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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nn Sep 25. 2024

이걸 영화라고 찍었냐


이제 5시간 뒤면 나는 그냥 폭망 감독이 아니라 듣보잡 신생 영화사에서조차 버림 받은 폭망 감독이 될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인 건 내가 밀리언 필름이란 신생 영화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최측근 한 둘 빼고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더 다행인 건 석 달이면 새 시나리오의 초고 정도는 충분히 쓰고도 남을 시간이고 실제로 한 편 완성 직전이라는 사실이다. 감독으로서의 생존 본능이 발동 했는지 나도 모르게 대안을 준비하고 있던 것이다.


‘버진 어게인’


새 시나리오 제목이다. 30대 후반의 권태로운 신도시 유부녀와 20대 후반의 혈기왕성한 꽃미남 수영강사의 뻔하지만 치명적이고 끈적끈적한 불륜 이야기인데 오늘 밀리언 필름에서 최종적으로 나가리 통보를 받으면 당장 내일부터 ‘버진 어게인’을 여기저기 돌려 볼 생각이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쓴 건 아닌데 어쩐지 마지막 통화 때 석 팀장의 “회의 중”이라는 목소리의 톤앤매너가 쌔하긴 했다. 자기는 바쁘고 잘 나가는 기획팀 팀장이므로 시나리오도 못 쓰는 폭망 감독 따위와의 통화는 전혀 중요치 않다는 느낌이었다. “회의 중”이라며 전화를 바로 끊었으면 회의가 끝난 후 곧장 전화를 다시 걸어주는 게 당연한 건데 다음 날에도 그 다음 주까지도 전화가 없어서 이대로 나가리 될 마음의 준비는 진작에 하고 있었다.


밀리언 필름과의 1년 전 첫 만남부터 석 달 전 통화까지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 이전에 ‘공소시효’의 초고를 쓴 작가가 있었다는데 누구인지는 안 알려줘서 모른다. 자기랑 일 하나 같이 하자는 석 팀장의 연락을 받고 일을 시작했고 기획팀 피디들과 대여섯 번 정도 기획 회의를 거치며 시놉시스와 모니터를 주고 받길 반복한 후 이제는 시나리오 단계로 넘어가도 되겠다는 컨펌을 받고 열심히 초고를 써서 회사로 보낸 게 석 달 전까지의 상황이다. 


내가 쓴 초고를 읽고 자기들끼리 무슨 의견을 주고 받았는지 왜 이제와서 보자고 하는 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계약 해지나 환불 요청만 아니면 아무 상관 없다. 어차피 난 니들이 시키는 대로 쓴 죄 밖에 없는 폭망 감독이니까. 너무 시키는 대로 쓴 게 잘못 같기도 하다만 뭐 이따가 강 대표를 만나보면 알 수 있겠지.



***



집 안이 조용한 걸 보니 다들 나간 모양이다. 


이불을 걷어 차고 한껏 기지개를 편 후 핸드폰으로 내 영화 평점과 관람평을 체크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평점과 관람평 체크는 10년 전 데뷔와 동시에 폭망 이후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하는 모닝 루틴이다.


나의 데뷔작 ‘꼴리는 영화’는 10년 전에 개봉은 했다만 극장에 제대로 걸리지도 못하고 내려갔다. 걸렸다기보다는 극장 스크린을 스쳐 지나갔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말 그대로 폭망 그 자체였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제작사에서 마케팅을 제대로 안 해 준 탓이 크다. 입소문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영화를 아무리 잘 만들었더라도 뭘 알아야 보러 올 것 아닌가. 


극장에 걸려 있던 시간이 워낙에 짧았던 탓에 아직 개봉을 안 한 것 같기도 하고 어쩌다 새벽에 케이블 채널에서 영화가 나오기라도 하는 날엔 유명 평론가나 인플루언서의 눈에 들어 재평가 받지 않을까 하루 종일 조마조마 두근두근 설레기도 한다. 


이런 경우도 가능하다. 다음 작품을 애타게 찾고 있는 어느 탑스타가 밤에 잠이 오질 않아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내 영화를 보는데 별 생각없이 보다 보니 딱 자기 스타일인 거다. 그래서 곧장 매니저에게 연락해 저 영화를 만든 감독과 미팅을 잡아보라고 명령하면 매니저는 내 전화 번호를 수소문해서 나에게 전화할 수도 있으므로 핸드폰에 모르는 번호가 뜰 때마다 심장이 벌렁댔지만 아직까지 그런 일은 없었다.


아침에만 내 영화 평을 검색하는 건 아니다. 하루 종일 틈만 나면 찾아본다. 개봉 후 10년이 지났고 다시 극장에 걸릴 가능성도 희박하지만 온라인의 영화 감상 싸이트 몇 군데에선 지금 이 순간에도 감상 가능하기에 어떻게 보면 아직도 상영 중인 셈이어서 폭망으로 끝났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게 개봉한지 10년 넘은 영화를 무슨 이유로 보는지는 모르겠지만 반 년에 한 두개 꼴로 관람평이 달렸다. 십중팔구 조롱성 악평이지만 악평이라도 누군가 내 영화를 보고 평을 남겨줬다는 사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아직도 내가 감독인가 의심스럽다가도 새로운 블로그 리뷰나 관람평이 한 건 달릴 때마다 감독이라는 정체성의 유효기간이 일 년 정도는 연장된 기분이 든다. 그러다 보니 내 영화 검색에 중독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침, 점심, 저녁 각각 한 번씩 하루에 최소 세 번은 검색을 하고 틈틈이 출연 배우들의 근황도 체크했다. 폭망 이후 주연배우 한 명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연락을 주고 받거나 만난 적은 없지만 그래도 내 배우라는 생각에서다. 


