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선 깼지만 일어나긴 싫었다.
일어나봤자 좋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가 중천에 뜨도록 핸드폰만 들여다보며 이불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영화사에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감독님.. 잘 지내셨죠?”
“네넵.”
“보내주신 시나리오는 잘 읽었는데요..”
“아.. 다행이네요. 잘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게 아니고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한데.. 재미가 없어요.”
“아.. 네?”
“캐릭터가 별로고 전개도 산만하고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르겠고요. 왜 이렇게 하신 거에요?”
“그.. 그건.. 지난 번 기획 회의 내용을 충실히 반영한 건데요.”
“지난 번 회의라고요? 그게 언젠데요?”
“두 달 전인가 석 달 전인가.. 초여름이었던 것 같은데요.”
“그랬었나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구나. 일단 회의록 확인해 볼게요. 그런데 감독님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던 거에요? 의도가 있으실 거잖아요?”
“어.. 제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음.. 아..”
분명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있었던 것 같은데 가위에라도 눌린 듯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런데 전화 한 사람은 누구지?
내가 누구랑 통화 중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시나리오가 별로라고 욕을 먹고 있는 것까진 알겠는데 무슨 시나리오로 누구한테 욕을 먹고 있는 건지 사태 파악이 되질 않았다. 그러고보니 어느 영화사에서 온 전화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혹시 이거 꿈인가?
“그러니까 감독님 시나리오는 재미가 없다고요. 올드하고 구리고 너무 얄팍하기도 하고요.”
“아 네.. 죄송합니다. 피디님이 마음에 안 드셨다면 전적으로 제 잘못인 거죠.”
“제 마음이 중요한 건 아니고요 그냥 재미가 없어요.”
아.. 이렇게 또 차기작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날아가는구나. 정말 꿈이면 좋겠는데 어디선가 드르륵 드르륵 핸드폰 진동 소리가 들려왔다. 반가운 마음에 힘겹게 눈을 떠 보니 내 방 천장이 보였다.
꿈이었다. 이마가 식은 땀으로 축축했다. 꿈속에서지만 영화사 피디님으로 추정되는 누군가에게 시나리오가 재미없다고 욕을 먹으며 잔뜩 얼어 있던 탓에 온 몸이 뻐근했다. 꿈이라서 다행이지만 기분은 더러웠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이마의 식은 땀을 손등으로 닦아낸 후 부르르 떨고 있는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발신자는 밀리언 필름의 석소연 팀장이다.
몇 달 만의 통화일까?
마지막으로 본 건 계절 바뀌기 전이었으니 석 달 전 초여름 쯤이겠다. 무소식이 희소식인데 이렇게 오랜만의 연락이라면 좋은 얘기가 나올 리 없어 딱히 전화를 받고 싶진 않았지만 그래도 아직은 계약 관계가 남아 있으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에휴.. 재미없어.”
“너는 오랜만에 전화해서 한다는 소리가.. 아 왜? 뭐가 재미없다는 거야?”
“뭐긴 뭐야? 니 시나리오지. 왜인지는 몰라서 물어? 누가 이렇게 재미없게 쓰랬니! 올드하고 구리고! 구려! 너무 구리다고!”
석 달 만에 전화해서 한다는 소리가 시나리오 욕이다. 방금 전 꿈속에서도 누군가에게 시나리오가 재미없다고 욕을 먹었는데 깨자마자 또 욕을 먹다니.. 이 통화도 꿈이라면 좋겠지만 짜증 섞인 석 팀장 특유의 비음 섞인 목소리가 너무나도 생생했다. 설마 방금 전 꿈이 예지몽이었나?
“죄송요. 시나리오를 못 써서 죄송합니다. 제가 죽을 죄를 졌습니다. 부디 선처..”
“시끄러. 맨날 입만 나불대고. 그래도 못 쓰는 거 알고는 있으니 다행이네.”
“잘은 모르겠지만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다면 다 제 잘못인 거죠. 마지막 기획 회의 때 피디님들이 시키는 대로 쓰긴 했지만요.”
“또또또 변명! 넌 꼭 토를 달아.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면 어디 덧나기라도 하니? 그리고 내가 그 장면은 분명 빼라고 했는데 기어이 남겨뒀더라?”
“무슨 장면?”
“더러워서 입에 담기도 싫어! 여자들이 그런 거 싫어하니까 내가 빼라고 했어! 안 했어!”
“살인마가 혼자 방구석에서 자기 자신을 위로하는 장면 말하는 거야?”
