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감독 데뷔에 실패한 만년 조감독 해원의 죽상을 보고 있기가 힘들어 화장실에 가는 척 일어나려는데 빈소 입구에 젊은 친구들 서넛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피부톤이 화사한 게 기존의 조문객 들과는 톤 앤 매너가 달라도 너무 달라 빈소를 착각한 줄 알았는데 말하는 걸 들어보니 아주 오래 전 임 감독이 잠깐 교수로 머물렀던 대학교의 영화과 학생들 같았다.
나도 그 당시에 임 감독 만나러 학교에 몇 번 갔다가 마주 친 기억이 나서 반가운 마음에 말을 걸어볼까 했지만 저들에게 나는 ‘꼴리는 영화’ 감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거라는 자격지심에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내가 그들이라 해도 중년의 폭망 감독과는 말을 섞고 싶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그저 실패한 영화인일 뿐이다. 게다가 나이 대로 봐선 아직까지 칸느 또는 아카데미 진출의 꿈을 품고 있을 텐데 ‘꼴리는 영화’ 감독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 없다. 내가 해원 형이랑 말 섞기 꺼려지는 거랑 비슷한 이치인 셈이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빠져 일어나지도 못하고 숨을 고르고 있는데 눈이 확 뜨이는 인물이 등장했다. 현직 잘 나가는 투자사 직원이자 영화과 후배 후배 박미나 님이시다. 귀한 분이 이 누추한 곳에 어쩐 일이신지 의아했는데 한 때 미나가 다니던 투자 배급사에서 임 감독에게 러브콜을 보냈던 게 생각났다. 결국 없었던 일이 됐지만 고작 그 정도 인연으로 장례식장까지 온 걸 보니 의외로 의리 있는 스타일이었나?
미나가 빈소에 조문을 하러 들어간 사이 해원과 동민은 그녀가 조문을 하고 나오면 어느 테이블에 가서 앉을 지 살피는 게 느껴졌다. 어쩐지 우리 테이블 일 것 같았고 마음 같아선 예의바르게 인사를 건네고 싶었지만 과거 껄끄러웠던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학창시절 나는 동기 중에 가장 빨리 감독으로 데뷔할 것 처럼 보이는 전도유망한 선배였고 미나는 꿈 많은 영화학과 새내기였다. 하루는 미나가 나를 찾아오더니 시나리오 리뷰를 부탁한 적이 있다. 당시 미나는 얼굴이 예쁜 편이라 못생긴 여자 동기들 사이에서 왕따였고 시나리오 모니터를 마음 편히 부탁할 만큼 친한 남자 동기도 없어서 잘 나가는 선배인 나를 찾아온 것 같았다.
미나가 태어나서 처음 썼다면서 나에게 들이민 시나리오는 아이돌 연습생 오빠와 여고생 사생팬의 사랑 이야기였는데 그야말로 유치뽕짝 싼티 작렬이었고 근본주의 씨네필인 나로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시나리오였다. 신성한 영화학과에서 이런 시나리오가 나왔다는 사실이 마치 머지 않아 찾아 올 영화 매체의 종말을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져 개탄스럽기 그지 없었다.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선생님이 이 시나리오를 봤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 나셨을 것이다.
그 누구보다 까칠한 영화학도였던 나는 미나의 시나리오를 다 읽고는 너는 감독이나 작가 쪽은 아니니 빨리 다른 길을 찾으라고 직언해주었는데 자기는 감독이나 작가 말고는 생각이 없다고 해서 그러면 피디를 하는 게 어떠냐고 조언해주었더니 싸가지 없게 고맙다는 말도 없이 내가 들고 있던 시나리오를 홱 낚아채 가버렸다.
나중에 듣기로는 내 모니터를 듣고 상처가 컸는지 학과 사무실에서 우연히 마주친 동기 김자승이랑 술을 마시며 내 욕을 엄청 하고는 자승이의 자취방에 가서 홧김에 같이 잤다고 했다. 그 날 이후 둘이서 잠깐 사귄 걸로 알고 있는데 자승이 이 새끼는 그래놓고 나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없다. 미나와는 모니터 사건을 계기로 졸업 때까지 아예 교류가 없었고 졸업 후엔 잊고 지냈다. 종종 내가 잘못한 건가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미나는 영화 쪽엔 재능이 없어 보였고 그래도 얼굴은 예쁜 편이니 금방 다른 길을 찾았으려니 했는데 아니었다.
