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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nn Oct 16. 2024

여전히 근사한 자본 친화적인 몸매


설령 맨날 진지 빠는 말투로 아무도 모르는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더라도 블로그 주인장이 정말 잘 생겼다면 또 모르겠지만 동민은 잘 생기지도 않은 주제에 블로그 프로필에 본인의 얼굴 정면이 떡하니 나온 증명 사진 같은 걸 올려둔 탓에 일말의 가능성조차 없었다. 


그러니까 동민의 시나리오가 재미 없는 것이고 공모전에선 매번 탈락이며 감독 데뷔에도 실패한 것이다. 대중의 심리와 시장의 니즈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상업 영화 감독으로선 실격이다. 특히나 여심에 대한 이해도가 낮다면 하루 빨리 다른 일을 찾는 게 낫다. 여자를 잘 꼬시는 놈이 영화도 잘 만들더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건 그렇고 동민의 블로그를 오랜만에 읽어보니 문체가 난니맨과는 결이 달랐다. 하지만 작정하고 다른 사람 느낌을 내려고 했다면 문체 정도는 충분히 위장할 수 있었겠지. 방금 전 동민과의 통화는 짧았지만 나에게 뭔가 숨기려는 듯한 인상을 받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내가 본인을 난니맨으로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차라리 잘 됐다. 


이야기가 빠르겠군.



***



퇴근 시간이라 붐비는 대학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혜나가 출연한다는 연극 정보를 검색해보았다. 


포스터 메인에 혜나가 있었고 글래머러스한 몸매를 펑퍼짐한 원피스로 꽁꽁 싸매고 있는 걸 보니 돈 벌겠다고 만든 연극은 아닌 듯 했다. 내용을 보니 혜나의 자본 친화적 몸매와 마스크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었다. 


자본주의 그 자체인 혜나가 어쩌다 이쪽 부류와 엮였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혜나가 원래 이쪽은 아닐텐데 아마도 주연 배우를 시켜준다니까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얼씨구나 출연했을 것이고 남자 배우들은 혜나를 보고 이게 웬 떡이냐 했을 것이다.


대학로 극장 앞에 도착하니 아슬아슬하게 8시 직전이었다.


극장 근처 구석 골목에는 우중충하게 생긴 남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꽃다발을 든 화사한 차림의 젊은 여자들이 가득한 뮤지컬 쪽 극장과는 분위기가 판이했다. 동민은 우중충하고 시커먼 남자들 사이에 실패한 예술가처럼 기운 없이 서 있었고 꽃다발까지 들고 있어서 더욱 처량하게 보였다. 동민에게 다가가려는데 예전에 잠깐 안면이 있던 이름을 까먹은 캐스팅 디렉터가 아는 척하며 다가왔다.


“어? 감독님 안녕하세요!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 초대를 받아서요.”

“혹시 혜나씨?” 

“아.. 네. 그런 셈이죠.”

“맞다. 감독님 작품에 출연했었죠? 저도 혜나씨 만나러 왔거든요. 그럼 공연 끝나고 뵙겠습니다.”


‘굳이?’


나보다 서너 살 많은 걸로 알고 있는 우중충하게 생긴 캐스팅 디렉터는 시계를 보고는 서둘러 공연장으로 들어갔다. 동민은 멀찌감치 떨어져 내가 감독 대접 받는 광경을 지켜 보고 있었다. 씁쓸한 표정이었다. 


폭망 감독도 감독이다. 자긴 17년째 감독 지망생 신세니 씁쓸할 수 밖에. 동민에게 아는 척을 하려는데 말도 없이 몸을 홱 돌려 먼저 공연장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연극인데 더 빨리 왔어야지. 감독이라는 놈이 매너가 없냐.”

“야.. 그런데.. 아니다. 일단 공연부터 보자.”

“할 말 있음 해. 왜 말을 하다 말아?”

“아니야. 나중에 얘기해.”


공연장은 좁고 어두컴컴했으며 객석은 3/4쯤 비어 있었다. 


