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데뷔와 동시에 폭망한 나보다 10년 넘게 오직 한 편만 쓰고 있는 구 작가가 더 힘들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절로 숙연해졌다.
“대단하네. 어떤 작품인지 궁금한 걸? 10년 넘게 딱 한 편만 썼다니..”
문득 구 작가가 부자집 자식이었나? 기억을 돌이켜봤으나 하도 오래전 일이라 가물가물했다. 하지만 분명 부자집 자식 느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에이.. 망생이 주제에 뭐 대단한 걸 썼겠어요? 그냥 습작 수준이죠 뭐. 조금 더 다듬어서 내년엔 공모전에 내보려고요.”
“그래 공모전 좋지. 결국엔 공모전이 최고야. 공모전도 이왕이면 나라에서 하는 공모전이 좋고. 그럼 공모전 내고 한가할 때 연락줘. 언제 커피나 한 잔 해.”
“네 감독님! 그리고 이런 부탁 드려도 되는 지 모르겠는데 혹시 제 작품 좀 봐 주실 수 있으실까요?”
“당연하지! 누구 작품인데!”
“그럼 연락처 좀..”
구 작가가 핸드폰을 건넸고 잠깐 망설이다 번호를 찍어주었다. 언제든 연락 달라고 말은 했지만 아차 싶었다. 작가 지망생의 작품을 읽어봤다간 남는 것도 없이 언젠가 표절이니 뭐니 피곤한 일만 생길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처럼 아이템이라는 건 어떻게든 겹칠 수 밖에 없다. 작정하고 표절이라고 우기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나 나같은 기성 감독은 작가 지망생들의 타겟이 되기 쉬운데 그 중에서도 구 작가처럼 10년 넘게 한 작품만 쓴 작가 지망생에게 표절이니 뭐니 해서 잘못 걸렸다가는 두고 두고 구설에 휘말릴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작가 지망생들의 작품 모니터는 정말 신뢰할 수 있는 사이 말고는 받지 않는 편인데 이번엔 워낙에 오랜만의 만남이라 방심해버렸다. 구 작가는 그런 내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지 내 번호를 받자마자 아이처럼 기뻐하며 꼭 연락 드리겠다는 말을 남기고 주차장 쪽으로 사라져버렸다.
설마.. 별 일 있겠어?
***
장례식장에 들어와 동민에게 방금 구 작가를 만났다고 이야기 했더니 얼굴이 굳어졌다. 그럴 만한게 동민은 구 작가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임 감독이 제작사를 차렸을 때 동민은 임 감독이 준비하는 작품의 시나리오 모니터 요원으로 몇 번 참여한 적이 있고 그 누구보다 열심히 아이디어를 내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걸 아이디어라고 내는 거냐고 구 작가에게 무시와 구박을 당했었다. 구 작가가 은근히 강약약강 스타일이다.
한 번은 나와 구 작가 그리고 심동민 셋이서 술자리를 가졌던 적이 있는데 이 날 구 작가는 동민이 시나리오 모니터 하는 걸 들어봤고 동민이 직접 쓴 시나리오도 읽어봤는데 동민에게는 감독이나 작가의 재능은 없는 것 같다고 직언을 했고 동민은 큰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동민은 이쪽 일에 재능이 없다. 감독 준비를 17년 했어도 안 됐으면 이번 생엔 안 되는 거다.
“진짜? 구 작가가 여길 왔다고? 왠 일이래? 무슨 이야기 했어?”
“별 얘기 안 했어. 그냥 나중에 커피나 한 잔 하자?”
“왜 온 거지? 임 감독님과 좋은 기억이 없을텐데.. 넌 연락 한 적 있어?”
“없지. 나도 놀랐어.”
“살아 있는 줄도 몰랐는데 별 일 다 있네. 요즘 뭐 하고 사는데?”
“시나리오 쓴대.”
“다른 일은 안 하고?”
“응. 10년 넘게 계속 시나리오만 썼대.”
“쯧쯧.. 에휴.. 영화가 뭐라고..”
