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가 이렇게 두꺼워? 드라마 대본이야?”
“아니요. 영화요.”
“영화가 왤케 길어! 아니 이게 몇 장이야? 200장?! 시나리오가 아니라 대하 장편 소설인줄? 이걸 여기서 다 읽으라고?”
“네.”
“사무실 가져가서 읽으면 안 될까? 오늘 밤을 새워서라도 다 읽고 내일까진 꼭 얘기해줄게.”
“그건 좀 그래요. 아직 미완성이라서요. 저는 내 작품이 미완성으로 돌아다니는 게 싫어요.”
“다 읽고 돌려주면 되잖아. 설마 내가 이걸 여기저기 돌리겠어?”
“안돼요. 미완성인 채로 내 품을 떠나 있는 게 싫거든요.”
“미완성인 작품을 읽는 건 괜찮고?”
“곧 완성할 거니까요.”
“내일 돌려주겠다니까? 나 회의 땜에 다시 사무실 들어가봐야 해서 여기 오래 못 있어.”
“그럼 되는 데까지만 읽으세요. 나머진 다음에 만나서 읽어주시면 되죠.”
감독 준비를 오래 하다보니 피해 망상에 강박증까지 겹친 듯 했다. 얄미워서 딱밤이라도 한 대 때려주고 싶었으나 이러는 심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어서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자승이는 몇 년 전부터 모 시나리오 공모전에 출품한 시나리오가 제목과 작가 이름만 바뀐 채로 돌아다니는 꼴을 당했다고 주장해왔다.
자승의 주장에 의하면 자신의 시나리오를 도둑질한 걸로 추정되는 모 제작자에게 전화해서 따지니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며 사람 매도하지 말라고 버럭 화를 냈다고 했다. 공모전 심사과정에서 자승이의 시나리오가 유출된 듯 한데 경찰이 수사를 하지 않는 이상 진실을 알 길은 없었다.
자승이는 도대체 그 제작자가 누구인지 무슨 공모전에 낸 건 지도 알려주지 않았는데 명예 훼손으로 소송 당할 우려가 있어서라고 했다. 암튼 자승은 그 사건 이후 공모전이나 지원사업에는 일절 시나리오를 내지 않았고 시나리오도 진짜 믿을만한 소수의 지인들에게만 보여주었는데 그 중 한 명이 바로 나다.
나를 믿어주는 건 고맙다만 이 두꺼운 시나리오를 앉은 자리에서 다 읽는 건 무리였다. 난니맨도 아닌 것 같은데 괜히 불러냈다는 후회가 들었다. 읽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지만 예의상 읽는 척은 해야 할 것 같아 꾸역꾸역 페이지를 넘겼다.
“물 좀 떠올게요.”
자승이는 카운터로 가서 찬 물을 떠 왔다. 가만 보니 이마에 식은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고 안색이 좋지 않았다.
“어디 아파?”
“잠깐만요.”
자승은 가방에서 주섬주섬 약 봉지를 꺼내더니 찬물과 함께 입 안에 털어넣었다.
“컨디션 안 좋은 것 같은데 빨리 들어가봐. 나머진 다음에 다시 읽을게.”
“아니에요. 약 먹었으니까 나아질 거에요. 계속 읽으세요.”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던 놈을 불러낸 죄가 있으니 꾸역꾸역 읽고는 있는데 지난 번 버전과 뭐가 달라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고치긴 한 건가? 이럴 땐 두리뭉실한 인상 비평이 답이다.
“니 시나리오는 성체 줄기 세포 같아.”
“네?”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얘기지. 장르도 마찬가지고. 로맨틱 코미디 같기도 하고 액션 스릴러 같기도 하고. 판타지 같기도.. 아니다. 판타지는 아니지?”
“애매하다는 뜻인가요?”
“아니. 쓰기 시작 한 지 몇 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완성을 못하고 있잖아. 대기만성인거지.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는 뜻이야.”
