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 팀장은 서연보다 더 까칠했다.
“그보다는 영화 감독 지망생 아닐까 싶다. 일반 관객이 그러고 있으면 정말 할 일 없는 거고. 한 때 감독이었을 수도 있고.”
역시 석 팀장이다. 정확히는 폭망 감독이지만 지망생이나 폭망 감독이나 그게 그거니까.
밥을 다 먹고 테이크 아웃으로 커피 한 잔을 사 들고 사무실로 들어가니 회의실에서 상큼 발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강 대표의 호탕한 목소리도 간간히 들려오는 걸 보니 누군가와 미팅 중인듯 했다. 인사할 분위기는 아닌 듯 해서 감독 방에 들어가서 유튜브를 틀어놓고 한 숨 돌리고 있는데 밖에서 직원들이 큰 소리로 강 대표에게 인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나가서 인사해야 하나? 폭망 감독도 엄연히 감독인데 대표 왔다고 쪼르르 나가서 인사하는 건 쫌 아닌 것 같았다. 집에 혼자 있을 때와는 달리 회사에 나오니 생각지도 못한 불편함이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다행히 석 팀장이 먼저 내 방으로 오더니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다며 회의실로 데려가 주었다.
회의실에는 강 대표와 처음 보는 남녀가 있었다. 행색을 보니 딱 봐도 매니저와 여배우였다. 강대표는 그들을 무슨 엔터 실장과 소속 여배우라고 소개해 주었다. 여배우는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강 대표는 나를 감독님이라고 소개해주었는데 무슨 영화를 만든 감독인지에 대해선 전혀 얘기 하지 않았다. 그냥 우리 감독님이라고만 했다.
이해는 한다. ‘꼴리는 영화’는 분명 내가 만든 영화가 맞지만 그걸 만든 감독이라고 하면 서로 민망할 게 뻔하고 아예 얘기를 안 하면 자존감이 하락했다. 내가 그 영화 감독이라고 소개하면 반응은 셋 중 하나다. 무슨 영화인지 모르거나 모르는 척 하거나 난처해하거나. 애초에 만들질 말았어야 했다. 그런데 왜 나에게 인사를 시켜준 거지? 무슨 영화를 만든 감독인지조차 알리고 싶지 않으면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배우는 강 대표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듯 자리에서 일어나 씩씩하게 인사를 했다.
“감독님 안녕하세요! 유리아에요.”
눈웃음을 날려준 것 까진 고마웠지만 그 짧은 와중에 내 행색을 위아래로 스캔하는 게 느껴졌다. 그제야 누구인지 기억이 났다. 강 대표가 ‘구멍가게’ 주인공으로 추천하며 인스타까지 보여줬던 그 유리아였다.
유리아는 예쁘긴 했지만 인상이 좋진 않았고 자격지심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런 것도 감독이냐는 눈빛이었다. 옆에 앉아 있는 매니저의 살짝 건들거리는 자세를 보아하니 둘은 내가 ‘꼴리는 영화’의 감독인 걸 아는 눈치였다. 유리아는 싼티는 나도 귀여운 맛이 있었지만 매니저는 태도가 불량해 보면 볼 수록 비호감이었다.
아.. 이런 애를 데리고 영화를 찍으라니.. 여기가 바닥이라는 실감이 났다.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아 빨리 나가고 싶었지만 어쩐지 잠깐이라도 앉아 있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라 유리아의 맞은 편 자리에 앉아 주었다. 강 대표는 ‘구멍가게’에서 유리아가 맡을 배역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유리아의 실물을 보니 구멍가게 여사장의 섹시한 딸 역할로 딱이라며 내 맞장구를 유도했고 나는 대충 맞장구 치는 척만 하면서 하루 빨리 여기서 나가야겠다는 다짐만 거듭했다.
유리아는 연기 경험이 전혀 없는 생짜 신인 지망생이었다. 어쩐지 연기자 포스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어디서 데려왔는 지는 안 들어봐도 알 것 같았다. 매니저와 강 대표의 대화를 들어보니 매니저가 자주 가던 모던바나 토킹바 같은 데서 스카웃 했다는 뉘앙스였다.
