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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nn Nov 06. 2024

갑질과 가스라이팅


장례식장엔 시간이 갈수록 껄끄러운 인연들만 눈에 띄었다. 슬슬 집에 갈 때가 된 것 같아 분위기를 살피고 있는데 입구 쪽에 석소연 팀장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임 감독의 스크립터 출신이니 안 올 수 없었을 것이다. 석 팀장이 빈소에서 조문을 하고 나오길 기다렸다가 냉큼 우리 자리로 끌고 와서 앉혔다.


“너 잘 만났다. 내가 아무리 폭망 감독이어도 그렇지 너무 한 거 아니냐?”

“기다리게 한 건 미안! 두시간 쯤 기다렸나?”

“세시간이거든! 아니다 네시간!”


나는 하나도 안 취했지만 취한 척 하고 강 대표 미팅 때 하염없이 기다리게 만든 것부터 시나리오 피드백에 석 달 넘게 걸린 것과 감히 나에게 19금 떡 영화 ‘구멍가게’ 연출을 제안한 것까지 조목조목 따지고 들었다. 석 팀장은 지금은 감독과 기획팀장의 관계지만 한 때는 임 감독의 조감독과 스크립터로 임 감독의 뒷담화를 까다가 뜬금없이 눈이 맞아 반 년 정도 뜨겁게 지냈던 과거가 있다보니 동민보다 더 편한 구석이 있었다.


“내일 출근할 거지?”

“내가 거길 왜 나가냐? 밀리언 필름 직원도 아니고.”

“나오는 게 좋을 걸? 눈 앞에서 계속 얼쩡거려야 뭐라도 시키지. 안 나오면 감독 방은 다른 감독 줘 버릴 줄 알아.”

“줬다 뺏는 것도 아니고 너무 하네 진짜. 아 됐어. 더럽고 치사해서 안 받아.”


라고 말은 했지만 막상 감독 방을 다른 감독이 차지한다고 생각하자 배가 아팠다. 하지만 기성 감독으로 가오가 있지 냉큼 나가겠다고 할 순 없었다. 나는 계속해서 사람 무시하지 말라고 투덜댔고 석 팀장은 그런 내가 지겨웠는지 도망치듯 옆 테이블로 떠나 버렸다. 따라 갈까 하다가 꼴 보기 싫은 사람들과 쓸데없이 말 섞기가 싫어서 바람도 쐴 겸 장례식장 밖으로 나왔다. 



***



임 감독과의 지난 날을 회상하며 천천히 주차장을 한 바퀴 도는데 흡연 구역에서 은조가 혼자 쓸쓸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조카 같은 은조가 담배를 피우는 걸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담배 피우니?”

“아 네.”


피우지 말라 그러려고 했는데 너무 꼰대 같을까봐 참았다.


“학교 생활은 어때?”

“그냥 그래요.”

“아 맞다. 졸업 작품은? 기대된다 우리 임 감독님 작품!”


은조는 아빠처럼 영화감독이 되겠다며 영화학과에 진학했다.


“감독은 무슨.. 장편 시나리오 내려고요. 연출은 노잼이라..”

“시나리오 작가 하려고?”

“아니요. 드라마 작가요.”

“그래. 작가는 드라마가 낫지.”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 할 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는데 은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아빠 자살 아니에요.”

“자살이 아니면?

“자살 당했어요.”

“누군가 감독님을 죽였다는 거야?”

“네.” 

“누구?” 

“그건 제가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그래.. 어려서부터 영화를 많이 봤으니까..”

“그런 거 아니고요! 진짜에요. 우리 아빠는 자살 아니라고요.”


흡연 구역으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오자 은조는 담배를 끄고 다시 장례식장으로 홱 들어가버렸다. 나도 담배 연기를 피해 흡연 구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려는데 누군가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최경진 감독님이시죠?”

“네 그런데요.”


뒤를 돌아보니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를 형사라고 소개했다. 나이는 내 또래로 보였고 키는 나보다 조금 작지만 덩치가 크고 아주 단단한 돌멩이 같은 인상이었다. 임문호 감독 죽음과 관련해서 몇 가지만 묻고 싶은 게 있다고 했고 물어보시라고 하자 임 감독에게 원한을 가졌을 만한 사람을 아는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았다. 어라? 형사 영화에 나오는 장면이랑 똑같네?


