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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nn Sep 30. 2024

내가 잘 나가는 감독이면 이렇게 후딱 헤어지진 않겠지


기껏 시나리오 모니터를 들으러 왔다가 도움은 커녕 본전도 못 찾게 생겼다. 


커피 값이 아까웠다. 비록 10년 전이지만 오 피디와 나는 제작 실장과 감독의 관계였으니 내가 사는 게 맞다고 우겨서 내긴 했는데 후회가 됐다. 별로 고마워하는 눈치도 아니고 오 피디 사무실 근처에서 만났으니 오 피디 법카로 얻어 마시는 게 맞았다. 암튼 오 피디의 팩트 폭격에 쓴 웃음만 지으며 커피를 홀짝이고 있으려니 오 피디는 다음 일정이 있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내주신 시나리오는 꼭 읽어 볼게요. 화이팅입니다 감독님!”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피디님.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내가 잘 나가는 감독이었다면 이렇게 커피만 후딱 마시고 헤어지진 않겠지. 애초에 점심 시간 끄트머리에 잠깐 틈내서 만나지도 않았겠지. 밥 사주고 술 사주고 노래방도 갔겠지. 그리고 당연한 결과지만 꼭 시나리오를 읽겠다는 오 피디로부터는 그 날 이후 아무런 연락도 없다. 넌 내가 두고 본다.


오 피디와의 비참하기 짝이 없던 마지막 만남을 생각하니 밀리언 필름이 고마워지면서 헝그리 정신이 솟아났다. 찬밥 취급이지만 그나마 나를 감독님이라고 불러 주는 곳은 밀리언 필름 뿐이다. 어떻게든 잘 보여서 이번 기회를 살려내야 한다. 원 히트 원더도 아니고 데뷔와 동시에 폭망 후 한국영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싶진 않다. 그러려면 ‘꼴리는 영화’의 실패를 만회할 수 있는 차기작을 찍어야 한다. 무조건!


그런데 과연 찍을 수 있을까? 지난 10년 간 새로 쓰는 시나리오마다 까였고 캐스팅도 안 됐고 어쩌다 시나리오가 그럭저럭 좋으면 감독 말고 그냥 시나리오만 팔라는 얘기나 들어왔다. 만약 이대로 영영 차기작을 못 찍으면 이 나이에 뭘 할 수 있지? 택배 상하차? 가뜩이나 허리도 안 좋은데 내가 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빠르고 쉬운 데뷔를 목표로 치기 어린 마음에 상대적으로 블루오션이라 여기고 만들었던 19금 영화 한 편이 이렇게까지 오랜 시간 내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진짜 괜찮은 시나리오 한 편만 쓰면 된다! 


‘꼴리는 영화’ 감독이라는 수치스럽고 민망한 과거를 한 방에 날려버릴 아무도 거절할 수 없는 진짜 진짜 괜찮은 시나리오 한 편만 쓰자. 10년째 못 쓰고 있지만 대기만성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마음 단단히 먹고 정신 차리고 쓰면 다음 시나리오는 다를 수 있다. 그거 한 방이면 다 해결된다. 택배 상하차 고민할 시간에 한 글자라도 더 쓰자.



***



밀리언 필름은 데뷔작인 ‘꼴리는 영화’의 폭망 이후 4번 째로 몸담은 제작사다. 삼세번이라고 세 번째 회사에선 꼭 잘 될 줄 알았고 답답한 마음에 찾아갔던 봉천동 사주 카페 선생님도 이번엔 잘 될 거라고 했는데 네 번째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다. 


간만의 영화사 미팅이니 혹시나 늦을까 싶어 집에서 일찌감치 출발해 약속 시간 20분 전에 대로 변에서 10분 정도 안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 밀리언 필름 근처에 도착했고 10분 간 건물 주차장에서 서성이다 정확히 1시 55분에 3층에 위치한 사무실로 걸어 올라갔다. 


밀리언 필름 입구엔 흥행 실패작 SNS 스릴러 영화 ‘구독해주세요’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몇 달 만에 방문한 사무실은 스터디 카페 처럼 조용했다. 


“안녕하세요!”