미나가 태어나서 처음 썼다는 아이돌 연습생 오빠와 여고생 사생팬의 사랑 이야기는 나의 혹평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발전시켜 3학년 2학기 때 메이저 영화 제작사에 판매됐고 공동 각본이지만 각본에 이름이 올라갔고 금방 유명 감독이 붙고 스타급 캐스팅까지 성사 돼 촬영에 들어갔으며 졸업하기도 전에 개봉해 대박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흥행 성적을 기록한 덕분에 작가 경력까지 인정받아 졸업과 동시에 메이저 투자사 취업에 성공한 것이다.
그 이후로는 내 조언 때문인지 작가의 길은 접었지만 시나리오를 쓸 줄 알고 볼 줄도 아는 피디로 인정받아 쭉 승승장구 중이었고 감독 지망생으로 빌빌대던 나와는 달리 나 같은 건 보이지도 않을 저 높은 곳에서 유명 감독 피디 배우들과 어울리며 살아온 것이다. 그리고 내가 다년간 영혼을 갈아 넣어 집필한 시나리오가 미나가 다니던 투자사에 들어갔을 때 직접 나에게 전화해서 거절 의사까지 통보해주셨다.
보통은 자기가 직접 연락하진 않는데 오빠가 쓴 시나리오여서 직접 연락을 드리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다는데 예의보다는 복수처럼 느껴졌다. 피차 찝찝한 관계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나니까 예의바르게 인사를 드리는 게 맞겠다 싶어 빈소에서 나오는 타이밍을 살피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미나는 빈소에서 나오자마자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동민과 해원은 내가 미나를 소개시켜주길 바라는 눈치였으나 미나는 그들에게는 아무 관심 없는 티를 팍팍내며 나에게만 말을 걸었다.
“오빠 오랜만이에요.”
“안녕 미나야. 여긴 어쩐 일이야?”
“예전에 임 감독님이 많이 챙겨주셨거든요.”
“그랬어? 그럴 사람이 아닌데.. 하여간 그저 예쁘면..”
“오빠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나야 그냥 그렇지 뭐. 작은 거 하나 준비 중이야.”
“궁금해요 오빠 작품. 지난 번에 보내주신 시나리오도 좋았는데..”
“좋았으면 투자를 했어야지! 자꾸 빈 말하면 이번 작품도 보내준다?”
“당연히 보내주셔야죠. 꼭 보내주세요. 호호호.”
미나는 해 맑게 웃고는 명함이 바뀌었다며 건네줬는데 직책이 무려 한국영화 팀장님이었다. 명함의 무게에 손에 힘이 들어감과 동시에 옆에 있던 동민과 해원의 동요가 느껴졌다.
“아이고 팀장님 영광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무슨 말씀을요. 제가 잘 부탁드릴게요. 감독님.”
폭망 감독도 감독은 감독이지만 어째 폭망 감독도 감독이냐고 빈정대는 것 같아 썩 유쾌하진 않았으나 밀리언 필름 나가리 이후를 준비해야 하니 삐딱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미나는 정말 나에겐 아무런 서운한 감정도 없어 보였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잘 나가니까 여유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눈 코 뜰 새 없이 바쁠테니 나의 모니터 따위는 머리에 담고 있을 이유도 없다. 아니면 나에게 조금이나마 마음이 있었나?
미나는 나와 짧고 굵은 대화를 마친 후 다른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고 동민은 썩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왜? 뭐?”
“아이고 팀장님 영광입니다.. 굽신굽신.. 아니다. 됐다.”
“니가 그 따위니까 아직까지 데뷔를 못 한 거야 이 새끼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넘어왔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꾹 참아 넘겼다. 그리고 농반진반으로 이번 작품도 보내준다는 말을 던진 김에 잽싸게 핸드폰을 꺼내 미나가 건네준 명함에 적혀 있는 이메일 주소로 시나리오를 전송했다. 밀리언 필름에 보낸 각색고가 아무런 답이 없어서 석 달간 끼적인 오리지널 시나리오 ‘버진 어게인’. 신도시 유부녀와 수영강사의 사랑 이야기.. ‘구멍가게’를 만들지 않는 이상 밀리언 필름은 나가리각이니 ‘버진 어게인’마저 안 되면 또 다시 몇 년은 새 시나리오를 쓰면서 보내야 하는데 생각만 해도 눈 앞이 캄캄해졌다.
