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사냥? 스릴러야? 제목은 그냥 그랬다. 가족을 사냥하는 싸이코패스 얘긴가?
내용은 둘째 치고 설마 구 작가도 200장 넘게 쓴 건 아니겠지? 혹시나 해서 열어보니 다행히 80장으로 딱 좋았다. 오랜 기간 세상과 단절된 채 방구석에 틀어박혀 집필에 열중하다 보면 시나리오가 아니라 글자수 20만 자가 넘어가는 대하 장편 하소연이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건 소설로 각색한다 해도 20만 자가 넘어가는 듣보잡의 원고는 출판사에서 관심 자체가 없고 출판될 일이 없으니 자연히 영화화도 불가능하다. 이렇게 지망생으로 오래 썩다 보면 세상과 멀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구 작가의 시나리오 모니터는 개인적으로 부탁받은 일이니 회사 데스크탑 말고 내 노트북으로 다운받아 읽어야 마땅하지만 글자 크기가 10 포인트고 눈이 침침해서 잘 안 읽혔다. 그렇다고 출력하자니 종이가 아까웠다. 하지만 나에겐 회사 프린터가 있잖아? 이러려고 출근한 거 아니겠어? 출력하지 뭐. 그런데 내 노트북은 회사 프린터와 연결되어 있지 않고 어떻게 연결하는 지도 모른다.
출근 첫날부터 프린터를 붙들고 옥신각신하고 싶진 않았다. 아 맞다. 프린터 연결이라니.. 양서연 피디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좋은 핑계다. 서연에게 부탁해야지. 바로 이 순간을 위해 내가 출근하겠다고 한 거였지?
감독 방 문을 슬그머니 열고 밖을 내다보자 서연보다 재웅이 먼저 고개를 들고 내 쪽을 바라보았다. 가방을 챙기고 있는 걸 보니 퇴근 준비 중인 듯 했고 내가 여기서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팍팍 풍겼다. 관상을 보아하니 십중팔구 감독 지망생이다.
아마 퇴근하고 집에 가면 시나리오를 끄적이다 잠이 들 것이고 잊을 만 하면 한 번씩 공모전이나 지원사업에 로또 사듯 작품을 응모하고 있을 것이다. 몇 달 뒤 수상자 발표가 나면 혼자서 조용히 열폭하고.. 그러다 짧으면 반년 길면 일 년쯤 뒤엔 자아를 찾겠다며 퇴사한 후 해외여행 먼저 한 번 다녀오고 자기 시나리오에 올인하겠다고 동네 도서관이나 스터디 카페에 드나들며 또 다시 공모전에 서 너 번 떨어진 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나를 볼 때마다 절대로 나처럼은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겠지. 폭망 같은 건 자기 인생에서는 절대로 벌어지지 않을 일이라 생각하며.
딱 대학 졸업 직후 영화사 기획팀을 전전하던 시절의 내 모습이다. 그 때 내가 다니던 영화사에도 나 같은 감독이 있었는데 나 정도로 폭망 감독은 아니었고 나이도 지금 내 나이보다는 어렸던 것 같다. 끽해야 30대 후반? 생각해보니 그 감독은 결국 차기작을 못 만들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네. 이름은 생각이 안 나고 어디서 뭐 하며 사는 지 딱히 궁금하지도 않다.
***
퇴근 준비하는 재웅을 보며 회상에 빠져 있는 동안 재웅은 가방을 다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재웅은 행여나 누가 붙잡기라도 할까봐서인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고 서연은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양 피디님.. 뭣 좀 물어볼 게 있는데..”
서연은 내가 자신을 부르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 감독님!”
“미안한데 프린터 연결 좀 부탁할 수 있을까?”
“아 제가 연결시켜 드릴게요.”
서연이 성큼성큼 걸어 오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제 프린터 연결 된 거 확인했는데 이상하네요.”
“데스크탑 말고 내 노트북. 아직은 내 노트북이 편해서..”
“네 잠깐만요.”
감독 방에 들어온 서연은 곧장 내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만지작 거렸다. 의외였다. 기계와는 친하지 않을 것 같은데 이런 것도 잘 할 줄이야! 이과형 미인 같은 건가? 긴 생머리에서 풍겨오는 샴푸 냄새도 향긋했다. 역시 출근하길 잘 했어. 노트북도 잘 가져왔고. 안 가져왔음 서연과 이렇게 단 둘이서 이야기 할 시간도 없었을 거 아냐.
