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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nn Oct 28. 2024

배우 하고 싶으면 너네 아빠 영화에나 출연하면 되겠네


영화로 망한 건 나 하나로 족하다. 내 딸까지 끌어들일 순 없다.


“이미 오디션 제안도 받았다는데?”

“오디션?”

“길거리 캐스팅을 당했다나? 학교 앞에서 무슨 피디인지 뭔지가 명함을 주고 갔대. 시나리오도 보내줬다는데 한 번 읽어볼래?”


직업병 탓에 캐스팅이니 시나리오니 하는 얘기에 은근슬쩍 호기심이 생겼지만 내가 아니라 내 딸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자 금방 짜게 식어 버렸다.


“무슨 영환데? 회사.. 아니 감독은 알아?”

“독립영화라나? 어디서 지원 받아서 만드는 영화래.”


내 딸이 오디션 제안을 받았다니 이게 무슨 영문인가 했지만 역시나였다. 제대로 된 상업 영화 제작진이라면 내 딸에게 오디션 제안을 할 리가 없다.


“독립영화? 됐어. 아무튼 배우는 안돼! 절대!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돼!”

“원하면 연기 학원도 소개시켜 줄 수 있다던데? 마스크는 조금만 손 보면 될 것 같다고 했고.”

“연기 학원?? 때려 쳐. 그거 다 장사 속이야. 세미가 우리한테나 예뻐 보이지 객관적으로 보라고 좀! 걔가 배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거야! 잘 될 것 같았으면 하기 싫다고 해도 내가 먼저 시켰지!”


감히 순진한 내 딸에게 약을 팔아? 명함에 적혀 있는 피디라는 놈의 이름을 영진위 사이트에 들어가 검색해보니 역시나 아무런 정보도 뜨질 않았다. 완전 양아치 사기꾼 같은 놈들에게 제대로 걸렸다 싶어 길길이 날뛰는데 등 뒤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아차 싶어 고개를 돌려보니 세미가 자기 방 앞에서 나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떠드는 얘기를 다 들은 것이다.


“아빠 미워! 폭망 감독 주제에!”


딸에게까지 폭망 감독 소리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만 사실이니 뭐라 할 수도 없고 그저 난감할 뿐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딸에게만큼은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고 싶었지만 이번 생엔 실패인듯. 그래도 저런 소리까지 듣고 가만히 있으면 가정교육상 안 좋을 것 같아 뭐라 한 소리 하려 했는데 세미는 냅다 집 밖으로 뛰쳐나가버렸다. 유정이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으이그.. 그게 딸에게 할 소리니?”

“세미 들으라고 한 소리는 아니잖아! 그리고 다 지 잘 되라고 이러는 건데 아빠 맘도 모르고..”

“넌 이제 큰 일 났다. 이번 삐짐은 모르긴 몰라도 평생 갈 걸?”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아빠가 집에 오면 달려와서 안기고 뽀뽀해달라고 조르던 시절이 마치 전생의 기억처럼 느껴졌다. 언젠가부턴 아빠가 집에 오든 말든 방에 틀어박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고 안에서 뭐 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방문을 확 열어버리고 싶지만 그랬다간 험한 것이 튀어 나올까봐 애써 자제 중이었는데.. 안 그래도 소원했던 부녀 관계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듯 했다. 


“더 늦기 전에 따라 나가봐. 놀이터에 있을 거야.”


하루종일 영화사 미팅에 공연 관람에 여배우의 고민 상담 등등 때문에 피곤해죽을 것 같았지만 아빠의 의무를 다 하기 위해 놀이터로 갔다. 다행히 세미는 유정의 말대로 놀이터 벤치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가 다가오자 힐끔 올려다보고는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는 미안했다. 아빠가 다 너 잘 되라고..”

“나도 알아. 나 안 예쁜거. 다 아빠 닮아서 그런 거잖아.”


그래도 대화가 가능해서 의외였다.


“나도 미안. 아까 폭망 감독이라고 한 거..”

“괜찮아. 사실이니까. 아빠는 아무렇지도 않아. 다음 작품은 잘 될 거니까.”

“아빠는 꼭 감독을 해야겠어?”

“아빠는 감독을 해야겠는게 아니고 이미 감독이야. 이 나이에 다른 일을 할 수도 없고.”


폭망했다고 데뷔로도 안 쳐주는 건가? 딸에게까지 감독 대접을 못 받다니 스스로가 너무나 한심했다.


“넌 꼭 배우를 해야겠니?”

“배우가 되면 다양한 인생을 살아볼 수 있잖아. 자유롭고 돈도 많이 벌고 여행도 많이 다니고.”

“그건 잘 나가는 배우나 가능한 얘기야. 신인은 배역 하나 따내는 것만 해도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넌 아빠 닮아서 잘 나가긴 커녕 잘 돼봤자 주인공의 못난이 친구 역할 정도가 한계라는 얘기는 차마 덧붙일 수 없었다.


“그럼 딱 올해까지만 시간을 줘. 만약 올해 안에 캐스팅에 성공하면 연극 영화과 보내주는 거다? 안 되면 다신 배우하겠단 얘기 안 할게.”

“진짜?”


대화가 가능한 이유가 바로 이 제안 때문이었다. 얘기가 쉽게 끝나겠는데?


“대신 독립영화나 학생 작품은 빼고다. 알지?”

“알았어. 그건 반칙이지.”

“그리고 아빠.. 부탁이 있는데..”

“응?”