뉴스 검색은 기본이고 배우들과 관계가 있는 온갖 커뮤니티 사이트들을 모조리 체크한다. 내 배우들 중 누군가는 인스타, 페이스북 또는 어딘가의 팟캐스트나 방송에서 내 영화에 대해 이야기 하는 걸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는데 아직까지 그런 적은 없었다. 물론 내가 놓쳐서 모르는 것일 수는 있다.


유튜브도 꼼꼼히 찾아본다. 잊을 만 하면 한 번씩 이름 모를 유튜버가 내 영화의 리뷰나 요약 영상을 채널에 업로드하기 때문이다. 내 영화에서 19금 장면만 모아 자극적인 제목을 단 영상이 대부분이지만 어떤 영상의 조회수는 무려 100만회에 육박했다. 조회수가 100만이든 1000만이든 나에겐 한 푼도 떨어지지 않는 건 아쉽지만 덕분에 감독으로서의 유효기간이 조금이나마 연장된 기분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어느 날 갑자기 유명 스타나 평론가가 유튜브에서 내 영화를 보고 인스타나 페이스북에 재밌다고 한 마디 올려줄 수 있는 것이고 자고 일어나보니 유명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 일 모르는 법이고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완전히 잊히지만 않는다면 어떤 식으로든 떡상과 역주행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평점 관리도 중요하다. 평점이 지나치게 낮으면 영화가 별로일 거라는 선입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꼴리는 영화’의 평점은 지난 몇 년 간 5점 대를 유지하고 있는데 그 이하로 떨어지면 작업에 들어갔다. 5점 미만의 영화는 당장 나부터도 보고 싶지가 않고 감독도 무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영화사 미팅을 앞두고 있을 때는 그 어느 때보다 평점 관리에 신경을 썼다. 5점 이하로 내려가면 당당하지 못하고 의기소침해지더라.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지?


4.9점?!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5.1점이었던 평점이 하루 아침에 0.2점이나 하락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해보니 지난 밤 사이에 0.5점 짜리 관람평이 추가되어 있다. 평점이 5점 이하로 떨어질 때마다 가족, 친구, 친척도 모자라 온갖 지인들의 아이디를 총동원해 10점을 준 덕분에 간신히 5점 대를 사수하고 있었는데 누군가 나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0.5점을 줘 버린 것이다.


이제는 새로 동원할 아이디도 없다. 어떤 새낀지는 모르지만 날 엿먹이려고 작정한 것이다. 이 새끼 때문에 졸지에 밀리언 필름 강 대표와의 미팅은 평점 5점 짜리 감독이 아닌 4점 짜리 감독으로 임하게 됐다. 하필이면 미팅 직전에 0.5점을 주다니.. 기운이 쪽 빠졌다. 관람평은 더 가관이었다.


‘최경진 감독 직업 바꿔라. 아 짜증난다. 이걸 영화라고 찍었냐?’ [작성자 : nani****]


무플보단 악플이라고 무려 일년 반 만에 새로 추가된 관람평이라 악평이어도 반가워야 마땅하지만 전혀 반갑지가 않았다. 내 영화를 보느라 돈과 시간을 낭비 당했다는 단순한 실망이나 분노 같진 않았다. 영화에 대한 공격이라기 보다는 감독에 대한 인신공격 같았다. 


보통 일반적인 악평이라면 감독 이름 석자를 언급하진 않는다. 실제로 데뷔작에 달린 백여건의 관람평 중 감독 이름 석 자가 포함된 평은 처음이다. 도대체 어떤 놈이지? 여자는 아닐 것이다. 여자들은 어지간해서는 내 영화를 보지 않는다. 놈이 여기에만 악평을 단 게 아닐 수도 있으므로 다른 사이트의 평점 상황도 살펴보았다. 


다행히 별 이상은 없었다. 영화에 대한 악평이라기보단 감독 개인에 대한 악플이 확실했다. 악플러의 정체가 궁금한 적은 많지만 이 정도로 신상이 궁금한 악플러는 처음이다. 어쩐지 나에 대해 잘 아는 놈 같았다. 내가 관람평 하나 하나에 일희일비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악플러의 아이디는 nani****이었다. nani 뒤의 철자가 ****로 가려져 있어 답답해 죽을 것 같았다. 나니? 혹시 나니맨인가 싶어 내가 주로 사용하는 이메일에 로그인 해 naniman으로 받은 메일을 검색해봤지만 그 비슷한 아이디조차 검색되지 않았다. 적어도 나에게 저런 비슷한 아이디로 메일을 보낸 지인은 없는 것이다.


주도면밀한 놈이다. 아마도 내 영화에 악평 아니 악플을 달면 내가 아이디를 검색해서 역추적하리라는 걸 알고 있다는 듯 새로 아이디를 만든 것이다. 악플러의 아이디를 토대로 다시 한 번 구글링에 들어갔지만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엑스, 인스타, 페이스북, 블로그, 카페, 커뮤니티 게시판 등등 싹 다 뒤져봤지만 마찬가지다. 


더 이상 악플러의 신상을 털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나를 잘 아는 놈이 정체를 숨기려고 작정하고 단 악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 잡아봐라? 날 찾아봐라? 악플에 내 이름 석자를 포함시켰다는 건 우리가 서로 아는 사이라는 신호를 준 것이고 이는 자기가 누군지 알아내볼테면 알아내보라는 도발이었다.


좋다! 알아내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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