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나는 나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박미나가 새내기 시절에 집필한 시나리오를 읽고는 넌 감독은 아니니까 딴 길 찾아보라고 조언한 은인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 시나리오는 영화화 되었고 작가 데뷔에도 성공했지만 계속 감독하겠다고 시나리오를 끄적였다간 잘 나가는 투자사 직원이 아니라 지선 같은 방구석 폐인이나 동민 같은 17년차 감독 지망생이 됐을 지도 모른다.
“고맙지?”
“뭐가요?”
“다 내 덕분 아니야?”
“뭐가요?”
“감독은 아니니까 딴 길 찾아보라고 조언해 준 은인이 누구지?”
“아~ 그거요?”
“다 내 덕분이잖아? 만약 감독 한다고 계속 시나리오만 썼으면..”
웃자고 한 소리였는데 박미나는 웃어주지 않았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잘 나가는 투자사 직원님이라 폭망 감독 따위의 농담에는 웃어주지 않는 것이다. 폭망 감독 주제에 까불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로 느껴졌다. 바로 화제를 돌려야 했다.
“그래서 어떻게 봤어?”
“오빠도 바쁘실테니까 본론부터 말씀드릴게요.”
박미나는 그로부터 장장 30여분간 가열차게 내 시나리오를 디스했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겠는데 재미가 없고 올드하고 젠더 감수성도 떨어지고 여자들이 싫어할 것 같고 이런 걸 오빠라면 극장까지 가서 돈 주고 보겠냐 등등.. 나는 자신 있다! 돈 주고 볼 것 같은데? 라면서 꼬박꼬박 말대꾸를 했고 박미나는 결정타를 날렸다.
“그러면 오빠네 회사에서 하면 되겠네요. 투자도 직접 하시고요.”
“그건 좀..”
“왜요? 자신 있으시다면서요?”
“너도 알잖아.. 신인은 메이저에서 축복받으면서 데뷔해야 돼. 영화는 자기 돈으로 만드는 거 아니라는 말도 있고..”
“오빠가 왜 신인이에요. 엄연히 극장에 한 편 거신 기성 감독님이신데요.”
“아니야 안 하느니만 못한 데뷔였고 이미 세상에서도 잊혀졌어. 앞으로는 나를 신인 감독 카테고리에 넣어주면 좋겠는데..”
“무슨 말씀이세요. 얼마 전에 태준이랑도 얘기했었는데 태준이도 오빠 영화 재밌었다고 했어요.”
“허태준?”
“네. 태준인 다다음 작품 우리랑 하기로 얘기 중이거든요.”
“그랬구나.. 어쩐지 얼마 전에 회사에서 봤을 때 얼굴이 좋아보이더라.”
“차기작은 무슨 신생 영화사랑 하기로 했다는데 확실친 않대요. 신생이라서 안 하려고 했는데 돈을 엄청 쎄게 불렀다나봐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부러워 죽을 것 같다. 그런데 차기작을 신생에서 하기로 했다고? 돈을 쎄게 불렀다고?
“태준이를 오빠네 회사에서 봤다고요? 밀리언 필름 맞죠? 그러면 혹시 그 신생이란 곳이 오빠네 아니에요?”
“글쎄다.”
석 팀장에게 물어보면 알 수야 있겠지만 굳이 알아보고 싶지도 알아낸다 한들 알려주고 싶지도 않았다.
“안 알려주셔도 괜찮아요. 태준이가 조만간 그 신생 영화사랑 어떻게 됐는지 알려주기로 했으니까요. 어쨌든 ‘버진 어게인’은 저희랑은 힘들 것 같아요. 죄송해요.”
박미나는 그로부터 몇 분 더 내 시나리오를 잘근잘근 씹어대더니 다음 미팅이 있다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름 비장의 히든 카드였던 ‘버진 어게인’이 처참하게 까이고 나자 현기증이 났다. 아이돌 오빠와의 사랑 이야기나 쓰던 박미나 따위가 감히 내 시나리오를 혹평해?
참자. 화나면 지는 거다. 어차피 공정하고 객관적인 모니터는 아니었다. 이건 개인적인 감정이 듬뿍 담긴 사적 복수였다. 과거에 욕 좀 먹었다고 이런 식으로 복수를 하나? 억울하지만 이번엔 내가 졌다. 하지만 넌 내가 두고 본다. 다음 작품 대박나면 반드시 내 앞에 무릎을 꿇리고야 말 것이다! 참으려 애썼지만 분노로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숨을 고르고 있는데 자승이에게 전화가 왔다.