“감독님은 자살 아닌가요?”

“지금으로선 그렇지만 여러가지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어서요.” 

“아 네..”


임 감독의 영화 인생이 30년이 넘는 관계로 별 일이 다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살해당할만큼 원한을 산 일은 없는 것 같다고 하자 혹시 생각나면 연락달라며 명함을 건네줬다. 그런데 형사와 헤어지자마자 바로 딱 한 명의 얼굴이 떠올랐다.


구창한 작가. 


내가 구 작가라면 임 감독을 죽여버리고 싶을 것이다. 목숨처럼 소중한 작품을 임 감독에게 강탈 당했기 때문이다. 구 작가와 임 감독의 악연은 어느 지방 자치 단체에서 주최한 시나리오 공모전에 임 감독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시작되었다. 


임 감독은 공모전 최종심에 올라온 구 작가의 ‘악녀 사냥’을 눈 여겨 보고는 최종심에서 탈락시킨 후 본인이 따로 연락해서 자기가 차린 제작사의 작가로 계약시켰다. 일이 잘 진행 됐다면 구 작가는 공모전 수상에는 실패 했어도 작가 데뷔에는 성공 했겠지만 결과적으로 공모전 수상에도 실패하고 작가 데뷔도 무산되어 버렸다. 구 작가가 각본 수정 작업 도중에 임 감독의 갑질과 가스라이팅을 견디지 못하고 잠수를 타 버리자 임 감독이 각본 크레딧 마저 강탈했기 때문이다.


임 감독은 데뷔 이후 줄곧 ‘각본/감독 임문호’ 크레딧을 고집했다. 감독 크레딧이야 정말로 감독을 했으니 당연히 임 감독의 이름이 올라가야 하지만 각본은 항상 문제가 됐다. 데뷔작을 빼고는 언제나 신인 작가의 작품을 픽업해 어느 순간부터는 작가를 소외시킨 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작가가 제 발로 나가게 만들어 버리고 각본 크레딧에 단독으로 이름을 올리는 수법을 썼기 때문이다.


구 작가의 ‘악녀 사냥’은 결국 임 감독 단독 각본 크레딧으로 극장에 걸렸고 흥행에도 성공했다. 그 작품이 내가 조감독으로 참여한 마지막 작품인데 당시엔 나도 정신이 없어서 구 작가 생각을 못 하다가 개봉까지 마치고 나자 구 작가 생각이 났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서 연락을 했지만 전화 번호가 바뀌어 있었다. 그 뒤로도 구 작가 생각만 하면 항상 불편했으나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부디 잘 살고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내가 만약 공모전 수상에 실패했는데 그게 임 감독 때문이고 결국 작가 크레딧마저 뺏겼다면 임 감독을 죽이고도 남겠지만 그래도 설마 구 작가가 임 감독을 죽였을 것 같진 않았다. 임 감독은 그냥 죽은 것도 아니고 자살인데 어떻게 사람을 자살 시킬 수 있겠는가. 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어떤 방법을 썼을 지 나도 모르게 추리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내 쪽으로 성큼 성큼 다가와 꾸벅하고 인사를 했다.


“조감독님 안녕하세요?”


이번에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확실히 기억에 없는 얼굴이었다. 나를 조감독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조감독 시절의 인연이고 낯이 익은 것 같기도 한데 당췌 누군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185cm 쯤 되는 큰 키에 멀끔하니 잘 생긴 얼굴과 부티나면서도 깔끔한 차림새를 보아하니 배우 지망생 쪽인듯 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얼굴이 생각 나지 않을 정도면 긴 이야기를 나눌 만한 관계는 아닐테니 대충 인사하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그는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얼떨결에 손을 잡았는데 헬스를 열심히 하는지 악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저에요. 조감독님. 아 이제 감독님이구나!”

“실례지만..”

“구 작가요. 구창한 작가.”


얼굴은 애매했는데 목소리는 기억에 있었다. 니가 구 작가라고?


“구 작가? 구창한 작가?”

“네. 이제야 알아보시네요. 다시 인사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조감독님! 아니 감독님! 저 ‘악녀 사냥’ 구 작가입니다. 비록 크레딧엔 안 올라갔지만 조감독님 아니 감독님은 기억하실테니까..”