미나가 떠나고 해원도 담배를 피우러 나가자 테이블엔 동민과 나만 남았다. 아무리 봐도 동민은 난니맨이 아닌 것 같고 더 이상 할 말도 없어서 우울한 침묵만이 감돌던 중 내가 여기에 온 이유이자 한 줄기 햇살이자 루저들의 동앗줄 그 자체인 정 대표님이 빈소 입구에 나타나셨다.
다들 정 대표님이 어디에 가서 앉을지 궁금하는 분위기였는데 황송하게도 우리 테이블에 먼저 들러 주셨고 침울했던 분위기가 급 밝아졌다. 까칠하기만 했던 해원 선배도 정 대표님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헐레벌떡 자리로 돌아왔고 죽상을 풀고 생기없던 눈빛을 초롱초롱 빛내며 정 대표님을 우러러 보았다. 정 대표님은 그런 해원에게 덕담을 건넸다.
“형님! 다시 영화 하셔야죠!”
“고마워 정 대표. 사실 얼마 전부터 꽂힌 아이템이 있어서 다시 쓰고 있던 중이야. 무슨 이야기냐면..”
해원은 아이템 피칭을 하고 싶은 눈치였으나 정 대표님은 얼른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최 감독! 준비는 잘 되고 있지?”
“시나리오만 열심히 쓰고 있어요.”
“내가 뭐 도와줄 건 없고?”
“제가 잘 해야죠! 아 맞다! 누가 형 아냐고 종종 물어보거든요. 그럴 때 형이랑 친하다고 해도 돼요?”
“당연하지! 쪽 팔리게만 하지 말고.”
“고마워요 형. 그럼 나중에 누가 저 아냐고 물어보면 꼭 안다고 말해주시는 거에요!”
정 대표님은 씩 웃고는 다른 테이블로 떠나갔다. 한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정 대표님에게 친하다고 말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는 사실이 마냥 기쁜 와중에 해원은 내 처신이 못 마땅하다는 듯 무섭게 째려보며 말했다.
“야! 니가 내 앞에서 정 대표에게 그러면 선배인 내가 뭐가 되냐? 나 없는 자리에서 그러든가!”
해원은 가뜩이나 일도 안 풀리던 와중에 술도 들어갔겠다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눈치였는데 마침 정 대표님이 다시 테이블로 돌아오자 잽싸게 웃는 얼굴로 돌변했다.
“형님! 나중에 아이템 얘기 꼭 해주세요. 궁금하네요.”
“정말? 그럼 내가 정리되는 대로 꼭 보내줄게. 이메일은 그대로지?”
“그럼요!”
시종일관 죽상이던 해원은 정 대표님이 가까이 올 때만 얼굴이 풀어졌다. 정 대표님은 뭐가 그리 바쁜지 거의 모든 테이블마다 들러 인사를 한 후 메이저 투자사 직원이자 나의 영화과 후배 박미나와 함께 장례식장에서 나갔다. 장례식장을 떠나는 정 대표님과 박미나의 뒷 모습을 보니 박미나가 이 누추한 장례식장에 몸소 방문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바로 정 대표님 때문이었던 것이다. 둘 다 바쁜 사람이니 겸사겸사 여기서 만난 것이다. 그럼 그렇지 박미나가 고작 그 정도 인연으로 임 감독의 장례식장을 방문할 리가 없다.
그들이 떠나자 우리에겐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해원은 시종일관 나와 동민 따위에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슬픈 건 동민과 나도 해원에게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다. 해원 말고 장례식장의 그 누구에게도 굳이 먼저 다가가 인사를 하고 싶진 않았다. 크고 작은 악연으로 얽힌 사람들만 눈에 띄었는데 그 중에 함께 작품을 할 뻔 하다가 엎어진 찐 악연도 몇몇 보였다. 그들과는 잠깐 눈이 마주쳐도 서로 쌩까고 끝까지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