“왜?”
“‘구멍가게’ 다 읽었어요.”
“어땠어?”
“최악이네요.. 이거 조감독 할 바엔 굶어 죽더라도 내 시나리오 쓰는 게 낫겠어요.”
“조감독도 못할 정도야?”
“네. 시간이 너무 아까워요.”
“그냥 일이라고 생각하고 하면 어때?”
“미안해요 형. 노는 게 나아요.”
“내가 미안하지. 시간만 낭비시켰네. 시나리오는 잘 쓰고 있고?”
“아직 잘 안 되네요. 저는 여기까진 것 같기도 하고요.”
“그건 아니지. 눈 딱 감고 후딱 써. 우리는 시나리오만이 살 길이야. 시나리오를 잘 쓰면 우리가 겪고 있는 이 모든 어려움들이 다 해결되는 거야.”
“돈이 없어서요. 어디서 1억만 뚝 떨어지면 시나리오에 집중할 수 있겠는데.. 형 이런 부탁드려서 죄송한데 혹시 제 시나리오 현규씨에게 전달 가능할까요?”
자승은 내가 밀리언 필름을 소개시켜주지 않으니까 ‘꼴리는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했으나 지금은 스타가 되어 연락이 두절된 현규에게 시나리오 전달을 부탁했다. 조감독 제안도 거절했으면서 현규를 소개시켜달라니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돈 빌려달라고 하지는 않는 게 기특했다. 빌려줄 돈도 없고 거절하면 서로 민망하니까.
“너도 알잖아? 캐스팅 제안 했다가 두 번이나 까인 거.. 연락도 안 되고. 마지막 통화 때 현규 말로는 회사에서 나하고 놀지 말라 그랬대.”
“씁. 어쩔 수 없죠. 하여간 고마워요 형. 괜한 부탁해서 미안하고요.”
“아냐. 내가 더 미안해. 그럼 시나리오 잘 써서 서로에게 미안한 일 없도록 하자.”
“그럴 날이 올까요?”
훈훈한 멘트로 통화를 마무리 하려고 했는데 김이 빠졌다.
“저는 이젠 더 이상 비빌 언덕도 없어요. 정 대표님에게 보냈는데 연락도 없고..”
“그 형은 충무로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니까 기대하진 말고.. 그리고 니가 비빌 언덕이 왜 없냐. 정 안 되면 여기 와서 일해. 조감독이 시나리오가 무슨 상관이야. 돈도 없다며? 시나리오 쓰면서 조감독 한 편만 더 해.”
“그건 싫어요. 형.”
“그럼 박미나에게 보내보든가. 둘이 한 때 각별한 사이 아니었어?”
“굶어 죽으면 죽었지. 그럴 일은 없을 거에요.”
“알았고.. 또 통화하자.”
전화를 끊고 나니 현규에게 시나리오를 전달해달라는 걸 일언지하에 거절한 게 약간 후회됐다. 안 보내고 말로만 보냈다고 해도 되는 걸.. 어차피 매니저 선에서 까일 게 뻔하니 안 될 거 알지만 노력하는 척이라도 했으면 고마워라도 할 테고 생색도 낼 수 있었는데..
그나저나 확실히 자승이는 난니맨 같지 않았다. 자기 작품에 이렇게까지 깊이 빠져 있는 놈이 실없이 난니맨 따위의 부캐 놀이에 한 눈 팔 여유가 있을 리 없다. 그럼 도대체 난니맨은 누구지?
박미나에게 까이고 자승이에게도 까이고 연달아 두 번을 까였더니 한동안 잠잠했던 역류성 식도염이 재발하려는지 신물이 올라왔다. 이대로는 도저히 집에 갈 수 없었다. 이 비참한 감정을 털어내야 한다. 어두컴컴한 감독방에서 박미나에게 혹독하게 까인 ‘버진 어게인’를 다시 한 번 빠르게 읽어보았다. 박미나의 혹평에는 역시나 동의가 되지 않았다. 지가 뭘 안다고 이래라 저래라냐.
