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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nn Dec 02. 2024

감독 준비 3종 세트 공황장애, 우울증, 알콜 중독


시나리오 회의가 있을 때만 가끔씩 가다가 매일 출근을 하려니 귀찮았지만 그래도 마냥 백수처럼 살다가 점심 전에 일어나 집에서 나가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뭔가를 바리바리 싸들고 다니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빈손으로 가긴 허전해서 배낭에 집에서 쓰는 7년 된 노트북을 챙겼다. 남이 쓰던 회사 데스크탑을 쓰는 건 영 내키지 않았다. 


1시간 정도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사무실에 도착하니 1시쯤이었다. 지하철 안에서 미리 사무실 분위기도 파악할 겸 서연의 인스타를 들여다봤지만 별 다를 게 없었다. 밀리언 필름 건물 1층에서 크게 심호흡을 하고 사무실에 올라가니 석 팀장과 강 대표는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서연과 재웅이 감독 방으로 안내해주었다. 


둘 다 엉거주춤이긴 했지만 그래도 자리에서 일어나 깍듯하게 인사를 해줘서 고마웠다. 만약 아무도 아는 척을 안 해주면 어떡하나 걱정이었기 때문이다.


“뭐 필요한 거 없으세요?”


감독 방에 들어가 자리에 앉자 재웅이 친절하게 물어봐주었다.


“아직은 없는 것 같네. 고마워.”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재웅이 나가고 천천히 방을 둘러보았다. 방은 작지만 깔끔했다. 책상 하나, 의자 하나, 2인용 소파 하나로 꽉 차 있었고 책상 위의 데스크탑 앞에는 감독 최경진이라고 적혀 있는 명함 한 뭉치가 놓여 있었다. 전에 이 방을 썼던 이현철 감독의 흔적은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지금쯤 뭐하고 있으려나? 자고 있겠지. 아니면 좀 전에 일어났거나. 


이현철 감독은 밀리언 필름이 마지막 기회였을 것이다. 여기서 잘 했어야 했다. 이대로 또 한 명의 감독이 한국영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남 일 같지 않아 기분이 착찹했다.


나도 언젠간 그렇게 되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꼴리는 영화’를 마지막으로 영화 인생을 끝낼 수는 없다. 어떻게든 차기작을 만들어야 한다. 물론 ‘구멍가게’도 아니다. 감독 방을 주고 명함까지 만들어줘서 고맙긴 한데 ‘구멍가게’ 연출 제안은 여전히 불쾌하다. 최소한 제목이라도 바꿔야 한다.


한국영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현철 감독이 쓰던 데스크탑이라 찝찝했지만 뭐가 들어있나 궁금해서 전원 버튼을 눌러 보니 바탕화면에 ‘구멍가게’라는 이름의 한글 파일 하나가 덩그라니 떠 있었다. 클릭해서 파일을 열어보니 무려 17고였다. 


대충 읽어보니 강 대표의 말대로 서울 변두리 동네에서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섹시한 여 사장이 미스터리한 분위기의 남자 손님을 만나서 벌어지는 이야기였는데 한 때 유행했던 전형적인 양산형 에로 영화여서 더 읽을 이유가 없었고 왜 엎어졌는지도 알 것 같았다. 캐스팅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오늘만 사는 여배우라면 모를까 세상에 어느 여배우가 이딴 허접 쓰레기 같은 작품에 출연하겠는가!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이 방에서 나 홀로 ‘구멍가게’ 18고를 집필하고 있는 광경을 상상하니 현기증이 났다. 그래도 연출 제안을 받은 작품이니 끝까지 읽어 보려 했는데 어차피 안 될 작품이라 생각하니 도저히 읽히지가 않았고 자꾸만 난니맨 생각이 나서 집중이 되질 않았다. 생각하면 할 수록 괘씸했다. 


동민과 지선은 난니맨이 아니다. 확실친 않지만 굳이 다음 용의자를 꼽자면 영화과 후배이자 ‘꼴리는 영화’의 조감독이었던 자승이다. 자승이도 동민만큼이나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자승이 난니맨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확인해야 할까? 불러내서 간을 볼까? 


