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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nn Oct 30. 2024

이건 내 얘기는 아니고 감독 지망생 친구 얘기인데


뭘 써야 하나. 


가족을 위해 남 부끄럽지 않은 차기작 집필을 해 보려고 꾸역꾸역 컴퓨터 앞에 앉아 모니터에 한글 창을 띄워 놨지만 아무런 아이디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당연하다. 애초에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 따윈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거 있으면 말로 하면 되지 왜 영화를 찍냐. 피곤하게스리. 생각해 보면 영화감독으로서 찍고 싶은 것도 없었다. 난 그냥 감독 놀이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19금 웹소설 ‘감독인생 2회차’ 관련 아이디어는 줄기차게 뿜어져 나왔고 한글 파일을 열자마자 저절로 다음 화가 써졌다. 주인공 감독이 삼류 여배우의 육탄 공격에 못 이기는 척 허물어지지만 한 번 발동이 걸리고 나자 밤새도록 멀티 오르가즘을 선사한다는 이야기다. 5000자를 다 쓰자마자 웹소설 플랫폼에 업로드했고 거의 실시간으로 독자들의 댓글이 달렸다. 


마냥 호의적이진 않았다. 주인공 감독과 갑자기 등장한 삼류 여배우가 원나잇을 저지르는 전개가 뜬금 없으니 빨리 주인공 감독이 공을 들이고 있던 신입 피디나 정복하라는 것이다. 끽해야 회당 100원 내고 읽는 것들이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게 짜증났지만 향후 충성 고객이 될 수도 있으므로 댓글 하나하나 마다 읽어주셔서 감사하다고 정중하게 답글을 달아주었다.


19금 웹소설은 아무 고민 없이도 술술 잘 써지는데 가족을 위한 남 부끄럽지 않은 차기작 집필은 왜 마음처럼 안 되는지 의아하던 차에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애널맨 블로그에 동민 저격 글을 올리는 거다. 제목은 ‘감독 지망생에게 보내는 편지’. 


동민이 난니맨으로 위장해 애널맨을 저격했듯 나도 감독 지망생 동민을 저격하는 거다. 만약 동민이 이 새끼가 난니맨이라면 분명 애널맨 블로그에 올라온 글을 보고 반응이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동민의 컴플렉스를 제대로 후벼파줘야 한다는 기획 의도가 잡히자 웹소설을 쓸 때처럼 저절로 키보드에 손이 올라갔고 폭풍 타이핑이 시작됐다. 


시나리오는 안 써지는데 19금 웹소설과 부캐 애널맨으로 운영하는 블로그에 올릴 글은 술술 잘 써지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시나리오를 이렇게 썼으면 벌써 차기작을 만들고도 남았을텐데.. 동민 저격 글은 30분도 안 돼서 완성했고 업로드 하기 전에 제목을 수정했다. 


‘감독 지망생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건 내 얘기는 아니고 17년째 입봉 준비하는 감독 지망생 친구 얘기인데..’로.


“거울을 봐. 그리고 니가 짝사랑하는 여배우가 너를 왜 좋아할 만한 이유를 하나라도 대 봐. 만약 니가 감독 지망생이 아니어도 그녀가 너를 상대해줬을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시간 쏟지 말고 그 시간에 시나리오를 한 자라도 더 쓰면 어떨까? 시나리오를 써 봤자 더 이상 너를 불러주는 영화사가 없다고? 그럼 공모전에라도 내야 할 거 아냐? 영진위도 있고 대스공도 있잖아. 


만약 니가 원래부터 돈이 많은 감독 지망생이라면 예외. 그거라면 니가 짝사랑하는 여배우가 너를 좋아할 만한 이유가 될 수도 있지. 단 최소 강남에 건물 한 두 채는 있어야 함. 그 이하는 애매하다. 니가 아무리 죽이는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잘 만들어도 그것만으론 여배우가 너를 좋아하게 만들 순 없어. 자본주의 사회잖니. 돈이 있어야 해. 물론 돈은 좀 없어도 존잘이라면 그건 또 다른 얘기지. 