“아우 입에 담지도 마. 더러우니까!”
“아니 살인마잖아. 살인마가 살인도 하는데 혼자서 그 정도도 못하니? 그리고 그런 장면이 있어야 빌런 캐릭터의 외롭고도 쓸쓸한 내면이..”
“닥치시고요! 그러니까 니 시나리오가 올드하다는 얘기가 나오는 거야.”
“누가 올드하다고 했는데?”
“다.”
괴롭다. 지금 잘 나가는 감독들도 못 나갈 땐 다 이런 대접 아니 취급을 받았으려나? 아무리 시나리오가 구리고 올드해도 그렇지 이건 너무 무례한 것 같다. 그래도 내가 영화 한 편을 극장 개봉시킨 엄연히 기성 감독인데 지난 석 달 간 석 팀장의 연락을 기다리며 바닥을 뚫고 지하까지 추락한 자존감이 이제는 흔적도 없이 녹아 내리고 있다.
하지만 돈 받고 글을 써 줬는데 돈 낸 사람이 재미가 없다니 할 말이 없다. 왜 재미가 없냐고! 니가 보는 눈이 없는 거라고! 따질 수도 없는 게 그 시나리오를 읽어본 다른 사람들도 재미가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석 달 전쯤 석 팀장에게 ‘공소시효’의 최종 각색 고를 보낸 이후 하도 피드백이 없어서 다름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해 믿을 만한 지인 몇 명에게 보여줘봤는데 하나 같이 별로라고 재미 없다고 했다. 올드하고 구리다고는 안 했지만.
내 잘못은 아니다.
‘공소시효’는 애초에 밀리언 필름에서 제안한 정확히는 석 팀장의 아이템이고 기획팀 피디들과의 회의 내용을 충실히 반영해서 썼기 때문이다. 백 번 양보해서 나에게 잘못이 있다면 맨 처음 석 팀장에게 아이템을 제안받았을 때부터 잘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서 그래도 한 번 잘 해보겠다고 덜컥 각색 계약서에 싸인을 해 버린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겠다.
이제와 돌이켜 보면 어차피 안 될 운명이었다. 애초에 될성 싶은 아이템은 데뷔와 동시에 폭망 후 10년째 놀고 있는 듣보 감독에게까지 오지 않는다. 누가 봐도 안 될 아이템을 폭망 듣보 감독이 잡았으니 잘 될 턱이 없다.
***
나는 시나리오를 못 쓴다.
창작의 재능이 없는 것이다. 20대에는 애써 외면했고 30대까지는 인정하지 않고 버텼지만 40대 중반에 다다른 이제는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재능이 넘치고 시나리오도 잘 썼으면 데뷔작이 그렇게까지 망하진 않았을 것이고 최소한 이 모양 이 꼴로 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10년 전 데뷔와 동시에 폭망 후 지금까지 겪어 온 그 모든 수모와 험한 꼴들은 다 내가 시나리오를 못 쓰기 때문에 벌어졌다고 봐야 한다.
“으이그.. 누가 19금 떡 영화 감독 아니랄까봐! 내가 야설 써달랬니? 빌런이 혼자 방구석에서 그 짓이나 하고 있고 니가 배우라면 이런 영화에 출연하고 싶겠어? 니가 투자자라면 강남 꼬마 빌딩 대신 여기에 투자할 거야?”
“에이.. 석 팀장. 떡 영화 감독이라니.. 우리 그 얘기는 하지 말자. 내가 잘못했다고 했잖아. 사과도 했고.”
애초에 내 아이템이 아니고 기획팀이 시키는 대로 썼지만 재미가 없는 것은 다 내 잘못인데 ‘19금 떡 영화 감독’ 발언은 석 팀장이 선을 넘은 거다. 안 그래도 데뷔와 동시에 폭망하고 10년째 이 회사 저 회사 전전하며 영화판에서 밀려나고 있는 것도 서러운데 시나리오를 못 썼다는 이유로 인신공격까지 당하는 건 옳지 못한 일이다.
게다가 석 팀장은 내가 ‘19금 떡 영화 감독’이라는 타이틀을 싫어하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벌써 십수년 전 일이지만 내가 전도유망한 조감독 시절 나랑 잠깐 사귈 뻔 했던 주제에 이제 자기는 팀장이고 나는 폭망 감독이라고 너무 하대한다. 더 이상 치밀어 오르는 서러움을 참을 수 없어 나도 모르게 발끈하려는 순간 석 팀장이 젠틀하게 나왔다.
