한참 뒤 내가 조감독으로 활동하던 시절 지선이 시나리오 모니터를 부탁한다며 이메일로 시나리오를 보내긴 했다만 초반만 잠깐 읽고는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가 없어 컴퓨터에서 삭제해버렸다. 굳이 혹평을 하고 싶진 않아서 시나리오 모니터를 차일 피일 미루자 연락이 두절되어 버렸다가 ‘꼴리는 영화’ 개봉 직후 자기 시나리오를 표절했다며 사과하라고 자살 협박 문자를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언론사에 정식으로 공개 사과문을 올리지 않으면 유서에 나의 모든 악행을 폭로하고 자살해버리겠다고 했는데 왜 언론사 공개 사과를 요구한 걸까? 유명해지고 싶어서? 그렇게 유명해져서 뭐하게? 예전에도 그랬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폭로하겠다는 나의 악행이 뭔지도 모르겠고. 만약 지선이 예뻤으면 어땠을까? 안타깝게도 지선은 예쁜 편은 아니라서 잘 상상이 안 된다.


지선이 나에게 보낸 협박 문자 그대로 유서에 내 이름 석자를 남기고 자살해 버린다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보았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의 폭망 데뷔작을 다시 세상에 알릴 순 있을 것이다. 어느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이 자신의 작품을 표절 당한 억울함에 자살을 선택했다는 뉴스가 인터넷에 퍼진다면 사람들은 도대체 누가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갔는지 신상을 털 것이고 그렇게 되면 ‘꼴리는 영화’는 세상에 널리 알려질 것이다. 


물론 ‘꼴리는 영화’를 가장 확실히 부활시킬 수 있는 방법은 감독의 자살이겠지만 그럴 생각은 전혀 없다. ‘꼴리는 영화’가 내 필모그래피의 마지막 작품인 채로 눈을 감을 순 없기 때문이다.


‘꼴리는 영화’에 달린 관람평과 협박 문자의 띄어쓰기 패턴이 다른 걸 봐선 지선은 nani****이 아닐 가능성이 크지만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니 전화해서 물어나 볼까? 전화해서 뭐라고 하게? 왜 악평을 달았냐고 따지게? 니가 내 영화에 악플을 달았냐고 묻는다고 순순히 그랬다고 할 리가 없을 것 같고 지선이라면 굳이 정체를 숨기고 악평을 달 이유가 없다. 괜히 연락했다가 자기 졸업 작품 표절 한 거 사과하라는 협박 문자나 다시 보내올 것 같다. 아서라. 아예 연락 자체를 말자.


꿈자리가 흉흉했는데 눈 뜨자마자 석 팀장의 폭언에 나를 아는 놈의 소행이 분명한 악평 테러까지 연달아 당해서인지 현기증이 밀려왔다. 일진이 사납다. 이불 밖으로 나갔다간 어쩐지 지금까지 당한 것 이상의 험한 꼴을 보게 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에 불안 초조해 하고 있는데 또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해보니 02로 시작하는 밀리언 필름의 사무실 번호다. 보통 회사에서 용건이 있으면 좀 아까 석 팀장처럼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는데 도대체 누가 회사 번호로 전화를 했나 의아해하며 전화를 받았더니 기획팀 막내이자 안 꾸며서 그렇지 본판이 미인이라 꾸미면 예쁜 스타일인 스물일곱살 양서연 피디였다. 


“감독님 안녕하세요! 밀리언 필름 기획팀 양서연입니다.”


양 피디는 자기 핸드폰이 있으면서 왜 회사 번호로 전화를 걸었을까? 설마 자기 개인 번호가 폭망 감독의 핸드폰 통화 목록에 남는 게 싫다는 뜻은 아니겠지? 마지막으로 영화를 만든 게 벌써 10년이 넘어 가는 감독 같지도 않은 감독이니 딱히 가까워지기 싫다는 뜻일까? 


만약 그렇다면.. 이해한다. 내가 스물일곱살 양 피디라도 그럴 것 같다. 아니면 정말 일 때문에 전화를 하는 거니까 사무실 전화로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양 피디와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고 얘기한 게 벌써 석 달도 훨씬 전이다보니 양 피디의 속내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아! 양 피디님이구나? 오랜만이네요! 잘 지냈어요?” 


양 피디의 목소리에 억지 하이톤으로 반갑게 전화를 받은 나와는 달리 양 피디는 차분하고 사무적인 어투로 지난번에 감독님이 보내주신 시나리오와 관련해서 대표님이 할 얘기가 있다고 하시니 만약 선약이 없으시면 오늘 오후 2시에 회사로 오실 수 있으시냐고 물었다. 오늘 오후 2시? 시계를 보니 11시 30분이었다. 2시간 반 뒤에 보자는 거였다. 


“아까 석 팀장님은 4시에 보자고 했는데요? 공유가 안 됐나봐요?”

“아 그게.. 저희 일정이 변경돼서요. 대표님이 조금 일찍 뵙고 싶다고 하셔서.. 아니면 다른 날이 괜찮으실까요?”

“아.. 아니요.”


우리 집에서 밀리언 필름까지는 지하철로 1시간 거리다. 지금 당장 일어나서 밥 먹고 씻고 나갈 준비를 하면 대충 시간을 맞출 순 있다. 그래도 너무 흔쾌히 그러겠다고 하면 없어 보일 것 같아 일정을 확인하는 척 잠깐 뜸을 들인 후 점심 때 선약이 있긴 하지만 중요한 일은 아니니 취소하겠다고 했다.


“네. 알겠습니다 피디님. 2시까지 갈게요.”

“감사합니다. 이따 뵙겠습니다 감독님!”


갑작스런 약속 시간 변경은 짜증났지만 오랜만에 양 피디를 볼 생각하니 살짝 기분이 업 되었다.


기획팀 막내 양서연 피디는 석 달 전까지만 해도 정직원은 아니고 인턴이었는데 아직까지 회사에 있는 걸 보니 정직원이 됐나 보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인 서울 대학 영화과 출신에 미국 어학연수 1년에 배우 지망생이라 해도 믿을 법한 미모의 소유자이고 키가 크고 날씬한데다 비율까지 좋고 집도 잘 산다고 하니 내가 강 대표라도 양 피디는 당연히 정직원이다. 


당연히 남자 친구도 있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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