17년 째 입봉 준비 중인 심동민이 10년 넘게 한 작품만 쓰고 있는 구창한을 가엾이 여긴다는 게 아이러니 했다. 기성 감독인 나로서는 둘 다 도찐개찐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었다.
바로 그 때 유정에게 전화가 왔다. 집에 빨리 가 봤자 좋을 일도 없고 반기는 이도 없어서 장례식장 핑계로 최대한 늦게 들어가려고 했는데 빨리 오라고 했다. 장인 장모님이 오랜만에 왔는데 내 얼굴을 보고 가려 한다는 것이다. 집에 가기 싫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처가에서 틈틈이 생활비를 지원받는 처지라 얼굴 도장은 찍어야 할 것 같았다. 이게 다 ‘꼴리는 영화’ 때문이다. 그렇게 폭망하지만 않았어도..
동민과 해원 선배에게 먼저 일어난다고 인사를 한 후 꿈도 희망도 없는 테이블에서 일어나 터덜터덜 장례식장 정문으로 걸어 나오는데 뒤쪽에서 부르릉 굉음과 함께 포르쉐 한 대가 굴러 오더니 내 앞에 멈춰 섰다. 포르쉐가 나한테 무슨 볼 일이지? 뭔 일인가 싶어 걸음을 멈추자 조수석 창문이 내려가고 운전석에 앉아 있는 구 작가의 얼굴이 나타났다. 구 작가가 포르쉐 오너?
“감독님! 어디로 가세요?”
“어? 나 지하철역.”
“타세요. 역까지 데려다 드릴게요.”
“됐어. 괜찮아.”
“괜찮긴요. 여기서 멀어요.”
“진짜 괜찮아. 그냥 좀 걷고 싶어서 그래. 생각할 일도 있고.”
솔직히 괜찮지 않았고 걷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지하철역까지는 걸어서 20분. 지하철역에서 집까지는 또다시 대략 1시간 반쯤 걸린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리고 현기증이 났다.
“이거 구 작가 차야?”
“네. 뽑은 지 얼마 안 됐어요.”
“최신형이지? 유튜브에서 보고 진짜 궁금했는데..”
“그럼 시승 한 번 해보시죠!”
“에이 시승은 무슨.. 그래도 한 번 타보는 건 괜찮겠지?”
“당연하죠!”
나는 못 이기는 척 하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과거에는 찌질했던 구 작가가 이제는 외제차 중에서도 탑티어인 포르쉐를 타고 다닌다는 사실이 놀라웠는데 내부가 깔끔하고 관리가 잘 되어 있어 또 한 번 놀랐다. 내 기억에 과거의 구 작가는 깔끔과는 거리가 먼 지저분한 스타일이었다. 내가 차에 오르자마자 기분 좋은 진동과 함께 차가 미끄러져 나갔다.
“진짜 좋다. 구 작가 성공했나봐?”
“에이 아니에요! 성공은 무슨..”
“무슨 일 하면 이런 차 살 수 있는 거야? 좋은 거 있음 나도 알려줘. 같이 좀 벌자.”
“번 건 아니고요.. 생겼어요.”
“돈이 갑자기 생겼다고?”
“네.”
“아니 어떻게 돈이 갑자기 생길 수가 있지? 로또라도 된 거야?”
구 작가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괜히 물어봤나? 큰 돈이 갑자기 생겼다면.. 말을 못하는 걸 보니 무슨 불법적인 일 하는 거 아냐? 설마 조폭? 도박? 토사장? 따지고 보면 친한 것도 아닌데 친한 척 했다가 혼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대답이 없는 걸 보면 내가 선을 넘었다고 느낀 것일 수도 있다. 잽싸게 화제를 돌렸다.
“확실히 코너링이 다르네. 전고가 낮아서 그런가?”
“몰아보실래요?”
“에이.. 넘 비싸서.. 그러다 긁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난 감당 못한다.”
구 작가는 차를 갓길에 대더니 차에서 내려 조수석쪽으로 다가와 문을 열었다.
“몰아보세요. 진짜 괜찮아요.”
“아유 진짜 괜찮긴 한데..”