하지만 넌 그렇지 않잖아? 설상가상 나이도 중요해. 40대 감독 지망생이라면 포기를 추천한다. 니가 그 여배우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냐고? 여배우가 나한테 말해줬거든. 부담스럽고 무섭다고 했어.” 


다 써 놓고 보니 너무 잔인한 거 아닌가 싶었지만 이건 다 동민이 니가 먼저 나를 도발했기 때문이니 영혼에 상처를 받더라도 나를 원망하진 말아라. 그러게 누가 먼저 도발하래?


애널맨 블로그에 동민 저격글을 올리고 다시 잠자리에 누워 오늘 하루를 복기해 보았다. 세미가 아빠 영화 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 당한 건 너무나도 가슴 아픈 일이지만 혜나와 ‘비포 선라이즈’를 찍었고 완전범죄로 마무리 지었으니 충분히 운수 좋은 날이었다.


이제 남은 건 내일 장례식장에서 동민이 난니맨인지 여부를 밝혀내는 것이다. 한 때 동민은 애널맨 블로그에 틈만 나면 들어 갔다. 애널맨 블로그가 자신이 개설한 블로그인 ‘혼자 영화 보는 남자’의 경쟁 상대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툭하면 “야 그거 봤어? 애널맨이라고 골 때리는 새끼 있는데 말야~” 이런 식의 얘길 한 두 번 한 게 아니다. 아마 지금 올린 저격 글도 내일 장례식장에 가기 전에 읽을 것이다. 


당장 내일은 아니어도 언젠간 반드시 읽을 것이다. 애널맨 블로그에 뜬금없이 여배우와 감독 지망생의 연애 조언글이 올라온 걸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고 바보가 아니라면 난니맨의 정체가 바로 너 동민이라는 사실을 내가 눈치챘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블로그에 올라온 여배우와 감독 지망생의 이야기가 너무나도 자기 이야기이니 이 글을 읽고 나를 만나면 절대로 가만 있지 못할 것이다. 내가 아는 동민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피드백이 올 것이다. 동민이 난니맨인지 아닌지를 알아내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다.


빠르면 자고 일어나서 곧장 알게 될 수도 있다. 애널맨 블로그에 올라온 자기 저격 글을 읽고는 빡쳐서 장례식장에서 만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전화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동민의 투명하고 예민한 성격에 이런 식의 저격은 절대로 그냥 넘어가진 못할 것이고 자기가 한 짓이 있으니 대놓고 따지진 않는다해도 어떻게든 티가 날 것이다.


쪽팔리니까 저격 글을 삭제해달라고 할 것이고 그럼 나는 내 영화에 단 니 관람평을 먼저 삭제하라고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할 것이다. 잘못은 지가 먼저 했으니 내 제안을 수락할 수 밖에. 아무리 친구가 자기가 이루지 못한 꿈인 감독 데뷔의 꿈을 먼저 이룬 게 질투가 났더라도 직업을 바꾸라는 따위의 말을 관람평에 올리면 안 되는 것이다. 


안 그래도 10년째 번번히 엎어지기만 하고 더 이상 불러주는 영화사도 없으니 이러다 곧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 직전인데 투자자나 스타 배우가 ‘최경진 감독 직업 바꿔라. 아 짜증난다. 이걸 영화라고 찍었냐?’는 관람평을 읽는다면 얼마나 감독이 우스워 보이겠는가?



***



자고 일어나보니 애널맨 블로그는 간만에 댓글이 풍년이었다. 


제목부터 “이건 내 얘기는 아니고 17년째 입봉 준비하는 감독 지망생 친구 얘기인데..”라고 시작했지만 다들 애널맨 본인의 이야기라고 생각했고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조롱보다는 위로의 댓글이 대다수였다. 이런 거 보면 사람들이 꼭 못 되기만 한 건 아닌 것 같다.


‘짠하네요.’

‘다 읽고 나니 저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눈물이 울컥 ㅠㅠ 애널맨님 힘내세요.’


다시 읽어봐도 블로그 주인 애널맨이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를 빙자한 셀프 저격이나 자학 개그 글 같아 보였지 다른 누군가를 도발하는 글로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기대했던 난니맨의 댓글은 달리지 않았다. 난니맨으로부터는 메일도 없고 무반응이었다. 동민으로부터의 연락 역시 일절 없었다. 