유리아라는 여배우와 ‘구멍가게’라는 제목의 영화로 컴백 했다간 내 영화 인생은 거기서 끝이다. 내가 이러려고 10년을 버틴 게 아니다. 하지만 가명으로 알바 삼아 찍는 거라면? 오랜 만에 현장 감도 찾을 겸? 뭐 그 정도는 나쁘지 않을 수 있겠지만.. 아니다. 이젠 시간이 없다. 10년 전에도 타협을 거듭하다 폭망 감독으로 전락한 게 아닌가.. 한 번만 더 그랬다간 다시는 영화를 만들 수 없을 것이다.
강 대표는 유리아와 매니저 셋이서만 할 이야기가 있다는 눈치를 줘서 나 먼저 일어나 감독방으로 돌아와 보니 책상 위엔 두툼한 시나리오 한 부가 놓여 있었다. 구창한 작가의 시나리오 ‘가족사냥’이었다. 양서연 피디가 출력이 완료된 걸 내 방으로 갖다 준 듯 했다. 안 본 사이에 얼마나 발전했는지 궁금해서 펴 들긴 했지만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인지 한 글자도 읽히지 않았다. 그래도 대충 훑어보니 날림으로 쓴 느낌은 아니었다.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감독님!”
문 밖에서 서연의 상큼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요. 내일 봐요.”
고마웠다. 유리아랑 ‘구멍가게’를 찍을 지도 모르는 나 같은 것도 감독이라고 꼬박꼬박 감독님 호칭을 붙여주다니.. 서연은 보면 볼 수록 유복한 집에서 곱게 잘 자란 티가 났다. ‘감독 인생 2회차’ 아니 나의 영화 인생 시즌2의 파트너로 합격이다.
연출 제안이 온 게 ‘구멍가게’만 아니었다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구멍가게’ 말고 가족에게도 떳떳하게 얘기할 수 있는 작품을 최선을 다 해서 준비하고 서연의 세심한 서포트를 받고 결국엔 흥행에도 성공하고! ‘구멍가게’를 차기작으로 고민해보겠다는 조건으로 감독방을 차지하고 앉아 있는 내 신세가 그저 참담할 뿐이었다.
혹시 각색을 잘 하면 걸작으로 거듭날 가능성이 있을 지도 모르니까 다시 한 번 제대로 읽어보려 했지만 ‘구멍가게’는 여전히 읽히지 않았고 이상하게 서연의 얼굴만 아른거렸다. 하룻밤만 기다리면 다시 볼 수 있지만 빨리 보고픈 마음에 비공개인걸 알면서도 인스타에 들어가봤다.
어라? 왠일인지 서연의 인스타는 다시 공개로 바뀌어 있었고 못 보던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방금 전에 업로드 된 회사 근처에 있는 카페 사진이었다. 테이블 위에 아이패드와 키보드가 놓여 있었고 하단에는 ‘#집필시작, #1일차’라고 적혀 있었다. 퇴근 후 바로 집에 가지 않고 카페에서 시나리오를 쓰다 집에 가려는 각오가 듬뿍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하트를 누르려다 말았다. 큰일 날 뻔 했다. 인스타 주소를 알려준 것도 아닌데 하트를 눌렀다가는 스토커로 의심받고 계정은 다시 비공개로 닫힐 지도 모른다. 설상가상 하트를 누른 계정의 주인이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중년의 폭망 감독이라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소름 끼칠 것인가. 절대로 내가 서연의 인스타를 염탐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면 안 된다.
다행히 내 인스타 계정에는 나의 정체가 드러날 만한 사진이 없고 아이디도 감독 최경진과는 전혀 상관없는 알파벳과 숫자의 무의미한 조합이었다. 언제 다시 서연의 인스타 계정이 비공개로 닫힐 지 몰라 일일이 사진들을 캡쳐해두었다. 백여장에 달하는 사진들을 거의 다 저장 완료할 무렵 뜬금없이 혜나로부터 카톡이 왔다.
‘감독님 출근 잘 하셨어요? 언제 놀러갈까요?’