우리가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대 위의 스포트라이트가 켜지며 펑퍼짐한 원피스 차림의 혜나가 등장했다. 혜나의 자본 친화적 몸매는 여전히 근사했다. 펑퍼짐한 원피스로 꽁꽁 싸매지 말고 타이트한 의상으로 혜나의 몸매만 제대로 드러냈어도 관객이 이보단 많이 들었을 텐데 그저 안쓰러울 뿐이었다.


그나저나 혜나가 지금 몇 살이더라? 10년 전 내 영화에 나왔을 때가 연극영화과 졸업반이었으니 지금은 30대 중반일 것이다. 그냥 30대 중반도 아니고 정글 같은 연예계에서 조단역으로 10년을 버틴 30대 중반이니 산전수전 다 겪고 알 건 다 아는 백전노장! 


연기력은 얼마나 늘었나 궁금했는데 몸매처럼 연기력도 여전했다. 발성에 문제가 있고 혀짧은 발음도 그대로였다. 대체 왜 배우를 하려는 걸까? 


내가 데뷔와 동시에 폭망 이후 10년째 감독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와 비슷할 지 모르겠으나 나야 이거 안 하면 할 게 없지만 혜나는 배우를 안 했다면 주변에서 예쁘다는 소리 듣고 공주 대접 받으며 행복하게 잘 살다가 부자 남자 만나 시집 갔을 수도 있다. 


어쩐지 무대 위에서의 열연이 공허하게 느껴졌는데 이런 걸 수요 없는 공급이라 하는 걸 수도 있겠다. 혜나가 목에 핏대를 올릴 때마다 내가 다 민망했고 혜나의 지인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는데 동민은 나와는 달리 사뭇 진지했고 내가 피식거릴 때마다 죽일 듯이 눈치를 주었다.


연극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다 보니 금새 망상으로 가득차 버렸다. 


만약 연극이 끝나고 혜나가 둘이서 따로 술 한 잔 하자고 하면 어떡하지? 동민이 따라오려고 할 텐데 어떻게 따돌릴까? 술자리가 더 좋은 자리로 이어진다면 냅다 뿌리치고 일어나야 하나? 헬렐레 따라갔다가 나중에 발목 잡힐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감독 계약서에는 보통 법령을 위반하거나 음주운전, 마약, 사기, 성범죄, 폭행 등의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면 안 된다는 조항이 있는데 술 한 잔 까지는 괜찮겠지?


또 괜한 걱정이다. 혜나가 둘이서 술 마시자고 할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잘 나가는 감독이면 모르겠지만 10년째 폭망 감독 주제에 별 걸 다 걱정한다. 그런데 가만보니 밀리언 필름의 강 대표가 ‘구멍가게’의 주인공으로 추천한 유리아 보다는 얼굴로 보나 몸매로 보나 인지도로 보나 여러모로 혜나가 훨씬 나았다. 연기력은 유리아가 나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나랑 한 편 같이 한 혜나가 훨씬 믿음이 갔다.


나이가 깡패라고 30대 중반이라는 점이 걸리긴 하지만 강 대표가 제안한 19금 영화의 주인공으로는 누가 봐도 유리아보다는 혜나가 적역이었다. 그러나 영화 한 편 같이 한 감독님이랍시고 종종 공연 초대도 해줬는데 ‘구멍가게’라는 제목의 듣보잡 신생 영화사의 19금 떡 영화에 출연해달라고 연락했다간 감독 대접은 커녕 사람 취급도 못 받을 것 같다. 비록 영화는 망했어도 양아치로 기억되긴 싫다. 이왕이면 영화는 못 만들지만 사람은 좋은 감독님으로 남고 싶은데 ‘구멍가게’ 얘기를 꺼냈다간 백퍼 손절각이다.


설상가상 악플로 복수할 수도 있다. 따지고 보면 혜나가 난니맨일 가능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나 때문에 소중한 필모그래피에 폭망 영화가 추가됐으니.. 물론 혜나가 난니맨일 리는 없을 것이다. 혜나는 애초에 그런 음흉한 캐릭터가 아니다. 동민과는 달리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직 30대로 젊고 얼굴 예쁘고 몸매도 되는데 쫓아다니는 남자가 얼마나 많겠는가. 자기 좋다고 따라다니는 남자들 골라 만나며 미슐랭 맛집 다니는 것만으로도 바쁠 것이다. 그리고 혜나라면 대놓고 욕을 했으면 했지 뒤에 숨어서 악플을 달진 않을 것이다.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 연극은 끝났고 출연진들이 다 같이 손을 잡고 나와 몇 안 되는 관객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는데 이 부분이 연극에서 제일 재미있었다. 입체적이고 무대에 생동감도 넘치고.. 열심히 박수를 쳐 주고 동민을 따라 나와 보니 출연진 대기실 앞은 아까 그 캐스팅 디렉터처럼 우중충한 남자들로 인산인해였다. 