구 작가는 알지만 내 눈 앞에 있는 사람과는 도저히 매치가 되지 않았다. 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한 마디 더 보탰다.


“예전에 임문호 감독님과 잠깐 작업 했었는데.. 저 기억 안 나세요?”


얼굴은 몰라도 목소리를 계속 듣다 보니 확실히 기억이 났다.


“아.. 기억 나죠. 구 작가 아니 작가님.. 그런데.. 얼굴이.. 우와 몰라보게 잘 생겨지셨네!”


옛날엔 내가 나이가 많고 업계 선배이기도 해서 말을 편하게 했는데 시간이 많이 지났고 얼굴도 몰라보게 잘 생겨져서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다시 보니 얼굴만 잘 생겨진 게 아니었다. 관리를 열심히 하는 지 몸도 탄탄하고 근육질이었다.


예전엔 빼빼 마른데다 병약한 인상이어서 싸우면 이길 것 같았는데 지금은 팔뚝과 갑바가 빠방하게 벌크업 되어 있었다. 말을 놨다가 기분 나쁘다고 덤비면 어떡하나 걱정은 됐지만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수 틀리면 안 보면 그만이니 말을 편하게 놔버렸다.


“그런데 진짜 구 작가 맞아? 길에서 봤으면 몰라봤겠어! 어디 고친 건 아니지?”

“조금 고쳤어요. 헤헤.”


농담이었는데 진짜 고쳤다고 하니까 말 문이 막혔다. 어디를 어떻게 고쳤는지 알려달라고 할 수도 없고..


“잘 했어. 완전 미남이다.”

“고마워요 조감독님. 아니 감독님! 그리고 영화 잘 봤습니다. ‘꼴리는 영화’요.”

“감독은 무슨.. 편하게 불러. 원래 형이라고 불렀잖아.”

“아닙니다 감독님! 제가 감히 어떻게..”

“같이 늙어가는 사이에 뭐 편할 대로 해.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야? 임 감독님이랑 교류가 있었어?”


임 감독에게 소중한 작품을 빼앗기고 좋은 감정이 아니었을텐데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구 작가가 여기에 올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교류 같은 건 전혀 없었어요. 그냥 언젠가 꼭 다시 뵙고 싶었거든요.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이렇게라도 봤으면 됐지 뭐. 덕분에 나도 이렇게 구 작가를 다시 만나게 됐잖아. 연락은 누구한테 받았어?”

“안 받았어요. 감독님 돌아가셨다는 기사 보고 왔어요.”

“그랬구나. 그 때 일은 내가 대신 사과 할게. 감독님도 말은 안 했지만 아마 미안해 하고 계실 거야.” 

“에이 다 지난 일인 걸요. 그리고 저도 잘못이 있어요. 그렇게 연락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게 아닌데..”


다 지난 일 돌이켜보면 뭐하나 싶어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그동안 어떻게 지낸 거야? 그래도 우린 친했는데 연락도 안 되고.. 섭섭하더라고.”

“감독님에겐 정말 죄송했어요. 다시 사과드릴게요. 그리고 저는 다른 일은 안 하고 작품만 썼어요.”

“그랬구나. 진짜 다른 일은 하나도 안 하고?”

“네. 쭉 작품만 썼어요.”

“그런데 내가 왜 몰랐지? 구 작가 정도의 필력이라면 금방 수면 위로 올라왔을 텐데.. 우리 안 본지 15년 쯤 됐잖아? 아닌가? 20년인가?”

“그쯤 된 거 같아요. 사실은 얼마 전에야 완성 했거든요.”

“한 편만 썼어?”

“제대로 쓴 건 한 편이요.”

“에이.. 구 작가가 농담이 늘었네? 어떻게 사람이 10년 넘게 한 편만 써. 얼굴이 변하니까 성격도 변한 거야?”

“진짜에요. 감독님. 딱 한 편만 썼어요.”


눈빛을 보니 농담같진 않았다. 구 작가의 지난 인생을 생각하니 눈 앞이 어질어질했다. 임 감독에게 작품을 뺏기고 영화 판에 정이 떨어져서 아예 다른 일을 했으면 모를까 그런 일을 겪고도 글만 썼다니.. 그것도 딱 한 편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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