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Zinn Nov 22. 2024

배 아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


확실히 기억나는 건 구 작가는 진짜 병약하고 왜소한 체형에 내성적이고 까칠한 유리 멘탈이었다는 사실이다. 임 감독과의 관계가 틀어진 것도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본인의 성격이 크게 한 몫을 했다. 


그런데 방금 전의 구 작가는 그 때와는 너무 다르다. 나이를 먹어서 성격이 수더분해 진 걸까? 하긴 돈 걱정 없이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면 성격이 부드러워질 수도 있겠다. 부모님 보험금을 로또라고 부르는 걸 봐도 확실히 여유가 생긴 것 같고 보아하니 영화는 취미로 하는 것 같다.


영화를 취미로 하는 인생이라면 힘들 수가 없는 것이다. 10년 넘게 데뷔도 못하고 오직 한 편만 쓰고 있는 구 작가가 힘들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건 괜한 걱정이었다. 설상가상 구 작가는 영앤리치 포르쉐 오너고 나는 폭망 떡 영화 감독 아빠를 부끄러워하는 사춘기 중2병 딸이 기다리고 있는 집에 들어가야 하는 신세다.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아 편의점에 들러 쓰린 속을 달래려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그리고 17년째 입봉 준비 중인 심동민에게 구 작가 차가 포르쉐고 영화는 취미로 하는 것 같다고 말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배 아픔은 나누면 반이 되니까. 구 작가 포르쉐 탄다는 얘기를 들은 심동민의 얼굴을 상상만 해도 속이 한결 편해졌다.


그래. 까짓꺼 포르쉐도 몰게 해 줬으니 시나리오 보내주면 모니터 정도는 해 주자.



***



우리 가족이 지금 살고 있는 집은 결혼할 때 처가에서 마련해 주었고 명의도 아내인 유정 이름으로 되어 있다. 유정이 나랑 결혼 하겠다고 했을 때 처가 집 식구 모두가 반대했었다. 유정은 고등학교 선생님인데 나는 아직 데뷔도 못한 조감독 나부랑이고 집도 잘 사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속도 위반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마지 못해 허락해주었다. 임 감독은 내가 고등학교 선생님과 결혼한다고 하자 평생 영화 일을 할 수 있겠다며 잘 했다고 칭찬해주었다.


초등학교 선생님인 우리 아빠와 전업 주부인 엄마는 아들에게 집을 사줄 형편이 못 되었다. 아직까지도 가끔씩 용돈을 보내주는 아빠는 하나 뿐인 아들의 영화과 진학은 반대하셨지만 졸업 후엔 항상 좋은 영화 만들라고 응원해주셨고 데뷔작이 폭망했어도 주변 사람들에겐 우리 아들 영화 감독이라고 자랑을 하고 다니셨다. 데뷔작도 재밌게 봐주셨고 요즘에도 연락을 드리면 차기작은 언제 개봉하냐고 물어보신다. 나중에 커서 떡 영화 만들라고 힘들게 낳아주고 키워주신 건 아니었을 텐데.. 엄마 아빠만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부채 의식에 마음이 무거웠지만 처가 식구들 앞에서 죽상을 하고 있을 순 없어 억지로 기운을 내 집에 들어가자 장인 장모님은 반가이 맞아주시더니 근처에 일이 있어서 왔다가 잠깐 들렀다면서 이제 얼굴 봤으니 가겠다고 했다. 처형은 내가 영 못 마땅한 눈치였다. 어린 나이에 결혼했다가 금방 이혼하고 처가에 얹혀 살고 있는 처형과는 처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나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는데 처형은 동생이 아깝다며 나를 싫어하는 티를 팍팍 내 도저히 친하게 지낼 수가 없었다.


“최 감독! 작품 준비는 잘 되어 가지?”

“네 아버님. 이번엔 반드시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인자한 얼굴로 나를 격려하는 장인과는 다르게 장모님은 처형처럼 내가 못 마땅한 눈치였다.


“하라는 카페는 안 하고..”


장모님은 유정이 세미를 낳은 이후부터 감독 따윈 때려치우고 자기네 빌라 건물 1층에서 카페나 하라고 했다. 선생님인 유정의 내조를 하라는 명분을 내세워 처가집의 머슴이 되라는 속셈이 훤히 보여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 카페는 지금 이혼하고 돌아온 처형이 운영 중이라 더 이상 그런 얘기는 하지 않았다. 장모님은 유정에게 잘 해주라고 한소리 하고 나가셨다. 내가 엘리베이터까지 따라나가자 이번엔 처형이 얄밉게 쏘아붙였다.


“세미 시집가기 전엔 볼 수 있는 거죠? 그 작품이란 거.”

“헤헤. 그럼요.”

“이번엔 그런 영화 아니죠? 설마 이번에도 꼴리는..”

“물론이죠!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연락 드리겠습니다!”


처형의 떨떠름한 표정을 마지막으로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이제야 숨통이 트였고 억지로 미소를 띄고 있었더니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마음 같아선 처형과는 안 보고 살고 싶지만 처가에서 가끔씩 생활비까지 받고 있는 처지라 어찌할 도리가 없다. 처가 식구들을 배웅하고 집에 들어오자 세미는 아무 말 없이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마음 같아선 마빡에 딱밤이라도 먹이고 싶지만 그랬다가 또 삐져서 몇 년간 아빠랑 말도 안 하고 투명인간 취급할 게 뻔해 꾹 참았다. 