“다 됐어요. 출력하시려는 파일이 뭐에요?”
“아 그건 내가 할게.”
“출력 완료되면 가져다 드릴게요.”
“안 그래도 되는데.. 빨리 퇴근해야 되지 않아?”
“괜찮아요. 저녁 약속 있어서 좀 이따 나갈거에요.”
“그래. 고마워요 양 피디님.”
구 작가의 ‘가족사냥’ 인쇄 버튼을 누른 후 출력이 완료되길 기다리며 탕비실에서 커피를 내리려고 했는데 커피 머신 앞에서 버벅대자 또 다시 서연이 다가와 친절하게 커피 머신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프린터에 커피 머신까지. 다시 한 번 출근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간에 집에 있어봤자 낮잠 아니면 드라마나 줄창 보고 있겠지. 그러고 보니 서연과 단 둘이서 대화를 나눈 건 처음이었다. 사무실엔 마침 아무도 없어 서연과 친해질 좋은 기회였다. 커피를 기다리며 스몰 톡을 시도했다.
“재밌어요?”
“네?”
“회사 생활이요. 어때요?”
서연은 주변을 살피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재밌지는 않은데요. 그래도 좋아하는 일이니까요.”
“좋아하는 일인데 왜 재미가 없어요?”
말해놓고 보니 너무 꼰대스러운 발언이라 아차 싶었다. 아.. 괜한 말을 했어.
“내 영화 만드는 게 재밌죠.”
내 영화? 설마 서연이 너도 감독 병이야? 조만간 퇴사 하겠구나..
“맞아요. 나도 옛날에 기획팀 다녀봐서 아는데 폭망은 했지만 내 영화 만드는 게 재밌더라고요.”
“그렇죠 감독님! 역시 감독님은 이해해주실 줄 알았어요.”
만약 나의 20년 전 영화사 기획팀 직원 시절에 대해 물어보면 감독과 피디 이전에 기획팀 선배와 후배로서 라포르를 형성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싶었는데 의외로 내 기획팀 시절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회사를 이렇게 오래 다니게 될 줄은 몰랐어요. 빨리 내 영화 만들어야 되는데..”
회사를 그만두고 내 영화를 만들겠다니.. 말리고 싶었지만 폭망하고 나서도 10년 넘게 내 영화 만들겠다고 빌빌대고 있는 주제여서 차마 말릴 수가 없었다.
“응원해 드리고 싶지만.. 제가 폭망 감독 따위여서..”
“그런 말 하지 마세요. 감독님! 전 감독님 영화 좋아해요. 극장에서만 두 번 봤는 걸요!”
“그걸.. 극장에서 봤다고요?”
“네.. 커피 다 됐네요.”
’꼴리는 영화’를 극장에서 두 번 본 20대 여성 관객이 있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빈말이래도 행복했다. 그 땐 양서연 피디는 미성년자 아니었나? 하지만 사실이라면 운명이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서연이 내려준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받아 들고 감독 방으로 오는 동안 유정과 이혼하고 차기작으로 대박 감독으로 거듭난 후 서연과 재혼해서 아이를 낳고 어린이집에 함께 데려다주는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우린 왜 이제야 만난 걸까?
세상에 어리고 예쁜 여자는 많다. 하지만 내 영화를 좋아한다고 극장에서 두 번이나 봤다고 거짓말까지 하면서 나에게 잘 보이려는 어리고 예쁜 여자는 없다. 거짓말이라도 고마웠다. 서연은 지금 이 순간부터 그냥 어리고 예쁜 피디가 아닌 운명의 파트너다. 이래서 중년남 칭찬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나니까 이 정도 망상으로 끝나는 거지 어지간한 중년남에게 걸렸으면 바로 스토킹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감독 방에 들어오자마자 나도 모르게 서연의 인스타에 들어가버렸다. 서연과 가까워지려면 많이 알 수록 유리하기 때문이다. 서연의 인스타는 비공개로 닫혀 있었다. 사진과 동영상을 보려면 계정을 팔로우해야 했다. 괜히 화가 났다. 내가 스토킹하는 걸 알아챘나? 설마 그럴 리가.. 내가 인스타를 보고 있는 걸 들킨 적도 없는데?