나중에 대박나면 어떻게 복수할 지 고민하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감독인생 2회차’ 다음 화를 집필하고 있었다. 이번 화에서 주인공은 전생에 자신을 무시했던 제작사 대표 이수연을 섹스로 혼내준다. 주인공이 앞으로 일어날 일들과 개봉 예정 영화들의 흥행 성적을 귀신 같이 알아 맞추자 콧대 높고 도도하던 수연은 주인공에게 점점 의지하게 되고 마침내 노예가 되는 전개다.
이번 화도 5000자 다 쓰고 업로드 하자마자 덧글이 달렸다. 늙은 제작사 대표는 관심 없으니 빨리 젊은 신입 피디 성연이나 따먹으라는 거다. 아이디를 보니 지난 번에 여배우 말고 신입 피디나 정복하라고 덧글을 달았던 독자와 동일 인물 같았다.
이 새끼 뭐지? 미친 놈인가? 한심하다. 이 세상에 볼 게 얼마나 많은데 19금 웹소설이나 줄창 읽는 인생이라니. 읽어주는 건 고맙지만 웹소설 주인공이 누굴 따먹든 지가 뭔 상관이란 말인가. 그래도 유료 독자이니 읽어주셔서 고맙다고 정중하게 답글을 달아주었다. 계속 안 읽어주기만 해 봐라.
길고 긴 하루였다. 첫 출근 날부터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웹소설 한 회를 집필하고 나서도 집에 가고 싶지 않아 애널맨 블로그에 다음 주 개봉영화 두 편의 흥행예상 평을 짤막하게 올렸다. 두 편 다 망한다로 예상했다. 내 상황이 상황인지라 남 영화들도 다 망하면 좋겠다는 희망 사항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
***
일어났더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확실히 피곤했던 모양이다. 대충 씻고 허둥지둥 출근했더니 다들 사무실에서 나가는 중이었다.
“밥 먹었어?”
석 팀장이 물었다.
“아니.”
“그럼 같이 먹으러 가자. 환영회도 할겸.”
맞다. 여긴 회사지. 직원들과 같이 점심을 먹어야 하는 구나. 귀찮으면서도 고마웠다. 설마 감독님이라고 내가 내야 되는 건 아니겠지?
“환영회?”
“응 환영회 겸 회식. 우리는 점심 회식을 선호하거든.”
석 팀장과 직원들을 따라 영화사 근처 백반집에 우르르 몰려 가서 간단하게 반주를 곁들여 밥을 먹고 있으려니 과거 영화사 기획팀 직원 시절이 떠올랐다.
내가 처음부터 감독의 길을 걸었던 건 아니다. 야심하게 만들었던 영화과 졸업작품이 전국의 모든 영화제 진출에 실패하는 바람에 감독의 꿈을 접고 선배가 소개시켜 준 영화사에 들어가 1년 정도 다녔었다. 감독이 꿈이었지만 영화사 직원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았는데 회사가 망해버려 본의 아니게 다시 감독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그 때만 해도 내가 영화를 안 하면 안 했지 폭망 감독으로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직원들이 다음 주에 개봉할 영화들에 대해 흥행 예상을 하는 걸 듣고 있노라니 타임머신을 타고 그 때 그 시절로 돌아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 당시엔 누구보다 흥행 예상 적중률이 높은 편이어서 반가운 마음에 직원들의 대화에 끼어들고 싶었지만 지금은 영화사 기획팀 직원이 아니라 ‘꼴리는 영화’ 감독이라는 자괴감에 잠자코 있었다.
내가 남의 영화에 대해 무슨 말을 하든 속으로는 니 영화나 잘 만들라고 생각할 게 뻔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 석 팀장이 최 감독도 예전에 기획팀 직원이었다고 폭로했는데 다들 별 반응이 없었다.
“애널맨은 두 편 다 망할 거라고 하던데?”
조재웅이 내가 어제 애널맨 블로그에 올린 흥행 예상 평을 언급했다. 애널맨이 네임드이긴 한가보다. 일반인은 몰라도 동종 업계 종사자들에겐 확실히 알려져 있는 듯 했다. 조재웅의 말이 끝나자마자 서연이 말했다.
“걔는 맨날 망한다고만 하잖아? 누군지 정체도 모르는 사람 얘길 신경 쓸 필요 있어? 그냥 영화 좋아하는 할 일 없는 오타쿠 같던데.”
양서연 피디에게 이런 까칠한 면이 있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