이렇게까지 몰아보라는데.. 나는 못 이기는 척 운전석에 올라 조심스레 액셀을 밟았다.
“헛..”
끝내줬다. 자본주의 만세다. 더 몰고 싶었지만 행여나 기스라도 낫다간 물어줄 돈도 없고 가오도 상할 것 같아 차를 갓길에 대려는데 구 작가는 절대 안 내릴거라며 집까지 몰고 가라고 했다.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나는 또 다시 못 이기는 척 하고 액셀을 꾹 밟아주었다.
“부모님은 건강하시고?”
“아니요. 두 분 다 돌아가셨어요.”
“아니 어쩌다..”
“그렇게 됐어요.”
“미안. 전혀 몰랐네. 연락이라도 주지 그랬어.”
“뭘요.. 좋은 일도 아닌데.. 괜히 민폐 같고.. 사실은 그래서 돈이 생겼어요. 보험금이요. 로또라면 로또죠.”
“로또라니.. 보험금이지. 그랬구나.. 미안하다. 내가 괜한 소리를 했네..”
“덕분이라고 하긴 그래서 글만 쓸 수 있었던 거에요. 완성까지 너무 오래 걸리긴 했지만요. 사실 아직도 완성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잘 했어. 부모님도 잘 했다고 하실거야. 돈 있으면 하고 싶은 일 하는 게 맞지. 그래도 구 작가 재능 있잖아? 포기하긴 너무 아까워. 사실 난 구 작가가 우리와는 연락이 두절 됐지만 언젠간 반드시 극장에서 구 작가의 작품을 보게 될 거라고 믿었거든.”
“저도 마찬가지에요. 감독님은 꼭 감독 데뷔에 성공하실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영화는 잘 봤습니다. 개봉 첫날 극장 가서 봤고요 정말 최고였어요! 별점도 만점 줬습니다!”
“진짜? 고마워. 만점이나 줬다니.. 덕분에 평균이 올라갔네? 하하.”
구 작가의 관람평과 진짜로 만점을 줬는지 궁금해서 보여달라고 할까 잠깐 고민했지만 빈말이면 서로 민망할 것 같아 그렇다 치고 넘어갔다.
“평균이요?”
“응. 10점 줬다면 큰 도움이 되지. 비록 5점대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누가 0.5점을 줘서 4점대로 떨어지긴 했지만.. 평점 낮다고 가끔 비웃고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거든.”
“누가요?”
“있어. 은근히 그러기도 하고.”
“지들이나 잘 할 것이지 진짜 할 일 없는 놈들이네요. 그런 놈들 신경쓰지 마세요.”
구 작가의 격려와 위로에 나도 모르게 ‘꼴리는 영화’ 개봉 이후 겪었던 고난과 역경 그리고 서러움 대한 폭풍 하소연이 방언처럼 터져 나왔다. 하지만 너무 다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간 무시당할까봐 지금 밀리언 필름에서 준비하고 있는 차기작은 잘 진행되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어느덧 저 멀리 우리 집 아파트가 보였고 정문 앞에 차를 대고 내리자 구 작가도 따라서 내리더니 집에 가자마자 이메일로 시나리오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천천히 해. 마음 바뀌면 안 보내줘도 되고.”
“아니에요. 감독님 꼭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럼 편안한 밤 되세요!”
구 작가가 떠나고 혼자가 되자 문득 내가 지금까지 대화를 나눈 사람이 정말 구 작가가 맞는 지 의문이 들었다. 얼굴은 조금 고쳐서 몰라봤다 해도 성격도 내가 기억하는 구 작가와는 완전 딴 판이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하도 오래전의 인연이라 원래 얼굴과 목소리도 가물가물했다.
만약 내가 지금까지 대화를 나눈 사람이 구 작가가 아니라면? 누군가 구 작가의 신분을 훔쳐서 구 작가 흉내를 내는 중이라면? 하지만 누군가 굳이 구 작가 흉내를 내고 다닐 이유가 없고 그렇다고 해도 임 감독의 장례식장까지 찾아올 이유가 없잖아? 아니면 내가 모를 뭔가가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