아니지. 이렇게 염탐만 하지 말고 스몰 톡을 나누며 라포르까지 형성한 사이니까 확 팔로우 신청을 해버려야겠어. 안 돼. 그건 매너가 아니야. 자기가 일하는 회사 감독님이 비공계 인스타 계정을 팔로우하면 얼마나 부담스럽겠어? 그리고 팔로우 신청을 수락하지 않으면 어쩔 거야? 설상가상 석 팀장에게 이른다면? 어쩌면 좋아할 수도 있어. 내 영화를 좋아한다고 했잖아? 나라면 극장에서 두 번이나 본 영화의 감독님이 팔로우를 신청하면 영광이라고 생각할 것 같은데? 하지만 나는 폭망 감독인걸? 그래도 내 영화를 좋아한다고 한 건 사실이잖아?
40대 아저씨가 20대 여직원의 비공개 인스타 계정에 팔로우 신청하면 안 되는 건가? 아.. 모르겠다. 그나저나 왜 인스타를 비공개로 돌렸지? 팔로우 신청을 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잘 나가는 투자사 직원 박미나에게 카톡이 왔다.
‘시나리오 잘 봤어요.. 버진 어게인요..’
잘 봤으면 됐지 문장마다 마침표를 두 개씩 찍어 놓은 꼬락서니가 어째 석연치 않았다. 그래도 잘 나가는 투자사 팀장님이 내 시나리오를 잘 봤다고 한 건 사실이니 갑자기 생각이 많아졌다. 밀리언 필름 버리고 자기네랑 계약하자고 하면 어떡하지? 밀리언 필름에 위약금을 내야 하나? 아니다. 굳이 그럴 필요 없지. 좀만 버티면 계약 기간 끝나니까 올해까지만 버티면 된다. 나중에 뭐라고 하면 ‘버진 어게인’은 밀리언 필름과 계약하기 훨씬 전에 써 둔 시나리오라고 하면 되겠지.
‘잘 봐줘서 고마워. 커피 한 잔 할까? 나는 빠르면 빠를 수록 좋은데.’
‘좋아요.’
좋다고 해서 바로 약속을 잡으려는데 되는 날이 없었다. 과연 잘 나가는 투자사 직원이다보니 비는 날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당장 벙개처럼 보는 건 어떠냐고 내가 너 있는 곳으로 가겠다고 했더니 안 된다고 했다. 그래도 내가 선배인데 건방지다 싶었지만 잘 나가는 투자사 직원인 게 중요하지 학교 선후배 따위가 뭐가 중요하냐. 박미나는 미팅은 어렵겠고 통화로 하자며 편한 시간을 알려달라고 했다. 내가 언제든 괜찮다고 하자 10분 뒤에 전화하겠다고 했다.
전화를 기다리며 박미나 이름으로 검색해보니 내가 모르는 사이 최근 대박 난 영화에 프로듀서로 참여했다고 나와 있었다. 학창 시절엔 얼굴이 예쁘고 몸매가 좋고 성격도 시원시원하지만 영화적 센스나 재능은 없어 보여서 무시했는데 이젠 완벽하게 역전이다. 메이저 투자 배급사의 잘 나가는 피디와 데뷔하자마자 폭망 후 10년 째 차기작을 준비하는 감독. 전자의 압승이다.
하지만 나에겐 ‘버진 어게인’라는 한 방이 있다. 만약 미나가 ‘버진 어게인’을 감명깊게 봤다면서 나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한다면? 생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면 밀리언 필름 따위는 바로 아웃이다. 듣보잡 신생 영화사 따위가 감히 나에게 19금 떡 영화 연출을 제안하다니!
러브콜이 오면 바로 뛰쳐 나가자. 까짓꺼 위약금 내라면 내지 뭐. 돈 보다 시간이 중요하니까. 나가게 되면 엊그제 미팅 때 3시간 가까이 기다리게 만든 강 대표에게 뭐라고 퍼부어줄까 궁리하고 있는데 10분을 넘어 30분쯤 지난 후 박미나에게 전화가 왔다.
“목소리 좋아 보인다?”
“오빠도 나쁘진 않네요.”
나쁘진 않다니.. 칭찬 같진 않았고 어투도 마냥 차분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