그렇다라는 건.. 동민이 아직 저격글을 안 읽었거나 난니맨이 아니란 뜻이다. 동민은 성격상 애널맨 블로그에 올라온 글이 자신과 혜나의 이야기라는 걸 아는 순간 절대 가만히 있지 못한다. 아직 안 읽었을 수도 있으니 이번에는 내가 먼저 애널맨에 올라온 글 읽어봤냐고 물어보려고 임 감독님 장례식장 언제 갈 거냐는 톡을 보냈는데 30분이 지나도록 읽지 않았고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뭔가 수상했다. 설마 저격 글에 영혼의 상처를 입고 잠수를 탄 건 아니겠지? 아니면 나랑 얘기를 했다간 속 마음을 숨기지 못할 것 같아 아예 소통을 거부하는 걸 수도.. 뭐가 됐건 일단 장례식장에 가서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눠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내가 원래 경조사를 일일이 챙기는 스타일은 아닌데 이번 장례식장에는 반드시 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아무리 임 감독의 장례식이어도 딱히 가고 싶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가려는 이유는 감독이 죽었는데 오랜 시간 같이 일 했던 조감독이 안 왔더라는 얘기가 도는 게 싫고 의리 없고 싸가지 없는 놈이라는 소리도 듣기 싫었지만 무엇보다 정동섭 대표님이 참석할 것 같아서이다.


정동섭 대표님은 요즘 영화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제작자여서 얼굴 한 번 뵙는 게 하늘의 별따기 수준인데 결혼식은 몰라도 장례식엔 빠지지 않는 걸로 유명하다. 영화를 동시에 10편 이상 준비하느라 바빠서 그 누구에게도 30분 이상 시간을 내 주지 않는 걸로 유명한 정 대표님과 사전 약속 없이도 30분 이상 마주 앉아서 이야기 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장례식인 것이다. 


사람 일 모른다. 내가 지금은 듣보잡 신생 제작사에서 빌빌 대고 있지만 정 대표님에게 성실히 얼굴 도장을 찍어두면 언젠가 정 대표님 영화사에서 차기작을 준비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임 감독에게 감사한 몇 가지 중의 하나가 내가 연출부로 임 감독 작품에 참여했을 때 제작부였던 정 대표님과 인연이 생겼다는 것이다. 비록 한때 형이라고 불렀으나 이제는 친했다고 말하는 것 조차 조심스러운 사이가 됐지만.


꼭 정 대표님이 아니라도 조만간 밀리언 필름에서 나가리 되면 그 동안 써 둔 시나리오를 들고 또 다시 이 회사 저 회사 돌아다니며 영업을 해야 하는데 장례식장 만큼 한꺼번에 업계 관계자들을 많이 만날 기회도 없다. 그들에게 차기작은 아직 못 만들었지만 죽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어필할 수 있는 가성비 높은 자리인 것이다. 다음 작품은 언제 만드냐는 똑같은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아야 한다는 건 좀 귀찮긴 하지만 다행히 5년 전부턴 그런 질문도 뜸하다.


10년 전쯤 감독으로 잘 나가게 될 줄 알고 백화점에서 비싼 돈 주고 구입한 양복을 입고 집에서 나가려는데 문득 애널맨 아이디로 임 감독의 유작인 ‘유언’에 평점 0.5점과 “더 잘 만들었어야죠 감독님. 이러다 유작되겠어요.”라는 관람평을 달았던 게 떠올랐다. 동시에 내 관람평 그대로 ‘유언’이 임 감독의 유작이 되었다는 사실에 죄책감이 엄습했다. 


얼른 애널맨 계정에 로그인 해서 ‘유언’에 달았던 관람평을 삭제했다. 아무리 임 감독에게 서운했기로서니 선은 넘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건 내가 생각해도 선을 넘은 관람평이었다. 내가 애널맨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모를테니 완전범죄 성립이라고 생각한 순간 난니맨은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떠올라 불안+초조+찝찝해졌다. 한시라도 빨리 난니맨의 정체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알아내야 했다. 


이따가 유력한 용의자 심동민을 만나보면 답이 나오겠거니 했는데 동민에게 전화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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