애매하다는 뜻이다. 자승이가 시나리오는 못 써도 눈치 하나는 빠른 편이다. 내가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했을 때 새내기로 처음 만났으니 안 지 20년 가까이 된 사이다. 학창 시절 단편영화 워크샵 부터 시작해서 졸업 후에도 이런 저런 알바들을 많이 했고 1년 가까이 동거동락하며 내 조감독까지 해 줬으니 이젠 눈빛만 봐도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있었다. 극찬을 기대한 건 아니겠지만 내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낙담하는 눈치였다.
“알았어요. 대충 느낌 왔어요. 에휴. 더 써야겠네요.”
“아니야. 쉬엄쉬엄해. 무리하지 말고. 영화라는 게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잖아?”
괜히 애매하다는 인상을 줘서 혹시나 앙심이라도 품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됐지만 자승인 내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 눈치가 아니었다. 내가 어지간해선 남의 시나리오에 대해 호평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대로 자리를 끝냈다간 후환이 두려웠다. 진짜로 앙심을 품을 수도 있으니 늘 그랬듯 그래도 니가 나보단 낫다 내가 지금 남 걱정 할 때가 아니다 등등 자학 개그를 늘어 놓았고 밀리언 필름은 듣보잡 신생이라 신인 감독을 데뷔시켜줄 역량이 없다는 등의 뒷담화를 까줬더니 그제야 솔깃해하며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다가 굳이 여기까지 기어 나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승이가 원하는 건 내 모니터가 아니라 밀리언 필름에 자신을 감독 후보로 소개시켜 주는 것이었다. 내가 그렇게 듣보잡 신생이라고 뒷담화를 깐 밀리언 필름이라도 영화사랑 계약하고 감독 방에서 일하는 내가 부러웠던 것이다.
“형 회사 기획팀 있어요?”
“있지.”
“기획팀 모니터 같은 걸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직원들을 여기로 불러내서 시나리오를 읽히라고?”
“아.. 아니요. 기획팀 모니터라면 그냥 파일로 보내드릴게요.”
이 새끼까지 날 무시하나? 갑자기 빈정이 확 상해버렸다. 나보곤 표절의 위험이 있으니 자기가 보는 앞에서 읽어야 한다고 해놓곤 기획팀에는 파일로 보내주겠다고? 대충 주례사 비평이나 하고 좋게 좋게 일어나려고 했으나 빈정이 상해버려 남은 커피를 원샷 후 융단 폭격을 가했다. 더 이상 애매하게 까고 싶지 않아졌다. 종종 이렇게 혹평한 시나리오가 잘 풀리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자승이는 예외일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 기획팀 모니터라.. 알았어. 솔직히 말할게. 이제 그만 써. 어차피 너 이걸론 데뷔 못해. 회사에 보여줘봤자 무의미하다는 얘기지. 그리고 이걸 회사에 보여줬다간 내 크레딧만 깎여. 감독이란 모름지기 시나리오를 보는 안목이 중요한 건데 이걸 읽어보라고 준다는 건 회사 망하라는 이야기거나 내가 시나리오를 보는 안목이 없다는 얘기잖아? 그리고 다음부터 모니터를 원하면 시나리오는 파일로 보내줘. 앉은 자리에서 다 읽으라는 건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나는 너를 아니까 괜찮은데 아는 사람하고만 영화 할 건 아니잖아? 니가 왜 이러는 지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이제는 사람을 좀 믿어보는 게 어떨까?”
“알겠어요. 미안해요 형.”
자승의 풀이 죽은 표정을 보자 아차 싶었다. 자승이 난니맨은 아닌 것 같지만 괜히 적으로 만들었다간 제2의 난니맨으로 거듭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임 감독에게 악감정을 품고 임 감독의 유작이 되어버린 ‘유언’에 악플을 남긴 것처럼 자승이라고 ‘꼴리는 영화’에 악플을 남기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는 것이다. 이대로 헤어지기엔 찝찝해서 다시 밀리언 필름 욕을 늘어 놓았다. 자승이에게 밀리언 필름을 소개해주기 싫은 게 아니라 소개 받을 가치가 없다고 느끼게 만들기 위해서다.