유리아 미팅 이후 하락한 자존감이 혜나의 카톡 덕분에 조금은 회복됐다. 만나서 대화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으나 읽씹했다간 후환이 두려워 적당히 대응해주었더니 일하시다 당 떨어질 때 드시라고 커피와 케익 기프티콘을 보내주었다. 부담스러웠고 오늘따라 혜나의 플필 사진도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자연히 서연의 인스타 사진과 비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서연의 인스타에 전념하기 위해 대화를 끊으려는데 계속해서 톡이 왔다.
‘지금은 뭐하세요?’
‘식사는 하셨어요?’
‘혼자세요?’
‘사무실 어디에요? 주소 찍어주세요.’
혜나에겐 지난 번 대학로 일도 그렇고 고마운 게 많지만 밀리언 필름 사무실에서 만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읽씹하고 숨김으로 보내버리고 싶었지만 예의상 주소까지는 알려주고 회의중이라며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주소는 내가 숨긴다고 알 수 없는 것도 아닐 테니까. 설마 무작정 찾아오진 않겠지.
혜나와의 카톡을 마무리 짓고 다시 서연의 인스타에 집중하려는데 그새 다시 비공개로 바뀌어 있었다. 사진을 캡쳐해두길 잘 했다. 이러지 말고 당당하게 팔로우 신청을 해 버릴까? 하지만 서연이 게시글이 하나도 없는 정체 불명 계정의 팔로우를 수락할 리가 없다. 하지만 애널맨이라면?
아까 점심 식사 때 대화를 생각해보면 서연은 이미 애널맨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고 애널맨의 정체에 대해 그냥 영화 좋아하는 할 일 없는 오타쿠라고 했지만 어쩌면 팬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나름 파워 블로거이자 인플루언서이므로 어쩌면 팔로우를 수락해 줄 수도 있는 것이다. 바로 이거다 싶어 얼른 애널맨으로 새 인스타 계정을 만들었다.
만약 애널맨의 팔로우 신청을 수락해준다면 나는 앞으로 서연이 인스타를 비공개로 돌려도 언제든 서연의 인스타 사진들을 감상할 수 있게 된다. 디엠을 주고 받으며 비밀 친구로 발전할 수도 있고. 생각만 해도 짜릿했다.
애널맨으로 인스타 계정을 만들자마자 곧장 서연의 비공개 인스타 계정에 팔로우 신청을 했다. 만약 수락을 해 주면 감사 DM이라도 보내야 하나 고민했는데 부질없는 고민이었다. 반응이 없었다. 졸지에 서연의 계정을 힐끔거리는 수많은 발정난 똥파리들과 동급이 됐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까인건가? 아니야. 아직 확인을 안 했을 거야. 집필에 집중하느라 인스타는 들여다볼 틈도 없는 거겠지. 갑자기 서연이 지금 뭐하고 있는지 너무 너무 궁금해졌고 우연을 가장해 카페에 가서 확인하고 싶어졌다. 불편해 하는 눈치가 보이면 테이크 아웃으로 들고 나오면 되지. 잠깐 공개로 돌렸던 인스타를 스토킹해서 찾아왔다는 생각은 안 할 거야.
***
카페는 규모가 큰 편이지만 서연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인스타에 올라온 사진에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뭔가 잘 안 풀리는 지 사무실에선 보지 못한 심각한 얼굴로 아이패드 화면만 뚫어져라 응시 중이었다. 멀리서 봤지만 뭘 하는 진 금방 알 수 있었다. 아이패드에 인스타 화면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애널맨의 팔로우 신청은 거부한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애널맨이 까인 거지 감독 최경진이 까인 건 아니니까.
그러고 보니 회사 밖에서 단 둘이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괜히 아는 척 했다가 이 카페에 다신 안 오면 어떡하지? 단 둘이서는 보기 싫다는 얘기인데 데뷔작 폭망 만큼이나 큰 상처가 될 것이다. 지금 이대로도 나쁘지 않은데 굳이 더 가까워지려 노력할 필요가 있을까?
도대체 뭘 더 바라는 건데? 팔로우 신청을 거부했다는 걸 확인했으면 됐잖아? 어린 친구가 영화감독이라는 꿈을 이루겠다고 퇴근하고 집에도 안 가고 저렇게 열심인데 중년의 폭망 감독 따위가 아는 척을 하면서 방해하는 건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이다. 행여나 들킬까봐 조용히 몸을 돌려 카페에서 나가려는데 뒤에서 서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독님?”