고요함을 깰까 싶어 조용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자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던 기획팀 막내 양서연 피디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한 후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아 오셨어요 감독님? 죄송한데 대표님이 지금 미팅 중이어서요.”

“네넵! 괜찮습니다. 제가 좀 일찍 왔잖아요. 헤헷.”


시계를 보니 약속 시간 정각이었다. 양 피디는 나를 어떻게 처리할 지 모르겠는지 핸드폰과 회의실 쪽을 번갈아 보며 난처해했다. 그러자 잠시 후 회의실 문이 열리고 석 팀장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석 팀장은 몇 달 안 보는 사이에 제법 후덕해져 있었다.


나는 말 없이 석 팀장에게 손을 번쩍 들어 인사를 대신 했고 석 팀장은 그런 나를 힐끔 바라보고는 서연에게 뜻 모를 손짓을 한 후 다시 회의실로 들어갔다. 서연은 석 팀장의 손짓의 뜻을 알아 들었는지 나를 출입구 바로 옆의 감독 방으로 안내했다. 


이 방은 원래 전작의 흥행 실패 이후 7년간 일이 없던 이현철 감독이 쓰던 방인데 왠일인지 텅 비어 있었다. 나와 함께 감독 방으로 들어온 서연은 문을 닫고는 잔뜩 미안한 얼굴로 속삭이듯 이야기했다.


“감독님 죄송해요. 대표님 미팅이 길어져서요.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실 수 있을까요?”

“당연히 기다릴 수 있죠. 얼마든지 괜찮으니 천천히 일 보세요.”

“커피 드실래요? 아이스 드시죠? 아니면 뜨거운?”

“아무 거나 괜찮은데 아이스 아니 뜨거운이 좋겠네요. 그런데 혹시 대표님 미팅은 언제쯤 끝날지 알 수 있을까요?”

“금방 끝날 것 같아요. 갑자기 손님이 오셔서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해요 감독님.”

“하하. 이해라뇨. 바쁘신 분인데 그럴 수도 있죠. 전 정말 괜찮으니 신경쓰지 마세요.”


이게 무슨 시츄이에션이지? 양 피디 앞이라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미팅 시간을 오후 4시에서 2시로 변경한 것도 그렇고 기껏 정확히 시간 맞춰 왔는데 갑자기 온 손님 때문에 기다리라니 어이가 없는 차원을 넘어 불쾌해지려고 했다.


특히 조재웅이 불쾌했다. 아까 사무실에 들어왔을 때 서연의 맞은 편 자리에 앉아 있던 기획팀 조재웅 피디는 내가 들어오는 걸 파티션 너머로 힐끔 보고서는 인사 없이 다시 모니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분명 눈이 마주쳤는데 시선을 돌려버리다니 인성에 문제가 있다. 나보다 한참 어린 조카뻘 피디에게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다니.. 하아.. ’꼴리는 영화’가 폭망하지만 않았어도 여기서 이러고 있진 않을텐데.


서연이 나간 뒤 나 혼자 감독 방에 틀어박힌 채 흐릿한 유리창 너머로 바깥 분위기를 살펴보니 감독으로서의 존중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존중은 커녕 내가 와 있다는 사실조차 신경쓰지 않는 듯 했고 어쩐지 눈이 마주치는 것조차 꺼리는 것 같았다. 


대기 장소도 묘하게 거슬렸다. 이 방은 예전에 이현철 감독이 쓰던 방인데 지금은 마치 창고처럼 생수통, A4지 등의 비품과 씨네21 과월호 서너 권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내가 밀리언 필름 직원도 아닌데 너무 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당황스러웠다. 


방이 썰렁한 걸 보니 이현철 감독이 준비하던 작품은 엎어진 모양이다. 책상 위엔 오래 된 데스크탑만 덜렁 놓여 있었는데 키보드 위엔 먼지가 쌓여 있었다. 이 감독과는 전작의 흥행 실패 이후 오랜 시간 차기작을 준비하고 있다는 공통점 때문에 동병상련의 정을 나누며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작품 준비 하느라 바쁠 것 같아 연락을 안 한 지 오래 됐지만 어쩐지 지금 연락하면 기분 좋은 소식이 들려올 것 같았다.