“그러니까요 감독님! 잘못한 걸 아셨으면 됐고요. 이따 오후에 시간 어떠십니까? 저희 대표님이 감독님 얼굴을 직접 보고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셔서요.”
“대표님이? 무슨 말씀인데?”
“본인이 직접 감독님 얼굴 보고 말하시겠답니다.”
밀리언 필름 강석현 대표가 나에게 직접 할 말이 있다고? 팀장이고 뭐고 확 질러버리려다 강 대표가 직접 내 얼굴 보고 할 말이 있다는 얘기에 분노가 사그라들었다. 참을 수 밖에. 참자. 여기서 화내면 나만 꼴이 우스워진다.
“아 잠깐만. 오후 일정 확인 좀 해 보고..”
당연히 아무 일 없었지만 뜸을 좀 들였다.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오늘 오후 일정 괜찮습니다.”
“그럼 4시에 뵙겠습니다.”
“4시? 5시간 뒤 4시?”
“그래. 그럼 새벽 4시겠니? 이따 사무실에서 봐.”
“밀리언 사무실에서 4시지?”
“왜? 안돼?”
“아니야. 알았어 4시까지 갈게.”
석 팀장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다른 사람과 통화할 땐 모르겠는데 나랑 통화할 땐 꼭 전화를 먼저 끊어서 다음 번엔 꼭 내가 먼저 끊으려고 작정 하지만 항상 타이밍을 놓쳤다. 그나저나 강 대표가 나를 보자고 하는 이유보다 궁금한 건 미팅 시간이었다.
왜 4시일까? 오후 2시보단 낫지만 4시는 약간 애매하다. 5시 미팅이면 끝나고 자연스럽게 저녁 식사 자리로 이동할 수 있지만 4시 미팅이면 저녁을 안 먹고 헤어질 수도 있는 시간이다. 그래도 석 달 만의 만남인데 사무실에서 할 말만 하고 끝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하지만 유명 맛집 같은 곳에 갈 예정이라면 4시에 만나서 짧고 굵게 할 얘기만 후딱 끝내고 식당이 아직 붐비기 전에 밥을 먹으러 가자는 걸 수도 있다. 이제는 불러주는 사람도 없고 외식 다운 외식을 못한지도 오래여서 맛집까진 아니더라도 저녁 정도는 사줬으면 참 고맙겠는데 사무실에서 할 얘기만 후딱 마치고 저녁도 안 먹이고 집에 보내면 마음의 상처가 하나 더 추가될 것 같아 걱정이 됐다.
이건 밥 문제가 아니고 자존심의 문제다. 데뷔작이 폭망하긴 했지만 그래도 감독이다. 듣보잡 신생 영화사 따위가 기성 감독을 이렇게 대접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그나저나 저녁을 사 준다면 메뉴는 뭘까? 소고기? 초밥? 소고기라면 한우? 이도 저도 아니면 삼겹살? 설마 국밥은 아니겠지. 이왕이면 깔끔하게 초밥이 좋겠지만 지난 달에 밀리언 필름에서 수입해서 야심차게 개봉한 SNS 스릴러 영화 ‘구독해주세요’의 흥행 성적이 시원찮은 관계로 끽해야 삼겹살일 듯 했다.
통화 내역을 확인해보니 석 팀장과의 마지막 통화는 정확하게 석 달하고도 열흘 전이었다. 내가 ‘공소시효’ 각색 고를 보냈으니 확인해보라고 점심 시간이 끝날 무렵 카톡을 보냈지만 한 시간이 지나도록 읽지를 않아서 전화를 걸었고 석 팀장은 전화를 받자마자 “회의 중”이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그 날 이후 일절 연락이 없다가 무려 석 달 만에 전화가 온 것이다. 물론 밀리언 필름에서 야심차게 수입한 SNS 스릴러 영화 ‘구독해주세요’의 개봉을 앞두고 바빠서 그랬을 순 있지만 석 달 간 연락이 없었다는 건 나에게 각색 작업을 의뢰한 밀리언 필름 오리지널 아이템 ‘공소시효’ 프로젝트는 흐지부지 무산 됐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적어도 나에게 계속 각색 작업을 맡기진 않을 것이다.
각색 고에 대한 의견이 궁금해서 전화를 해 보고 싶었지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믿고 꾹 참고 있었는데 어째 희소식이 기다리고 있진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