“나 대하는 거 봐. 얼마 전 대표가 불러서 왔을 땐 앞에 손님 있다고 3시간 넘게 기다렸다니까? 그게 감독한테 할 짓이냐? 아무리 봐도 여긴 영화사가 아니야. 강남 건물주 아들이 취미 생활 하는 곳이지.”
자승인 계속 풀이 죽어 있었고 기운 내라고 선심 쓰듯 조감독 자리를 제안했다. 일자리를 준다는데 혹평 쯤이야 용서해주겠지. 아니나 다를까 조감독 제안을 하자 약간은 기가 사는 듯 했다.
“죽어도 조감독은 안 할 생각이었지만 형이 이렇게까지 말씀해주시니 한 번 생각은 해볼게요.”
예상 외였다. 감독 준비 중이니 조감독 제안은 거절할 줄 알았는데.. 지금 자승이 상태로는 조감독을 해 준다고 해도 걱정이다. 상전 모실 일 있나.. 아.. 내 코가 석자인데..
“그럼 시나리오 보내주세요.”
“어? 어.. 알았어. 사무실 들어가서 바로 보내줄게.”
“네. 조감독 할 수 있을 진 일단 읽고 나서 생각해 볼게요.”
자승과 헤어지고 사무실에 돌아오자마자 ‘구멍가게’ 17고를 자승이의 이메일로 보내주었다. 설마 이걸 읽고 하겠다고는 안 하겠지. 자승이가 조감독을 해준다 해도 ‘구멍가게’를 연출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자승이가 있으면 감독 준비 하는 시늉에 도움은 될 것이다. 아무튼 자승이도 난니맨은 아닌 것 같고 도대체 누가 난니맨인지 유력한 용의자를 추리고 있는데 카톡 알림이 울렸다.
‘감독님 어제는 잘 들어가셨어요?’
임 감독의 장례식장에서 재회한 구창한 작가였다. 예상치 못한 연락에 잠깐 반갑긴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엮여봤자 좋을 게 없을 인연이라 답장을 보낼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또 다시 톡이 왔다.
‘감독님! 어제는 오랜만에 정말 반가웠습니다. 이메일 주소 알려주시면 말씀드린 시나리오 보내드리겠습니다.’
구 작가가 내 인생에 도움이 될 날이 올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날은 안 올 것 같다. 구 작가가 보내준 시나리오가 만약 내가 준비하고 있는 작품과 비슷하기라도 했다간 표절 시비에 휘말릴 리스크만 존재할 뿐이다. 이메일을 알려주는 순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가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구 작가는 무려 5만원 짜리 스타벅스 기프티콘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꼴리는 영화’에 10점 만점을 준 관람평도 캡쳐해서 보내주었다. 날짜를 보니 개봉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갑자기 구 작가에 대한 호감과 신뢰도가 급상승했다. 내 영화를 잘 봤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구 작가의 아이디는 영화인 지망생 답게 ‘cineman1895’였다. 5만원짜리 스타벅스 기프티콘 더하기 ‘꼴리는 영화’에 10점 만점까지 줬는데 이메일 하나 안 알려주는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에이.. 설마 별 일 있겠어? 내 이메일 주소를 보내주었고 곧장 답이 왔다.
‘시나리오 보냈습니다. 절 부탁드립니다!’
절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가 아니고?? 작가라면서 이런 오타를 치다니.. 잠깐 올라갔던 신뢰도가 다시 하락했는데 찬찬히 읽어보니 어째 오타가 아닌 듯 했다. 절 부탁한다라니.. 분하지만 웃겼다. 생각해보니 구 작가가 재능은 있었다. 어찌됐건 공모전 심사위원인 임 감독에게 최종심에서 픽을 당한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뭘 썼는지 한 번 읽어는 볼까? 안 본 사이에 얼마나 발전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메일 함을 열어보니 구 작가가 보낸 시나리오가 도착해 있었다.
‘가족사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