얘기가 쉽게 끝나 다행이고 부탁이라는 건 들어보나 마나였다. 끽해야 용돈 좀 달라는 얘기일텐데 얼마를 달라고 하든 그거보다 많이 주고 싶어졌다.


“이제 그런 영화 안 찍으면 안 돼? 딴 감독들처럼 액션이나 코미디 영화를 찍을 순 없는 거야?” 

“그런 영화?”

“있잖아. 아빠 데뷔작. 꼴리는..”

“아! 그래. 알았어. 그런 영화 다신 안 찍을게. 지금 준비하는 영화는 그런 영화 아니니까 안심해도 돼.”

“약속이다?”


세미가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고 마음의 상처를 입었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자 약속! 대신 세미도 올해 안에 캐스팅 안 되면 배우는 포기하는 거다?”

“당연하지!”



***



잠자리에 들 준비를 마치고 안방에 들어가니 유정은 침대 위에서 벽을 보고 누운 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허리에서 골반까지 S자로 빠진 뒤태가 제법 근사했다. 잘하면 30대 초반으로 봐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진짜 30대인 혜나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잊자. 잊어. 혜나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거다. 나부터가 깨끗하게 잊어야 완전 범죄가 성립되는 거다.


아내도 10년 동안 안 했을까? 고등학교 선생님이니 당연히 안 했을 것이다. 물론 선생님이라고 안 했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내가 아는 유정은 그런 짓을 저지를 리 없다. 학교랑 집 밖에 모르고 공과 사가 분명하며 준법 정신도 투철해서 불륜이나 외도 따위는 꿈도 못 꿀 스타일이다. 


동료 선생님과 학생 말고 만나는 남자라고는 스승의 날 즈음 해서 찾아오는 졸업생들이 다 일텐데 제자들과 모임이 있더라도 저녁 식사에 반주 한 잔 정도를 곁들이는 게 다다. 간혹 제자의 차를 얻어 타고 집에 온 적이 있는데 멀쩡한 젊은 놈들이 설마 40대 아줌마에게 흑심을 품진 않을 것이다.


“세미가 오늘 친구랑 싸웠대.”


유정의 담담한 한 마디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세미가 학교 폭력을 저질렀다면 차기작 개봉 때 감독 딸이 학폭 가해자네 어쩌네 하면서 문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학폭이야?”

“그 정도는 아니고.. 그냥 얌전하게 말로만 티격태격.”

“왜?”

“아니다. 됐다. 못 들은 걸로 해.”

“이 사람이.. 왜 말을 하다가 말아? 오늘 잠 자기 싫어? 밤 새 들볶여 볼 테야?”

“아빠가 폭망 감독이라고 놀렸대.”


눈 앞이 캄캄하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한국에서 폭망 감독으로 산다는 건 나는 물론이고 가족들에게도 못할 짓이었던 것이다.


“까짓꺼 다음 작품 대박나면 되지. 두고 보라고 해.”

“떡 영화 감독이라고도 했대.”

“다음 껀 떡 영화 아니야.”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아무렇지가 않지 않았다. 여기서 무너지면 안 된다. 이럴 수록 더욱 씩씩하게 나가야 한다.


“배우 하고 싶으면 너네 아빠 영화에나 출연하라고 했대.”


기분이 묘했다. 너네 아빠 영화에나 출연하라고? 


이것은 욕인가 칭찬인가. 욕이라고 생각하면 나 자신이 너무 초라했고 칭찬이라고 정신 승리를 하자니 너무 비참했다. 솔직한 심정으론 내 목숨보다 소중한 딸에게 떡 영화 감독의 차기작에나 출연하라고 악담을 퍼부은 녀석을 찾아가 혼쭐을 내주고 싶었다만 차기작 대박 말고는 딸의 기를 살려줄 뾰족한 수가 없었다.


“부러워서 한 소리겠지? 영화감독이 흔한 직업이 아니잖아? 그리고 이번 영화는 떡 영화도 아니야.”

“떡 영화 아님 뭔데? 일은 잘 되고 있는 거야? 너 요즘엔 도대체 뭐 하고 돌아다니냐?”

“곧 수면 위에 올라올 거야. 좀만 기다려.”


다음 작품은 대박 날 거라는 얘기는 차마 하지 못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유정은 이제 어지간한 업계 전문가 뺨친다. 내가 뭘 하고 돌아다니는 지 몇 마디만 들어봐도 이게 될 일인지 아닌지 간파한다. 더 이상 내가 밖에서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10년째 이번 작품은 잘 될 거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으니 지친 것이다. 설상가상 이번에 만들 영화는 그런 영화가 아니라고 했지만 강 대표가 제안한 ‘구멍가게’는 내가 준비했던 그 어떤 영화보다 떡 영화였다. 


가족을 생각하면 강 대표의 제안을 거절해야 마땅하지만 그랬다간 모처럼 생기려는 감독 방과 법카가 날아가버린다. 일단은 떡 영화 연출을 수락하는 척하면서 다른 작품을 준비하는 게 지금으로선 최선의 선택이다. 세미도 아빠가 집 구석에서 맨날 누워만 있는 꼴은 보기 싫을 것이다.


유정은 피곤했는지 금방 깊은 잠에 빠져 들었지만 나는 잠이 오질 않았다. 내 영화로 인해 가족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걸 알았는데 어떻게 잘 수 있겠는가. 뭐라도 끄적여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 작업실로 가서 컴퓨터를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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