얼마 뒤 혜나가 대기실에서 나오자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가 공연 잘 봤다고 찬양을 늘어 놓았고 혜나는 그들에게 둘러싸인 채 하하호호 웃음꽃을 남발하고 함께 셀카를 찍어 주었다. 꽃다발을 든 동민은 멀찌감치 떨어진 채 혜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한심한 새끼. 동민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야! 넌 왜 가만히 있어? 혜나씨 주려고 산 꽃 아냐? 가서 들이 대!”

“됐어. 나중에 한가할 때 주지 뭐. 커피나 한 잔 하러 가자.”


혜나를 둘러싼 남자들의 경쟁이 치열해 보였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다들 혜나를 어떻게 한 번 해 보려고 발정 난 놈들 같았다? 물론 나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혜나가 초대해서 온 것이고 폭망 감독이지만 엄연히 감독님이기 때문이다??



***



동민과 함께 극장 근처 카페로 이동했고 커피는 그래도 기성 감독인 내가 샀다. 감독 지망생에게 얻어 마실 순 없으니까. 동민과는 하도 통화를 자주해서 딱히 새로 할 말은 없었고 그저 이 새끼가 난니맨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떠봐야 하나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동민이 화장실에 간 사이 혜나에게 카톡이 왔다.


‘감독님 혹시 공연 보러 오셨어요?’ 

‘네 공연 잘 봤습니다! 초대 감사요!!’

‘어쩐지.. 객석에 감독님 같은 느낌이 계시더라고요! 오셨으면 알려주셨어야죠. 어디세요?’

‘근처 카페에요. 동민이랑 커피 한 잔 하고 있어요.’

‘아 동민 감독님도 왔구나.. 어느 카페에요?’


화장실에서 돌아온 동민에게 혜나와 방금 카톡을 나눴다고 하자 동민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면 안 되지! 너도 나름 감독이잖아? 감독이 배우에게 괜히 연락하고 그러면 특히나 이 바닥 잘 모르는 여배우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이 생긴다고! 너도 알잖아? 이 감독이 다음 작품에 나를 불러주는 건 아닌가 하는 희망을 갖게 되는 거야. 출연시켜 줄 것도 아니면서 불쌍한 여배우 희망 고문하지 마. 너 양아치냐?”


역시나 동민은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내가 자기보다 먼저 감독이 된 게 아직도 배가 아픈 것이다. 아니 그런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도대체 왜 나한테 그런 악플을 달았는지 내가 애널맨인 건 어떻게 알았는지 캐봐야 했다. 


동민의 열폭이 진정되길 기다렸다 슬슬 난니맨인지 떠보려는데 혜나가 어떤 남자와 함께 카페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시꺼먼 패딩으로 몸을 두르고 있어 처음엔 혜나인 줄 몰랐다. 앙증맞은 핑크색 명품 핸드백을 들고 있지 않았다면 여자인 지도 몰랐을 것이다. 


혜나는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고 그녀의 뒤에는 우중충하게 생긴 남자가 있었는데 나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혜나에게는 그럼 먼저 가 있을게 라는 말을 남기고 카페에서 나가 버렸다. 


“누구?”

“친하게 지내는 매니저 동생이에요. 제가 감독님 만난다니까 그럼 인사만 하고 가겠다고 굳이 따라왔어요. 괜찮으시죠?” 


혜나의 설명에 따르면 그 매니저 동생이라는 남자는 혜나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한다며 매니저 일을 봐주고 싶어한다고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전혀 관심 없는데 잠깐이나마 나를 위 아래로 훑어보는 눈빛이 어째 혜나에 대한 나의 흑심을 다 알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느낌이었다. 


억울했고 썩 유쾌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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