세미가 아빠의 데뷔작 ‘꼴리는 영화’ 때문에 친구들에게 왕따와 놀림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나니 아무리 버릇없이 행동해도 엄하게 혼낼 수가 없었다. 그저 아빠가 못나서 미안할 뿐이다. 세미에게 자랑스러운 아빠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루 빨리 차기작을 만드는 것 뿐이다. 이왕이면 10대 소녀들에게 인기 있는 꽃미남들이 잔뜩 나오면 좋을 것이다. 아빠 영화 촬영장에 친구들이랑 놀러와서 싸인 받고 인증 샷도 찍게 해 주면 적어도 왕따는 안 당하겠지.


장례식장에 이어 처가 식구들까지 상대하느라 기가 다 빨려 후딱 씻고 자려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집 안 분위기가 썰렁했다. 세미는 그렇다쳐도 유정까지 한 마디도 안 하는 걸 보니 어쩐지 둘이서 한 바탕 전쟁을 치른 분위기였다.


“집 안 분위기가 왜 또 이래?”

“아 몰라.”

“빨랑 말해. 일 커지고 나서 말하지 말고.”


유정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학원 보내달래.”

“정말? 왠일이래? 배우는 접고?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얼른 보내줘. 딸이 공부하겠다는데 그 정도는 해 줘야지.”


유정이 한숨을 쉬었다.


“연기 학원 보내달라니까 그렇지. 누가 재능있다고 했다나 뭐라나.”

“연기 학원? 재능 있다고 한 사람이 누군데?”

“학원 관계자겠지. 도대체 누구를 닮아서 저 모양인지.. 당신 딸이니 당신이 책임 져.” 


유정은 톡 쏘아붙이고는 먼저 안방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이런 사기꾼 양아치 같은 놈들.. 순진한 어린 애를 상대로 거짓말을 하다니. 백프로 장사 속인걸 아는데 돈을 버리면 버렸지 그 딴 학원에는 등록시켜주기 싫었다. 내가 감독이라서 아는데 세마는 딱 봐도 배우 쪽은 아니다. 하지만 세미에겐 진실을 말해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아빠가 폭망 감독이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빨리 차기작을 만들어 만회하는 수 밖에 없다. 그래야 세미도 아빠에 대한 존경심이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지만 밀리언 필름의 ‘구멍가게’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부디 미나가 ‘버진 어게인’을 좋게 봐주었으면 좋겠는데.. 문득 미나가 내가 보내준 시나리오를 읽었는지 너무 너무 궁금해졌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왠지 확인하지 않고선 잠을 못 이룰 것 같았다.


‘자니? 늦은 밤에 미안.. 시나리오 보냈는데 확인했나 궁금해서..’

‘지금 읽고 있어요. 재밌네요.’


역시 잘 나가는 투자사 직원은 다르다. 워라밸 따윈 무시하고 24시간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해야 잘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마침 미나가 다니는 투자사가 밀리언 필름 근처여서 조만간 시나리오 이야기도 할 겸 간단하게 커피 한 잔 하기로 하고 톡을 마무리 지었다.


사람 일 모른다. 미나 쪽에서 그린라이트를 켜주기만 하면 밀리언 필름 따위에선 보란듯이 뛰쳐 나갈 것이다. 물론 혼자 나오진 않을 것이다. 양서연 피디도 데리고 나올 것이다. 서연이라면 내가 나오라고 하면 따라 나오겠지. 밀리언 필름 이후 서연과의 희망찬 미래를 꿈꾸며 잠자리에 들려는데 카톡 알림이 울렸다. 


벌써 다 읽었나? 미나에게서 톡이 온 줄 알고 스마트폰을 확인해보니 미나가 아니고 영화과 동기 조지선이다. 진짜 오랜만이고 뜬금없는 타이밍이었다.


‘니가 이럴 줄은 몰랐어. 나에게 지은 죄는 다 잊은 거니? 나는 니가 첫 키스였어.’


심장이 철렁 내려 앉았다. 이게 미쳤나? ‘나에게 지은 죄’라니! 무서워서 얼른 핸드폰을 꺼버렸다. 잘못 엮였다간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설마 25년 전 으슥한 캠퍼스 운동장 구석에서 가볍게 뽀뽀한 걸 두고 첫 키스라는 건 아니겠지? 


지금은 내가 유명 감독이 아니어서 별 일 없겠지만 만약 차기작이 대박난 다음에 언론에 폭로하겠다고 협박이라도 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되는 걸까? 하지만 차기작이 대박나는 건 너무나도 먼 미래의 일이고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라 눈 딱 감고 자려고 했는데 다시금 지선이 난니맨일 가능성이 떠올랐다. 


아닌 것 같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만약 지선이 애널맨의 정체를 폭로한다면 나는 업계에서 매장이다. 지인들의 영화를 한 두 편 난도질 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선이 애널맨의 정체를 어떻게 알았지? 나는 그 누구에게도 내가 애널맨이라는 사실을 이야기 한 적이 없고 지선과는 아예 교류 자체가 끊긴 지 오래다. 자연스레 지선은 용의자 후보에서 제외됐다. 무엇보다 지선이 난니맨이라면 애널맨이 최경진 감독이라는 사실을 진작에 폭로 했을 것이다. 에라 모르겠다. 지금은 누군지도 모를 난니맨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다. 당장 내일 출근이 걱정이다.


내가 안 나가면 감독 방을 다른 감독이 차지한다니 도저히 그 꼴은 못보겠어서 나가긴 하겠다만 막상 출근할 생각을 하니 잠이 오질 않았다. 감독 방에서 하루 종일 뭐하지? 점심은 누구랑 먹지? 그냥 집에서 브런치를 먹고 가는 게 좋겠다. 어쩐지 멀뚱히 감독방에 혼자 앉아 하루 종일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해 질 무렵 쓸쓸이 집에 오는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혹시 환영식 같은 건 안 해 주려나? 딱히 바라는 건 아니지만 막상 안 해 주면 서운할 것 같은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