‘감독님 잘 지내시죠? 저 밀리언 필름 왔습니다!’


이 감독에게 안부 카톡을 보냈더니 금방 답이 왔다. 밀리언 필름에서 이 감독이 준비하던 작품은 캐스팅과 투자가 안 돼서 무기한 홀딩 후 지금은 다음 작품 준비하며 집에서 쉬고 있다고 했다. 예상대로 기분 좋은 소식이었다. 누군가 일이 잘 안 풀렸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이 감독은 묻지도 않았는데 장문의 카톡으로 밀리언 필름의 재정 상태에 대해 알려주었다.


‘거기 돈 없어요. 투자가 빠그러졌다나요? ‘구독해주세요’도 망한 거 아시죠? 감독님도 시간낭비 말고 빨리 탈주하세요. 밀리언 탈출은 지능 순인거죠ㅋㅋ 조만간 소주 한 잔 하며 탈주 후기나 나누시죠. 그럼 안전 이별 기원할게요!’


회사에 돈이 없다는 얘기에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설마 시나리오가 재미없다는 이유로 계약금을 돌려달라는 건 아니겠지? 회사 운영비에 한 푼이라도 보태야 하니까?


내 사전에 환불은 없다. 돈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약서 어디에도 내가 쓴 시나리오가 재미없으면 계약금을 돌려줘야 된다는 조항은 없었다. 아무리 듣보잡 신생 영화사라도 가오가 있는데 얼마 되지도 않는 계약금을 돌려달라고는 안 하겠지만 혹시 몰라 이런 저런 경우의 수를 따져보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강 대표가 무슨 말을 하든 그 어떤 경우에도 언성은 높이지 말자. 예의를 지키자. 이제부터 중요한 건 안전 이별이다. 하아..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걸까.. 진짜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다면 언제로 돌아가야 폭망한 현재를 바꿀 수 있을까? 


분명 조감독 시절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일을 잘 한다는 평가가 지배적인데다 확실히 전도유망한 이미지였다. 하지만 조감독 일을 잘 하는 것과 감독 데뷔는 전혀 다른 얘기였다. 오랜 조감독 생활 틈틈이 집필한 시나리오가 캐스팅과 투자에 실패해 번번히 엎어지자 홧김에 하지 말아야 할 선택을 한 것이 잘못이었다. 


오다 가다 우연히 술자리에서 소개 받은 방주혁이라는 자칭 제작자에게 유명 배우를 캐스팅 하지 않아도 메이드가 되는 저예산 19금 영화 연출을 제안 받은 것이다. 시나리오에 대해선 다 필요 없고 야하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방 대표의 뒷조사를 해 보니 어디선가 눈 먼 돈을 땡긴 게 확실했다. 바로 이거다 싶어 2주일 가량 방구석에 틀어박혀 이 영화 저 영화 짜깁기 해 시나리오를 써 갔는데 너무 좋다고 했다. 


당시 내가 지은 제목은 ’꼴리는 영화’가 아니었고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퀄리티의 시나리오였지만 연출만 재밌게 잘 하면 된다는 생각에 일사천리로 캐스팅과 프리 프로덕션 작업을 완료한 후 촬영을 진행했으나 열악한 제작 환경에서 완성에만 의의를 두다 보니 결국엔 죽도 밥도 안 됐다. 


애초에 과거가 수상한 족보 없는 뜨내기 제작자가 꼴랑 2주만에 쓴 시나리오를 좋다고 할 때부터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어야 했다. 잘못된 선택임은 분명하지만 19금 영화가 아니었으면 데뷔를 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감독 방이 비어 있다는 사실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강 대표가 나를 급하게 보자고 한 이유가 이현철 감독의 부재 때문일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는 밀리언 필름에 나 말고 다른 감독은 아직 없다. 있으면 석 팀장이 얘기해줬을 것이다. 혹시 나보고 이현철 감독이 쓰던 감독 방을 쓰라는 제안을 하기 위해 부른 것일까? 그런 것 같다. 다른 이유는 떠오르지 않는다.


아.. 이게 얼마 만의 감독 방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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