감독 방도 생겼고 하니 ‘구멍가게’ 조감독 제안을 핑계로 한 번 불러내봐야겠다. 딱히 조감독을 해 주길 바라는 건 아니다. 어릴 땐 빠릿빠릿하고 말도 잘 들었는데 나이 먹고 머리 컸다고 이젠 말도 안 듣고 호락호락한 맛이 없어서 불편하다. 자승이 안 한다고 하면 누굴 시켜야 되나 고민하고 있는데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석 팀장이 들어왔다. 그리고 말 없이 법카를 내밀었다. 점심도 사 먹고 사람들 만날 때 진행비로 쓰라는 것이다. 


“진짜? 정말 정말 고마워! 왠일이니?” 

“감독님인데 당연하지. 그리고 사무실에 적응도 해야 하니까 다음 작품 얘긴 천천히 하자.”

“좋지. 그런데 다음 작품이 꼭 ‘구멍가게’인건 아니겠지?”

“훗훗. 나중에 얘기하자.”


석 팀장이 어색하게 웃으며 감독방에서 나갔다. 이 정도 얘기했음 알아 먹었겠지. 감독을 안 하면 안 했지 ‘구멍가게’는 절대로 안 한다. 가족에게 부끄러운 작품을 만드는 건 ‘꼴리는 영화’ 한 편으로 충분하다. 절대로 연출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회사에서 준비하는 작품이고 법카도 받았으니 다시 한 번 도전했지만 역시나 읽히지 않았다. 


아 맞다! 여긴 기획팀이 있지! 기획PD들에게 요약 정리해달라고 부탁하면 안 될까? 아니지. 그래도 명색이 강 대표가 야심차게 진행하는 작품인데 요약해달라고 하면 강 대표를 무시하는 줄 알 것이다. 무시하는 건 사실이지만 티는 내지 말자. 싸우자는 건 아니니까.


그렇지! 자승이에게 시키자. 조감독 제안도 할 겸 마침 잘 됐네. 마지막에 봤을 때 더 이상 조감독 생각은 없다고 했지만 어떻게든 설득해서 한 편만 시켜야지. 곧장 자승에게 카톡을 보냈다. 


“뭐하니?”

“뭣 좀 쓰고 있어요.”

“잠깐 보자. 시나리오도 볼 겸..”


자승이는 몇 달 전부터 자기가 10년 만에 시나리오를 썼다며 모니터를 부탁했는데 메일로 보낼 순 없다고 해서 조만간 만나기로 했지만 귀찮아서 안 만나고 있었다. 마침 녀석의 반지하 자취방은 밀리언 필름 근처였고 내가 밀리언 필름이라는 신생 영화사에 감독 방이 생겨 출근했다고 하니 근처로 오겠다고 했다.


어쩐지 자승이 난니맨일 지도 모르겠다는 의혹이 솟아났다. 범행 동기는 몇 년 동안 집필한 시나리오를 냅다 안 읽어줘서 빈정이 상했기 때문이다. 모욕감을 느낀 거지. 모름지기 감독 준비를 오래 하다 보면 3종 세트가 찾아온다. 공황장애, 우울증, 알콜 중독. 자승이는 술은 안 마시니 그나마 다행이지만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있다. 방 구석에서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원망하다보면 충분히 나에게 악감정을 품고 난니맨으로 흑화했을 개연성이 농후하다.


자승이가 난니맨인지는 만나보면 감이 올 것이고 감독 방에 출근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현철 감독이 쓰던 거라 찝찝하긴 하지만 데스크탑도 내 노트북보다 빠릿빠릿하고 탕비실엔 커피 머신이 있어서 언제든 공짜 아메리카노를 마실 수 있다. 아직 일은 시작도 안 했지만 이렇게 집 밖에 나와 있는 것만으로도 건실한 사회인이 된 느낌이다. 가족들에도 면이 섰다. 특히 세미에게는 맨날 방구석에서 늦잠 자는 모습을 보이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석 팀장인 줄 알았는데 양서연 PD였다. 한 손에는 표지에 ‘구멍가게’라고 적힌 시나리오가 한 부가 들려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였다. 나보고 ‘구멍가게’를 연출하라는 거다.


“팀장님이 감독님에게 한 부 갖다 드리래서요.”

“고마워요.”


다음 작품은 천천히 얘기하자더니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오나? 억지 웃음을 지으며 받아들긴 했지만 속이 뒤틀렸다. 항의라도 하듯 냅다 사무실을 박차고 나와 자승이를 만나기로 한 카페로 향했다. 약속 시간 한참 전이었지만 열불이 나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영화과 후배이자 ‘꼴리는 영화’ 조감독 자승이는 카페에 도착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빨리 왔어?”

“집에 있어봤자 할 일도 없어서요.”

“그렇긴 하지..”


자승과는 통화는 두어달에 한 번 꼴로 했지만 얼굴 본 건 거의 반 년만인데 안 본 사이에 살이 더 쪄 있었다. ET처럼 팔 다리는 가늘었고 배가 툭 튀어 나와 있었다.


“몇 키로냐?”

“95요.”

“100키로 찍으려고?”

“아니요. 이거 쓰느라 운동을 못 했어요. 이젠 빼야죠.”

“운동 하면서 써야지. 우리 나이엔 잘 빠지지도 않아.”


쓰잘데기 없는 소리를 던지면서 자승의 관상을 살폈는데 음흉한 악플러의 낌새는 나지 않았다. 우울한 감독 지망생의 기운이 너무 강했다.


“축하드려요 감독님! 감독 방도 생기고.”

“그깟 감독 방 따위가 뭐가 중요해. 영화를 잘 만들어야지. 됐고.. 악플 땜에 죽겠다. 누가 자꾸 영화에 악플을 다네..”

“개봉한지 10년이 지났는데요? 부럽습니다. 아직 관객들에게 잊히지 않았다는 뜻이잖아요.”

“그런가?”


역시나 자승은 아닌 듯. 악플 얘기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딴 악플이 달리는 게 부러워?”


확인 사살을 하려고 “최경진 감독 직업 바꿔라..”는 ‘꼴리는 영화’에 달린 난니맨의 관람평을 보여줬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내가 자승을 아는데 다른 건 몰라도 거짓말은 못 하는 스타일이다. 자승은 난니맨이 아닌 게 분명하다.


“누굴까? 어쩐지 나를 아는 놈 같지 않아?”

“글쎄요..”


시큰둥했다. 자기 시나리오 읽어주겠다고 나와서 내 영화 얘기만 하니까 관심이 없는 것이다.


“맞다. 나 얼마 전에 박미나 만났다.”

“아 미나요? 잘 지내요?”

“좀 재수 없던데? 잘 나가는 투자사 직원이라고 뻐기는 것 같고.”

“뭐 그러든가 말든가요.”

“니 시나리오는 미나에게 보여줬어?”

“아니요.” 

“왜 안 보여줘? 잘 나가는 투자사 직원님인데!”

“아 됐어요.. 걘 멍청해서 안 돼요. 걔랑 엮이면 될 일도 안 된다니깐요.”

“과연 그럴까? 멍청하면 그 자리까지 못 갔지. 그리고 멍청하면 더 좋지 뭐. 혹시 알아? 옛 정이 있으니 더 잘 해 줄지?”

“됐다니까요! 걔가 얼마나 못 됐는데요. 뒤끝은 또 얼마나 쩌는지..”

“쿨해보이던데?”

“아유 모르는 소리 마세요. 가뜩이나 시나리오도 안 써져서 심난한데.. 이번에 진짜 고생했어요. 안 써져서.”

“그러면 여기와서 조감독 한 편 더 해. 혼자 놀기 심심한데 와서 같이 놀면 좋잖아?”

“그냥 제 시나리오에 전념하겠습니다. 저도 이젠 적은 나이가 아니잖아요. 형은 데뷔라도 했지..”


마음 같아선 니가 무슨 감독이냐 조감독이나 한 편 더 하라고 설득하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싸해 질 것 같아서 참았다. 그래! 정 그렇다면 어디 얼마나 대단한 시나리오를 썼는지 확인해주마. 각오해라.


“시나리오는 가져왔어?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시나리오여서 이메일로도 못 보낸다는 건지 너무너무 궁금하다.”


자승은 지 시나리오 얘기를 꺼내자 그제야 환한 얼굴로 가방 속에서 주섬주섬 A4 뭉치를 꺼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자승이 테이블 위에 올려둔 시나리오는 마치 벽돌책처럼 두툼하고 묵직했다. 페이지 수를 확인해보니 무려 200장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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